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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
    고종황제,
    미국산 4기통 자동차 도입

    1961년 이전 : 자동차 산업의 태생

    1903년:고종황제, 미국산 4기통 자동차 도입

    고종황제 어차(현재 창덕궁 어차고에 소장)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자동차가 들어온 것은 1903년입니다. 고종황제의 즉위 40년을 맞는 해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미국 공사 알렌을 통해 미국산 자동차 한 대를 들여온 것입니다. 어떤 차종이었는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포드'와 '캐딜락'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당시에는 운송 시설이 열악하여 미국에서 우리나라까지 자동차를 운반하는 데에 오랜 시간과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인천항에 자동차가 도착한 것은 고종황제의 칭경식으로부터 몇 달이 지난 뒤였고. 배에서 내린 자동차는 경인선 기차에 실려 서울의 남대문 역까지 이동했습니다. 자동차는 일본인 운전기사에 의해 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궁 외부에서 이 차가 공식적으로 사용된 기록은 없으며, 1904년 러일전쟁 와중에 사라졌다고 합니다.

    1911년에도 황실용으로 두 대의 자동차가 들어왔습니다. 영국의 다임러에서 만든 리무진과 미국GM에서 만든 캐딜락 리무진이었습니다. 다임러는 고종황제가, 캐딜락은 순종황제가 이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인천부사에는 이 두 자동차가 1903년과 마찬가지로 인천항을 통해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992년에는 당시 문화제관리국과 현대자동차가 이 자동차들을 복원하기로 했고 1997년부터 5년에 걸쳐 순정황후 어차와 함께 수리, 복원했습니다. 그것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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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
    국내 최초로 자동차 도입

    1961년 이전 : 자동차 산업의 태생

    1903년:국내 최초로 자동차 도입

    어차

    우리나라에 최초로 자동차가 들어온 것은 1903년입니다. 고종황제 즉위 40주년을 맞은 경사를 축하는 칭경식(稱慶式)이 열린 해였습니다. 미국 공사 알렌을 통해 들어온 고종황제의 전용 어차였습니다. 운송 기술이 열악하던 때였기에 자동차가 궁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칭경식이 끝나고 수개월이 지난 뒤였습니다.

    2인승 오픈카인 이 자동차는 국내에는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일본인 운전사의 힘을 빌어야 했습니다. 오랜 시간과 품을 들여 가져온 자동차였지만, 시끄러운 소음과 가벼워 보이는 외관 탓에 왕의 위엄을 떨어뜨린다 하여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04년의 러일전쟁 와중에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정식 절차를 받아 수입된 첫 자동차라는 것, 그리고 고종황제의 어차였다는 것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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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
    도로개수사업 7개년 계획 수립

    1961년 이전 : 자동차 산업의 태생

    1907년:도로개수사업 7개년 계획 수립

    우리나라에 근대적 도로가 생긴 것은 1907년부터 시작된 도로개수사업 7개년 계획을 통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근대적 도로가 신설, 개수되었습니다. 이는 '신작로'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졌습니다.

    이 신작로 사업에서 도로는 1등급, 2등급으로 분류됩니다. 1등급 도로는 폭 7m가 기준이었고, 전주-군산, 평양-진남포 간을 이었습니다. 2등급 도로는 대구-포항, 광주-목포를 이었습니다. 이는 일본이 우리나라로부터 식량을 수탈하여 조달하려는 목적으로 진행한 9개 간선도로 사업과는 무관합니다.

    1910년 합방 이후에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도로의 필요성을 느껴 도청 소재지와 주요 군사시설 등을 연결하고 기존의 철도와 연계하는 쪽으로 도로개수사업의 중점이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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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
    도로규칙 공포 및 시행

    1961년 이전 : 자동차 산업의 태생

    1911년:도로규칙 공포 및 시행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제는 우리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도로의 필요성을 느껴 근대적인 도로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업은 지방행정의 중심인 도청 소재지와 주요 군사시설 등을 연결하고 기존의 철도와 연계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근대적인 도로가 모습을 드러내자, 이와 관련한 법규가 필요해 졌습니다. 이에 1911년 4월에는 도로규칙이 공포되어 시행되었습니다. 이는 도로의 종류, 관리 및 비용의 부담 등에 대한 11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도로를 1~3등 도로와 등외 도로의 4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그 중 1~2등 도로는 개수비용을 총독부가 부담하기로 정했습니다. 1등 도로는 서울로부터 도청 소재지, 주요 군사 사령부 소재지를 연결하는 도로를, 2등 도로는 도청 소재지 간 또는 도청 소재지와 관할 부청(일제가 지정했던 행정 관청), 주요 거점사이를 잇는 도로를 일컫습니다.

    1911년부터 1917년 10월 말까지의 1차 치도사업 기간 동안 연장된 도로는 총 4,987km에 이릅니다. 제2차 치도사업이 1922년까지 실시될 계획이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에 따른 공황과 북한지역의 극심한 반발로 무산되었습니다. 그럼에도 1930년 말 당시 우리나라의 도로는 1등 도로 2,906km, 2등 도로 7,332km, 3등 도로 8,672km 등 총 18,910km로 늘어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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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20
    국내최초 자동차 운송사업의
    시작과 활성화

    1961년 이전 : 자동차 산업의 태생

    1912~1920년:국내최초 자동차 운송사업의 시작과 활성화

    최초의 운송사업

    1912년 국내 최초로 자동차 운송 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승합자동차(당시 8인승)를 이용한 버스 사업이었습니다. 1911년 12월 29일 일본인 에가와(江川)가 경남 경무부로부터 영업허가를 받았고, 1912년 9월부터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운행 노선은 경남 마산-진주, 진주-삼천포 구간이었습니다. 마산-삼천포 구간은 승합자동차에 대개 10명 정도를 태우고 운행했습니다. 천막으로 지붕을 덮은 차량이었고, 저녁에는 아세틸렌 가스등을 달았다고 합니다. 요금은 마산-진주가 3원 80전, 진주-삼천포가 1원 30전이었습니다. 당시 쌀 한가마니 값이 3~4원이었으니 매우 높은 가격이었습니다.

    높은 가격에서 알 수 있듯이 소수의 부유층을 겨냥한 자동차 운송업은 1914년 오리이 상회가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버스 정기노선을 열면서 본격화됩니다. 허가된 노선은 총 9개로, 평양-진남포, 사리원-해주, 신의주-의주, 천안-은양, 김천-상주, 공주-조치원 등이었습니다. 전북에서는 일본인 야마모토 등이 전주-이리 노선을 허가받아 포드 T형 4대로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업은 전주-남원 구간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열악한 도로상황에도 불구하고 버스 운송 사업은 호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인들도 자동차운송업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지방의 부호들을 중심으로 버스사업을 시작했는데, 첫 한국인 운송사업자는 김갑순 씨였습니다. 그는 1915년에 공주-조치원 노선에 8인승 포드 차량 2대를 투입했습니다. 비교적 도로사정이 좋았던 구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20년대에는 공주-대전, 공주-예산으로 노선을 확대 편성했습니다.

    1919년 말에는 일본인 노무라가 일본에서 닷지 차량 2대를 들여와 지금의 서울 중구 남창동에서 경성택시를 설립하고 택시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요금은 지금과 달리 시간당으로 계산했는데, 서울을 한 바퀴 도는 데 3원이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1920년 초에는 포드 T형 2대와 오버랜드, 비크(뷰익) 등 4대를 투입한 계립 자동차조합이 설립되었습니다.

    1920년에는 전주의 최종열 형제가 일본인이 경영하던 야마모토 자동차부를 인수했습니다. 그리고 공화자동차부로 사명을 바꾼 뒤 버스사업에 참여했습니다. 1921년에는 군산자동차부와 마학진 씨가 버스운송업에 발을 들였고 우리나라 자동차 운송업에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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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
    자동차를 단속하기 위한
    '자동차 취체령' 공포

    1961년 이전 : 자동차 산업의 태생

    1915년:자동차를 단속하기 위한 '자동차 취체령' 공포

    자동차 사용 인구가 많아지면서 이로 인한 사회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서울 경시청은 자동차를 단속하기 위해 1915년 7월에 '자동차 취체령'을 공포했습니다.

    운전자는 운전면허를 소지해야 하고, 길 가운데로 달려야 하며, 마주 오는 마차 등을 피할 때는 좌측으로 가야하고, 속도는 25km이하로 운행해야 하며, 두 개 이상의 제동장치가 차에 달려 있어야 하고, 야간 운행을 위해 차체의 전면에 등불이 달려 있어야 한다는 것 등이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1921년 7월 4일에 이를 개정한 자동차 취체령과 자동차 취체규칙이 공포되었고, 10월 25일에는 도로 취체규칙도 개정·공포되었습니다. 이것은 1919년부터 시행된 일본 내 취체령 개정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주요 내용은 야간에 차 안에 등불을 달아야 하는 것과 자동차 검사 제도를 새로 제정·시행하며 최고 속도 제한을 시속 40km로 상향하고 차마의 통행방법을 기존 좌측에서 우측으로 바꾸는 것 등이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도로교통법이며, 오늘날 시행되는 자동차도로교통법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자동차 취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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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
    국내최초 자동차 정비업 시작

    1961년 이전 : 자동차 산업의 태생

    1916년:국내최초 자동차 정비업 시작

    전기운전기사로 한국에 와 있던 미국인 모리스는 친구 하워즈와 함께 서울 정동에서 자동차판매상회(모리스상회)를 시작했습니다. 1916년의 일이었습니다. 이는 국내 최초의 자동차 정비업이었습니다. 판매소와 정비소를 겸한 이 상회는 윌리스 오버랜드를 판매하기도 했지만, 자동차 부품을 현지에서 조달하는데 4~5개월이 걸리는 등 문제가 많아 4년 정도 운영되다가 문을 닫았습니다.

    국내 정비 산업의 기틀은 고종황제의 어차가 국내에 들어오기 전부터 마련되었습니다. 일본인 에가와(江川)가 현재의 종로구 관훈동에 '에가와 자동차공업사'라는 간판을 내 건 것이 효시였습니다. 에가와 자동차공업사의 주요 업무는 황실용 인력거와 마차를 수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곳을 기점으로 국내 정비 산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국은 일본인이 운영하던 국산자동차주식회사를 인수했습니다. 미군은 이를 미군 자체 정비공장으로 운영하였습니다. 김지남 씨는 광복되던 해 10월에 을지로 6가에 '삼우자동차공업사'를 설립했습니다.

    국내에는 이렇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정비업체들이 등장했습니다. 이들 중에는 현재 현대자동차의 전신이 된 정비공장도 있었습니다. 당시 이러한 업체들은 대부분 일정한 시설기준에 따라 공장을 가동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형편에 맞춰 적당한 설비를 갖추고 운영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비록 미비한 환경이었지만 이러한 발판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의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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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
    운송업 과당경쟁 방지를 위한
    승합자동차 조례 제정

    1961년 이전 : 자동차 산업의 태생

    1922년:운송업 과당경쟁 방지를 위한 승합자동차 조례 제정

    우리나라의 운송 사업은 버스와 택시에 의한 승객 운송이 주류였습니다. 이후 1912년에 일본인을 중심으로 트럭 운송 사업이 시행된 이후, 한국인이 가세하면서 운송업체 수는 급격하게 늘어났습니다. 1917년에 이르러서 운송 사업체 수는 154개, 노선 연장은 1,100km에 달했습니다. 노선 연장에 비해 사업체 수가 많은 것은 운송업이 영세했고 업계가 과잉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었습니다.

    운송업체간의 경쟁구도 때문에 1920년에 이르러서는 도산하거나 폐업하는 업체가 속출했습니다. 전주 지역에서 가장 경쟁이 치열했는데, 군산 자동차와 마학진 씨가 운영하던 업체가 모두 공화자동차부에 인수되었습니다. 경남 지역에서도 도산하거나 폐업하는 업체가 잇따랐습니다. 결국 1921년에는 경남도 당국이 개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경남자동차협회는 운송업체간의 경쟁을 방지하고 상호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결성되었습니다. 이것이 국내 최초의 운송업체 단체였습니다. 이 협회의 설립을 계기로 경남지역에서는 1노선 1업체의 원칙이 정해졌고, 종업원의 임금을 통일하는 등 경쟁방지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총독부는 1922년 4월 18일, 자동차 취체규칙 중 승합자동차 조례를 제정하였고 관보에 발표하였습니다. 이는 승합자동차 운송업의 과당경쟁을 막기 위한 것이었고, 이후 자동차 산업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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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
    조선운송주식회사의 설립

    1961년 이전 : 자동차 산업의 태생

    1930년:조선운송주식회사의 설립

    1930년 4월에 조선운송주식회사가 설립되었습니다. 자본금은 100만원이었습니다. 1921년 7월 청주에서 5인, 조치원에서 2인, 경성에서 1인의 상인을 중심으로 발기하였고, 10월에 조선운수창고주식회사를 본점으로 개업하였습니다.

    1921년 당시로서는 세련된 건물이었습니다.(건축물 관리대장에는 1930년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현대적인 사무소와 여러 동의 창고가 지어졌고, 운수창고와 미곡, 관염의 판매를 주업으로 했습니다. 1930년 6월 1일에는 국유철도 지정 운송회사로 지정되었습니다. 조선트럭, 남선트럭, 전북트럭, 영흥트럭 등 10개 트럭 운송업체를 통제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1937년에는 조선운송에서 흡수 합병하여 조선운수주식회사 청주지점을 발족했습니다. 그리고 1949년 9월 1일 상호를 한국운수주식회사 청주지점이라 변경했으며, 창고 13동(114,845평), 자동차 16대, 우마차 20대를 보유한 대규모 운수기관으로 성장했습니다. 1963년에는 대한통운주식회사 청주지점으로 상호를 변경했습니다. 2005년 3월 현재에는 구 건물에 점포와 주택이 병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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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
    국산자동차㈜의 설립

    1961년 이전 : 자동차 산업의 태생

    1937년:국산자동차㈜의 설립

    1937년 11월에, 일본인과 김용주 씨가 50:50으로 합작하여 경기도 부천에 국산자동차㈜를 설립했습니다. 자본금 69만원이었고 제작하는 품목은 스프링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등지로부터 자동차와 부품들을 수입할 수 없게 되자 국내에서 부분적으로 부품 생산, 수리, 재생이 이루어졌습니다. 국산자동차는 이러한 여건에서 자동차 부품생산을 가장 먼저 시작한 업체였습니다. 국산자동차의 자매회사인 조선자동차공업은 슬리브, 기어, 볼트, 너트 등을 생산했습니다. 이렇게 생산된 부품을 기반으로 국내 자동차사업은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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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
    기아산업의 전신인 경성정공 설립

    1961년 이전 : 자동차 산업의 태생

    1944년:기아산업의 전신인 경성정공 설립

    1944년 12월 서울 영등포에 설립된 경성정공은 기아산업의 전신입니다. 경성정공의 설립자 김철호 회장은 16세 때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그곳에서 자전거 기술을 배운 그는 오사카 소재의 삼화공장을 인수해 자전거 부품인 볼트와 너트를 만들어 크게 성공했습니다. 1944년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자전거 부품 제조공장인 경성정공을 설립했습니다. 자전거 부품 회사였지만 사실 경성정공은 중고 자전거의 차체와 부품을 재생하거나 조립하는 데 주력했고, 수공업으로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 부산으로 피난 간 그는 1952년 3월에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자전거인 3000리호를 출시했습니다. 이어 1952년 2월에 회사명을 기아산업으로 변경했습니다. 이는 훗날 국내 오토바이와 삼륜자동차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경성정공
    경성정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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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
    조선자동차공업조합의 설립

    1961년 이전 : 자동차 산업의 태생

    1945년:조선자동차공업조합의 설립

    1945년 12월 1일, '자동차공업조합'이 설립됐습니다. 광복과 함께 우리 손으로 국내 자동차산업을 발전시키자는 각오로 서울의 자동차 공업인들이 모인 것이었습니다. 이는 국내 최초의 자동차 관련단체였습니다. 초대 회장으로는 당시 가장 큰 정비 업체였던 경성서비스의 정무묵 사장을 임명했습니다. '자동차공업조합'이 설립된 목적은 본래 원활한 부품 공급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요 업무는 자동차정비에 필요한 부품을 조달하는 것이었고 미군정기관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제 시대에 정비업체에서 일하던 기술자들은 광복 후 스스로 정비업체를 설립했습니다. 이 경험 많은 기술자들은 작은 규모의 업체들을 제각각 만들었고 점차 소규모 정비업체들이 늘어났습니다. 이렇게 정비업계가 변화함에 따라 정비업만으로는 높은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결국 정비업계는 생산업계를 끌어들이게 됩니다. 그 결과 1949년 3월 29일, 이전의 '조선자동차 공업조합'이 '대한자동차공업협회'로 확대되어 발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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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
    현대그룹의 전신이 되는
    현대자동차공업사 설립

    1961년 이전 : 자동차 산업의 태생

    1946년:현대그룹의 전신이 되는 현대자동차공업사 설립

    1940년 초에 정주영 회장은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정비공장을 인수하여 운영했습니다. 이것은 현대가 자동차와 처음 맺은 인연이었습니다. 당시 정주영 사장은 소규모로 트럭 운송 사업을 시작했는데, 트럭을 운용하면서 여러 번 차량을 분해, 조립하는 과정을 거치며 작동 원리와 기능을 체득했습니다. 그렇게 자동차 관련 사업이 성공가도로 달리는 듯했지만,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고 일제가 부족한 물자와 인력을 징발하면서 군소공장을 강제 합병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제의 기업정비령으로 인해 정주영 사장의 회사는 일진공작소로 사실상 흡수·통합되었습니다. 결국 정 사장은 정비업에서 손을 떼고 맙니다.

    광복 이후에야 정주영 사장은 새로이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미군정으로부터 불하받은 서울 중구 초동 부지에 자동차 정비 공장을 지은 그는 1946년 4월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했습니다. 지금의 규모와는 달리 초기 종업원 수는 겨우 30여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정 사장은 정비업과 함께 조립사업도 함께 진행했고, 이때 벌어들인 자산을 바탕으로 1947년에 '현대토건사'라는 건설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정 사장은 한동안 두 가지 일을 병행하다가 1950년 1월 두 회사를 합병하여 '현대건설(주)'을 설립했고 자동차사업은 부설 중기공장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중기공장은 건설 시공의 기계화 증대와 함께 확장을 거듭했습니다. 이러한 사업경험이 훗날 현대자동차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현대 자동차 공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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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
    조선자동차공업조합이
    '대한자동차공업협회'로
    확대되어 발족

    1961년 이전 : 자동차 산업의 태생

    1949년:조선자동차공업조합이 '대한자동차공업협회'로 확대되어 발족

    대한자동차공업협회

    일제강점기에 정비업체에서 일하던 기술자들은 해방 이후 독립하여 정비업체를 설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비에 대한 경험이 많은 그들은 독자적으로 업체를 만들었는데, 이로 인해 소규모 정비업체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시장의 변화로 기존 정비업체들의 수익이 감소되었고, 결국 정비업체들은 생산업계를 통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1949년 3월 29일에 이전의 '조선자동차공업조합'은 '대한자동차공업협회'로 확대하여 발족하였습니다.

    '대한자동차공업협회'의 전신이 되는 '조선자동차공업조합'은 1945년 12월 1일에 설립되었습니다. 초대 회장은 당시 가장 큰 정비 업체였던 경성서비스의 정무묵 사장이었습니다. 이 조합은 원활한 부품 공급을 목적으로 설립했고, 자동차정비에 필요한 부품 조달이 주요 업무였습니다. 미군정기관에 지원을 요청하는 업무 또한 수행했습니다. 이는 광복과 함께 우리 손으로 국내 자동차산업을 발전시켜 나가자는 각오로 서울의 자동차공업인들이 모여 만든 '국내 최초의 자동차 관련단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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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
    자동차부품공업 육성대책 시행

    1961년 이전 : 자동차 산업의 태생

    1950년:자동차부품공업 육성대책 시행

    1950년 3월 29일 정부는 자동차부품공업 육성대책을 시행했습니다. 이는 상공부, 교통부, 국방부의 3부 공동으로 피스톤, 슬리브, 브레이크 라이닝, 팬벨트 등 자동차부품 13개 품목을 국산 장려품으로 지정하여 군납토록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생산업체 중 경쟁력이 우수한 업체들은 상공부, 교통부, 육군본부가 지정한 공장으로 군납하기 시작했고, 이는 상대적으로 생산력이 떨어지는 국산부품의 수요가 감소하는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때문에 부품업계는 국내 부품업계의 육성을 위해 군납을 건의했고, 정부는 이러한 건의를 받아들여 최초의 산업정책인 부품산업 육성대책을 시행하였습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로 인해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자동차부품공업 육성대책은 국내 자동차 산업의 근간을 마련한 최초의 자동차공업 육성책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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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
    하동환 자동차 공장 설립

    1961년 이전 : 자동차 산업의 태생

    1952년:하동환 자동차 공장 설립

    하동환은 신촌에 위치한 자동차 정비공장의 기술자였습니다. 그는 1952년에 자신의 이름을 따 하동환 자동차 공장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1955년 12월에 '하동환 자동차 제작소'로 사명을 변경하였습니다. 1995년부터 미군의 군용 폐차를 불하받아 재생시킨 부품들과 드럼통 철판들로 버스를 만들었는데, 이 버스의 인기가 대단히 높았습니다. 그래서 하동환은 '드럼통 버스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1956년 말에는 서울 서대문구에 정식으로 버스제작공장을 세웠습니다. 이전에는 드럼통 철판과 낡은 부품들로 버스를 제작했지만 이제는 버스 보디 전문업체로 자리 잡았습니다. 1950년대 말에는 규격화된 버스를 만들어 당시 버스업체들의 불편함을 해소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동환 자동차 제작소는 훗날 동아자동차공업이라는 이름을 거쳐서 쌍용자동차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동환자동차 공장
    하동환자동차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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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
    국산 장려회 주최로
    국산품 전시회 개최

    1961년 이전 : 자동차 산업의 태생

    1953년:국산 장려회 주최로 국산품 전시회 개최

    1953년 10월에는 국산 장려회 주체로 덕수궁에서 국산품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이 행사에서 종합대통령상을 수상한 것은 자동차 부품이었는데, 이는 자동차부품공업 육성대책의 영향이 큽니다.

    1950년 3월 29일, 상공부와 교통부 국방부는 3부 합동으로 자동차부품 13개 품목을 국산 장려품으로 지정하여 군납하도록 했고, 그 이후 부품업계는 군납을 적극 활용하여 판로를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국산 장려회가 주최한 국산품 전시회는 부품업계에 또 다른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국산품전시회 수상을 계기로 자동차 부품업체는 자동차 정비용 부품을 육군에 대량 납품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국내 업체들은 군납용 부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규격화된 생산을 시도하고 검사 제도를 도입하여 품질 향상, 시설 보완, 기술 향상을 이루어내었습니다.

    국산품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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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
    자동차 엔진 국산화에 성공

    1961년 이전 : 자동차 산업의 태생

    1955년:자동차 엔진 국산화에 성공

    시발자동차 공장
    엔진공장

    시발자동차의 제작자인 최무성 삼형제는 최초의 국산차를 만들기 위해 1954년에 기존의 '국제공업사'를 '국제차량주식회사'로 확대 개편했습니다. 하지만 자동차의 핵심 부품인 엔진을 국산화하는 단계에서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차체를 비롯한 여타 다른 부품과 달리 엔진은 굉장히 복잡한 구조를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해당 지식 없이 엔진 블록을 직접 만드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일본 동경의 기계설계학원에서 수학한 뒤 엔진 관련 실무 경험을 쌓은 함경도 출신의 엔진 기술자 김영삼 씨가 이러한 문제에 실마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실패 끝에 1955년 3월에 비로소 실린더헤드를 만드는 데 성공했고, 8월에는 4기통 시발 엔진을 제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엔진은 미군용 지프차를 모델로 했지만 최초로 자동차 엔진을 국산화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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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
    국산 엔진이 장착된
    한국산 1호 자동차 시발의 탄생

    1961년 이전 : 자동차 산업의 태생

    1955년:국산 엔진이 장착된 한국산 1호 자동차 시발의 탄생

    시발자동차
    시발자동차

    1955년 9월 탄생한 '시발'은 국내 최초의 자동차입니다. 서울 '국제공업사'의 최무성 삼형제는 기술, 시설, 자재 등 모든 것이 열악하던 시절에 미군 지프차를 베이스로 하여 제1호 국산 승용차 '시발'을 탄생시켰습니다.

    드럼통을 펴서 만든 상자형 차체를 씌운 시발은 문이 두 개 달린 5인승의 지프 모양이었습니다. 국산 기술로 만든 4기통 가솔린 엔진에 전진 3단, 후진 1단의 변속기어를 가진 게 특징이었습니다. 완전히 우리 손으로 만든 최초의 국산차였고, 특히 피스톤을 비롯하여 자동차의 핵심 요소인 엔진에 들어가는 부품들을 국산 기술로 만들어냈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1955년 10월에 창경원에서 열린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 출품된 '시발'은 이승만 대통령상을 받으면서 인기가도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1962년까지 2,700여대가 생산되었고, 택시와 승용차의 수요 부족 문제를 해결하면서 한국자동차산업의 개척자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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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
    해방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 개최

    1961년 이전 : 자동차 산업의 태생

    1955년:해방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 개최

    1955년 10월, 해방 10주년을 맞이하여 서울 창경궁에서 산업박람회가 개최되었습니다. 국제차량제작주식회사의 최무성·최혜성·최순성 삼형제는 시발차를 박람회에 출품하였습니다. 이제 완성된 지 2개월 된 순수 국산기술의 자동차였습니다.

    국산자동차가 탄생했다는 점에서 시발차는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여러 언론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그리고 산업박람회에서 최우수 국산품으로 선정되어 이승만 대통령상을 수상했습니다. 덕분에 시발자동차는 많은 인기를 모았고 상승하는 판매량에 힘입어 최 씨 삼형제는 이전의 국제차량제작주식회사라는 회사명을 시발자동차주식회사로 변경하였습니다. 최초의 국산 자동차인 시발차는 이후 국내 자동차 산업 발전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해방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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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
    신진공업사 설립

    1961년 이전 : 자동차 산업의 태생

    1955년:신진공업사 설립

    1955년 2월에 김창원·김제원 형제는 신진공업사를 설립하였습니다. 이는 신진자동차의 전신입니다. 신진공업사는 자동차 부품을 제작하고 정비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였습니다. 그밖에 버스의 재생조립을 맡았으나 실적이 좋지 않았습니다.

    1958년에 신진공업사는 대한자동차공업협회의 도움으로 UNKRA(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UN한국 재건단) 자금 중 20만 달러를 배정받았습니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1960년 5월에 현대식 정비공장 건설을 완료했고, 버스의 재생조립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이 공장이 지금 '대우버스'의 전신입니다.

    신진이 내놓은 25인승 마이크로버스는 1962년 덕수궁에서 열린 산업박람회에서 상공부 장관상을 수상했습니다. 그 실적을 발판삼아 신진공업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재생조립업체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신진공업사 공장
    신진공업사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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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
    국내 최초의 자동차보험회사,
    한국자동차보험주식회사 발족

    1961년 이전 : 자동차 산업의 태생

    1957년:국내 최초의 자동차보험회사, 한국자동차보험주식회사 발족

    한국자동차보험회사
    한국자동차보험회사

    1957년 7월 15일에 한국자동차보험주식회사가 발족되었습니다. 이는 국내 최초의 자동차보험회사였습니다. 자동차가 늘어남에 따라 교통사고가 늘어났지만 교통사고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자동차 보험의 필요성이 대두되던 시기였습니다. 교통부 장관은 이와 같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험사 설립을 지시했습니다.

    초기 자본금은 2억 환이었고 전국 자동차 운수업계가 주축이 되어 자본금의 80%를, 당시 국회의원 정존수 씨가 사장을 맡기로 하며 자본금의 20%를 출자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출자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여 출자금이 제대로 확보되지 않았고, 사고에 대한 보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부침을 겪었습니다.

    결국 이 단체는 1959년 11월에 국회의원 정운갑 씨가 부채를 책임지고 운수업계와 자본금 출자 비용을 50:50으로 부담하기로 결정하며 단체명을 한국교통보험(주)으로 변경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통보험 역시 자본금의 영세, 영업적자의 확대, 부채의 과다 등의 문제로 인하여 1961년 8월 23일 등록이 취소되었습니다.

    1962년 3월,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보험 전업회사인 한국자동차보험공영사는 차주배상 책임보험, 자동차종합보험, 운전자보험을 최초로 개발하였고,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자동차 보험시대를 개막하였습니다. 이 회사의 역사는 현재의 동부화재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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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58
    유류에 대한 주입권제 실시
    및 자동차세 신설

    1961년 이전 : 자동차 산업의 태생

    1957~1958년:유류에 대한 주입권제 실시 및 자동차세 신설

    1957년 12월 1일에 서울시는 각종 차량의 유류에 대한 주입권제를 실시했습니다. 이는 사실상의 배급제였는데, 영업용 버스는 1대당 매월 253갤런, 관용 승용차는 38갤런, 자가용 승용차는 28갤런, 영업용 승용차는 95갤런 씩 유류를 공급하는 제도였습니다.

    이 제도의 시행으로 인해 유류 암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 당시 유류가격은 드럼 당 휘발유 17,000환, 경유 8,500환이었는데, 암시장 가격은 휘발유 약 42,000환, 경유 약 14,000환에 달해 사회적인 문제로 부각되었습니다. 1958년 12월 28일부터는 자동차세를 신설했습니다. 이는 자동차관리법 규정에 따라 자동차 등의 소유자에게 세금이 부과되는 제도였습니다.

    이 제도들은 국민들의 자동차 보유를 억제하고 유류 소비를 줄임과 동시에 유류수입에 의한 외화 절감과 세수확대를 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세금 부과기준을 배기량으로 구분하지 않고 버스, 합승, 택시, 자가용으로만 구분했기에 평균 배기량 축소에 따른 유류 감소를 기대할 수 없었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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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2
    쌍마자동차, 재생품을 사용하여
    베이비 왜건 출시

    1961년 이전 : 자동차 산업의 태생

    1958~1962년:쌍마자동차, 재생품을 사용하여 베이비 왜건 출시

    베이비왜건

    1950년대에 쌍마자동차는 시발 엔진을 개발한 기술자 김영삼 씨를 영입합니다. 차량 제작을 시작한 쌍마자동차는 11인승 승합차를 시작으로 하여 50년대 말에는 '베이비 왜건'이라는 차량을 만들었습니다. 이 차량은 크게 히트하여 60년대 초 서울에선 '베이비 왜건' 붐이 일어났습니다.

    베이비 왜건은 시발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엔진, 변속기, 차축 등 주요 부품은 재생품을 사용하였고, 차체 역시 철판을 두드려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투박한 생김새의 시발 자동차와는 달리 매끄러운 외관이 세단과 비슷한 인상을 주어 호평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에 시발 자동차가 크게 흥행한 뒤 금세 사그라진 것처럼, 1962년 11월 새나라 자동차의 등장으로 고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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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
    도로교통법, 자동차저당법,
    자동차운수사업법 제정

    1961년 이전 : 자동차 산업의 태생

    1961년:도로교통법, 자동차저당법, 자동차운수사업법 제정

    1961년 12월 31일에는 '도로교통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이는 법률 제941호에 의해 도로에서 발생하는 모든 교통상의 위해를 방지하여 교통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보행자나 차량의 통행방법, 운전자의 의무, 도로의 사용, 운전면허, 범칙 행위에 대한 처리 등을 세부적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이 법률은 1962년 1월 20일부터 시행되었습니다.

    도로교통법은, '보행자는 보도 또는 도로의 좌측이나 길 가장자리 구역을 통행해야 한다. 차마는 차도 또는 도로의 우측을 통행해야 한다. 운전자는 도로의 통행에 관한 사항을 지켜야 한다. 운전자는 교통안전교육을 받아야 한다. 운전자는 대인교통사고를 야기한 때에는 사상자의 구호 등 필요한 조치를 하고, 가장 가까운 경찰공무원이나 경찰관서에 지체 없이 사고에 관한 사항을 신고하여야 한다'와 같은 내용을 주요 골자로 하였습니다.

    같은 해인 1961년 12월 2일에는 '자동차저당법'을 제정해 자동차의 저당을 허용하였습니다. 이는 동산 신용 증대를 통한 운수사업의 발전을 도모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또한 12월 30일에는 '자동차운수사업법'이 제정되어 자동차 운수사업에 관한 질서를 확립하고 자동차 운수의 종합적인 발전을 통해 공공복리를 증진토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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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
    새나라, 닛산 시설차관 및
    기술제휴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62년:새나라, 닛산 시설차관 및 기술제휴

    새나라자동차
    새나라자동차

    새나라자동차는 1962년 3월 23일에 '새나라'라는 모델명의 차량을 조립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자동차회사인 닛산과 시설 차관 및 기술제휴 계약을 체결한 결과였습니다. 새나라자동차는 닛산의 1,200cc급 소형자동차 블루버드 P301형을 조립 생산하여 '새나라'라는 이름으로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분조립생산 방식인 SKD(semi-knockdown) 방식으로 생산했다고 하지만 당시 국산화율이 5%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아 완성 조립품 상태인 CBU(Complete Built-Up) 방식에 의해 조립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새나라 택시는 '양장 미인'이라는 이름의 세련된 스타일로 인기를 끌었고, 손으로 철판을 두드려 만들었던 지프형 시발 택시는 이러한 새나라 자동차의 등장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시발자동차는 새나라 자동차의 등장으로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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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
    새나라자동차,
    SKD 조립생산 시작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62년:새나라자동차, SKD 조립생산 시작

    새나라자동차
    새나라자동차 공장

    새나라 자동차는 1962년 1월 29일에 박노정 씨에 의해서 설립되었습니다. 이 회사는 닛산의 1,200cc급 소형자동차인 블루버드 P301형을 '새나라'라는 이름으로 출시했습니다. 이는 SKD방식으로 조립된 승용차였습니다.

    SKD방식이란 Semi Knock Down의 약어입니다. 해체할 수 있는데 까지 해체하여 부품을 수송한 뒤에 목적지에서 조립생산하는 CKD(Complete Knock Down) 방식과는 다르게 어느 정도 조립된 상태의 부품을 수송하여 조립하는 방식을 일컫습니다.

    1962년 11월부터 생산되기 시작한 새나라자동차는 1960년대 제3공화국의 특혜시비로 1963년 5월에 조업을 중단하게 됩니다. 총2,700대가 생산된 새나라는 국산차 중 최단기간 생산된 차량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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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
    기아산업,
    3륜트럭 K-360 출시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62년:기아산업, 3륜트럭 K-360 출시

    1962년 1월에 일본 동양공업(현 마쓰다)와 제휴한 기아산업은 3륜 소형 트럭인 K-360을 출시하였습니다. 이 차량은 화물 운송을 주목적으로 하였고, 배기량 356cc의 공랭식 2기통 엔진을 적용했습니다. 최대 출력은 11마력이었고 최고 시속은 65km였습니다. 그리고 총 300kg의 짐을 운반할 수 있었습니다.

    이 차량은 내부에 스피드미터와 다이나모 경고등, 오일 압력 경고등, 라이트 스위치 레버 등의 운전 장치를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연료탱크 옆에 레벨 게이지를 달아 연료의 잔량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연비도 좋아서 기름이 적게 드는 경제적인 차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장점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당시 국민소득이 너무 낮아 판매가 부진했습니다. 1962년에는 67대, 1963년에는 75대, 1964년에는 23대가 판매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적은 배기량과 11마력 밖에 되지 않는 부족한 힘 때문에 K-360은 독특한 소리를 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차를 '딸딸이'라는 별명으로 불렀습니다. 대중들은 이 차를 매우 친숙하게 여겼고, 거기에 경제적인 차라는 인식이 덧붙어 K-360은 국내 화물차 시장에 붐을 몰고 왔습니다.

    K-360_01
    K-360_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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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
    새나라자동차 설립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62년:새나라자동차 설립

    1962년 1월 경기도 부평에 설립된 ㈜새나라 자동차는 국내 최초의 현대식 승용차 제조공장입니다. 새나라 자동차가 설립되기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던 자동차는 '시발'이었습니다. 택시로 이용되던 이 차량은 수공업 형식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국내 자동차 공업의 발전을 위해선 새로운 자동차 공장의 설립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화학공업진흥을 위한 기반사업으로 자동차공업을 적극 육성하기로 한 정부는 단독으로 일본의 자동차 회사인 닛산과 제휴하려고 했지만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다행이도 닛산 자동차 회장인 가와마타와 사업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재일교포 박노정 씨와 연결된 정부는 새나라 자동차의 설립에 투자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정부의 주재로 한일은행이 70%, 박노정 씨가 30%를 투자하여 자본금 1억 원으로 설립된 ㈜새나라 자동차에는 초대 사장으로 박노정 씨가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블루버드를 모델로 출시한 '새나라'는 많은 인기를 끌었지만, 외환낭비 의혹과 면세 해택 사건에 휘말리게 되어 1963년에 조업을 중단하고야 맙니다. 그래서 '새나라'는 국산차 중 최단명이라는 불명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새나라자동차 공장
    새나라자동차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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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
    자동차 부품수출의 시작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62년:자동차 부품수출의 시작

    자동차부품수출시작
    자동차부품 공장

    1962년에 처음으로 우리나라는 자동차 부품을 수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동차 산업이 시작된 이후 많은 노력 끝에 일궈낸 결과였습니다. 주요 자동차 부품 수출 품목은 피스톤, 피스톤 링, 스프링, 액슬 샤프트 등이었는데, 주로 군납을 통해 경쟁력을 높여왔던 중견업체에서 생산되던 제품이었습니다.

    주요 수출시장은 태국, 베트남 등의 동남아시아 지역이었습니다. 1962년부터 시작된 자동차 부품 수출은 1964년에 약 14만 달러 규모의 수출시장으로 증가했습니다. 1965년에는 전년 실적보다 3.6배 증가하여 5천 달러에 달하는 실적을 거두어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1966년에는 전년 대비 48% 늘어난 74만 7천 달러의 수익을 거두며 1960년대 최고 실적을 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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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
    서울, 국내 택시 영업 방식의
    기틀을 마련한
    택시미터제 도입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62년:서울, 국내 택시 영업 방식의 기틀을 마련한 택시미터제 도입

    지금은 택시에 미터기(자동요금계산기)가 달려 있는 게 당연하지만 옛날에는 택시에 미터기가 없었습니다. 처음 미터기가 달린 택시가 운행된 것은 1962년 4월 17일부터입니다. 그날부터 미터기가 달린 300대의 택시가 서울에 운행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서울의 택시는 2,700여대였고, 그 중 300대의 택시에만 우선적으로 시험운행 되었습니다. 이전까진 요금 계산 때마다 운전사와 손님간의 시비가 잦았는데, 미터기 장착 이후론 그런 문제가 사라졌습니다.

    미터요금 택시의 기본요금은 300환이었습니다. 2km이내는 운행거리와 상관없이 300환을 받았고, 그 이후로 500m가 넘을 때마다 50환씩 추가되는 방식이었습니다. 20분의 대기료 50환이 가산되며 달린 거리, 시간, 영업횟수 등이 자세히 표시되어 국내 택시 영업의 기본 틀이 이때부터 마련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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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
    하동환자동차, 보성자동차
    공업사와 합병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62년:하동환자동차, 보성자동차 공업사와 합병

    하동환 자동차는 1950년대 말부터 규격화된 버스를 조립하여 사업을 크게 확장한 회사입니다. 1962년에 추진된 정부의 자동차 조립공장 정리계획에 따라 잠정 조립 공장으로 선정되어서 안정적으로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보성자동차공업사는 탁연성 사장이 운영하던 자동차 조립 회사였습니다. 하동환 자동차는 같은 사업을 하는 보성자동차공업사와 1962년 12월에 합병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울 영등포구 구로동에 8천여 평의 공장 부지를 확보하여 근대식 공장을 세우고 사명을 '하동환자동차공업(주)'로 변경하였습니다.

    하동환 자동차의 버스 사업은 이후 더욱 확장하고 발전했습니다. 1965년에는 서울시가 좌석버스 운행을 시작하면서 주문량의 90%를 담당하는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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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
    기아산업, 국내최초의
    조립공장 허가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62년:기아산업, 국내최초의 조립공장 허가

    기아산업 시흥공장
    기아산업 시흥공장

    1962년 1월에 우리나라 최초의 3륜 트럭인 K-360을 출시한 기아산업은 정부에 시흥공장의 자동차 제조공장 승인을 신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기아산업은 국내 최초로 자동차 제작공장 허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기아산업의 역사는 1957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수복 후 서울로 올라온 기아산업은 영등포구 시흥에 공장 부지를 마련하고 1957년 5월에 시흥공장을 준공합니다. 그리고 미국 국제 협력처(ICA)의 자금의 받아 서독에서 근대식 파이프 생산시설을 들여오고, 일본에서 1,000톤 프레스를 들여오면서 설비시설을 갖추었습니다.

    1959년 5월에 도요고교와 기술제휴를 맺은 기아산업은 1961년에 자전거에 원동기를 붙여 오토바이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962년에 3륜 트럭인 K-360을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기아산업은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 제작공장 건설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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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
    자동차 공업 보호법과 시행령 발표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62년:자동차 공업 보호법과 시행령 발표

    1962년 5월에는 자동차공업보호법과 시행령이 발표되었습니다. 앞서 '자동차 공업 5개년 계획'이 추진되면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한 것이었습니다. 자동차 조립업체에 대한 허가 규정을 두어 난립을 방지하고 완성차 수입을 금지하여 허가 업체에 대한 보호조치를 취하는 것이 이 법의 목적이었습니다. 또한 생산 초기에는 완성차 및 부품에 대해 일정기간 관세를 면제해 주고 자동차세와 취득세도 감면해주기로 했습니다. 자동차 산업이 날개를 펼 수 있도록 정부 차원에서 다방면의 혜택을 지원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경기도 부평에는 현대식 승용차 제조공장인 새나라 자동차공업(주)이 설립되었습니다.

    자동차 공업 보호법은 자동차 공업을 보호하여 성장을 도모하려는 목적이었지만 이를 악용한 의혹들이 등장해 당초의 계획을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경제를 성장시킬 동력원을 찾아 이를 지원하려는 법적 조치를 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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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1965
    자동차공업 5개년 계획 추진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62~1965년:자동차공업 5개년 계획 추진

    1962년 4월에 정부는 자동차공업 5개년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경제를 성장시키기 위해 자동차 공업을 육성하기로 한 것입니다. 증차를 억제하는 정책인 1957년 5·8 조치를 완화하는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자동차 조립공장 건설을 5개년 경제계획에 의한 사업의 일환으로, 연간 3천대 규모의 소형자동차 조립공장 1개와 대·중형자동차 조립공장 및 대·중형차용 디젤엔진공장을 1개씩 건설한다'는 것이 자동차공업 5개년 계획의 주요 내용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상공부는 버스 연산 1,000대, 트럭 2,000대의 생산능력을 마련하는데 소요자금으로 외자 150만 달러, 내자 8,000만원을 책정했습니다.

    계획에 따라 민간기업체를 선정하여 공장 건설시 소요되는 외자 차관 도입과 내자 부담을 전담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국내 자동차 부품업계의 활성화를 위해 기존 자동차부품공장에서 생산 가능한 것은 최대한 이용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엔진은 조선기계제작소에서 생산하는 디젤엔진을 사용하기로 정했습니다. 시설비 과다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생산이 어려운 부품은 차관 상대국에서 CKD(Complete Knock Down) 방식으로 도입하기로 했습니다. 최종 건설기간은 3년으로 설정하고 초년도에는 부품을 도입하여 시작하되 5년 후 95%까지 국산화를 달성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선정된 업체 중 소형차공장은 새나라 자동차, 대·중형차공장은 시발자동차, 디젤엔진공장은 조선기계제작소였습니다. 또한 군용 자동차공장 건설계획도 함께 추진되었습니다. 이 계획에는 아시아자동차가 선정되었습니다. 기존 8개 중소 조립공장은 자동차공업 5개년계획에 따라 완성차가 생산될 때까지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조립을 지속하게 조치하였습니다. 하지만 선정에서 제외된 100여개의 공장이 문제였습니다. 결국 상공부는 '조립업체를 각 시도에서 1개씩 선정한다'는 것으로 기준을 변경했습니다. 1965년에는 24개 업체가 추가되었고, 폐업한 시발자동차를 제외하고 총 31개의 공장이 선정되며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는 자동차 국산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비록 초기의 계획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지만 자동차 국산화에 대한 중요성을 일찍이 인지하였고 그것을 위해 고민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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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
    기아산업,
    3륜트럭 T-1500 출시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63년:기아산업, 3륜트럭 T-1500 출시

    1963년에 기아산업은 3륜 트럭 T-1500을 생산하여 3월에 출시하였습니다. 이 차량은 기존에 생산되던 K-360의 성능을 업그레이드시킨 제품이었습니다. 배기량 1,484cc에 수냉식 4기통 도요고교 엔진을 얹었고, 중량 1,480kg에 적재량 2톤의 사양을 갖췄습니다. 길이는 4.3m, 짐받이 길이는 2.38m, 가격은 12만원이었습니다.

    이 모델은 K-360과 더불어 당시 일본에서 크게 히트했습니다. 하지만 국내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고 산업정책이 새나라를 중심으로 맞춰져 있어서 외환사정으로 인한 생산 부진을 겪어야 했습니다. 결국 기아의 3륜 트럭은 1963년에 191대 판매를 끝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T-1500_01
    T-1500_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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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
    자동차 제조업체에 대한
    일원화 방안 마련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63년:자동차 제조업체에 대한 일원화 방안 마련

    1963년 말에 정부는 자동차 제도업체에 대한 일원화 방안을 마련합니다. 이는 당시 자동차공업보호법과 자동차공업5개년계획에 의해 추진되던 사업들이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선 새나라 자동차가 외환사정과 면세혜택에 대한 의혹 등으로 인해 조업이 중단되고 공장건설이 지연되었습니다. 시발자동차 또한 외자도입 문제로 공장건설 추진이 중단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타계하기 위한 방책으로 마련된 것이 일원화 방안이었습니다.

    일원화 방안은 디젤엔진공장 건설부문에서 전담 업체로 선정된 한국기계공업(주)을 중심으로 새나라자동차, 시발자동차 등 기본 8개의 잠정 조립공장을 포함해 군납용 자동차공장으로 조건부 허가된 아시아자동차까지 통합하여 일원화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소형에서 중·대형에 이르는 전 차량에 대해 생산표준을 제시하여 차량 공정에 일관성 부여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리하여 자동차 생산 비용을 절감하고 국산화율을 높이려는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방안 또한 기존의 잠정 조립공장에서 불거진 문제들과 통합 절차상의 문제로 인해 폐기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제시된 것이 자동차 제조업체에 대한 계열화 방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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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
    자동차 손해배상 보장법 제정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63년:자동차 손해배상 보장법 제정

    1963년 4월 4일에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이 제정됩니다. 이는 자동차 손해배상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고 사고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1조 목적에서는 자동차의 운행으로 사람이 사망한 경우나 부상한 경우에 있어 손해배상을 보장하는 제도를 확립함으로써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①자동차를 운행하는 자는 자동차책임보험을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고, ②자동차 운행자는 자동차사고를 낸 때에는 손해배상책임을 져야하며, ③자동차사고 피해자는 자동차책임보험사업자에게 책임보험금을 직접 청구할 수 있고, ④무보험 또는 뺑소니차에 사고를 당한 피해자는 정부에 책임보험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자동차 사고의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최소한의 보장이 이루어지도록 법을 제정한 것입니다.

    제1조에 명시되어 있듯이 이 법을 제정한 이유는 자동차 사고 피해자에게 최소한의 보장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어떤 경우에서든지 최저 생활이 유지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높은 보험요율과 공탁 제도의 높은 금액 때문에 운수업체들이 강하게 반발하였습니다. 결국 보장제도의 실시는 전면 보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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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4
    신진자동차,
    새나라 자동차 인수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64년:신진자동차, 새나라 자동차 인수

    부평 새나라자동차 공장

    새나라 자동차는 외환낭비 의혹과 면세 혜택 사건으로 조업이 중단되었습니다. 그리고 1964년 8월 20일, 경제기획원에서 열린 경제장관회의 결과 신진자동차에 인수조치 되었습니다.

    새나라자동차는 '블루버드'를 출시하여 많은 인기를 끌었지만, 이 차량을 통해 부당이익을 취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면세혜택, 외환낭비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블루버드는 1962년 4월부터 두 차례나 도입한 완제품 차량입니다. 새나라 자동차는 판매가가 13만 원인 블루버드를 25만 원에 판매하여 25억 원의 부당이익을 취했습니다.

    그 이후로 새나라자동차는 유류 사정을 악화시키고 교통행정에 혼란을 가져왔다는 점, 국내 자동차의 공업을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외국차의 도입과 증차를 억제하던 정부가 재일교포 박노정 씨에게 설립허가를 내어 주었다는 점, 외화고갈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227만 달러를 지원하고 면세 혜택까지 주었다는 점 등 부당이익을 얻었다는 사실에 대한 의혹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동차 보호법'에 의해 내국세, 수입관세 등을 전부 면제받으면서도 규정 가격보다 차량을 비싸게 팔아 폭리를 취했다는 혐의를 받아 결국 신진자동차에 인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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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4
    신진자동차,
    신성호 전시와 신문광고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64년:신진자동차, 신성호 전시와 신문광고

    1963년 11월에 신진자동차는 '새나라'를 본떠 '신성호'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964년 4월에 서울시청 광장에 완제품 차량과 분해 부품을 전시했습니다. 이는 신성호가 순수 국산차임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성호 전시회를 홍보하기 위해서 신진자동차는 신문광고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시발자동차와 새나라자동차에 이은 세 번째 자동차 신문광고였습니다. 1963년 4월 말에 동아일보에는 '국산 승용자동차 전시안내'라는 제호 아래 전시 광고가 실렸습니다.

    '시발'은 엔진까지 국산화한 차량이었지만 '신성호'는 그보다 못한 56.4%라는 다소 낮은 국산화율을 보였고, 55만 5천 원이라는 비싼 출고가가 단점이었습니다. 수요가 많진 않았지만 이 차량은 '시발'에 이은 제2호 국산차로서 신진자동차가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자동차회사가 되는 데 기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단으로선 최초의 모델이기도 했습니다.

    신진자동차 신성호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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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
    신진자동차공업주식회사,
    코로나 출시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66년:신진자동차공업주식회사, 코로나 출시

    코로나

    신진자동차는 여러 일본브랜드와 접촉했습니다. 당시 일본에는 한국 진출을 노리는 업체가 제법 있었는데, 신진은 그 중 토요타와 계약하기로 했습니다. 다른 업체에 비해서 수입 및 차관 조건이 유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진자동차는 토요타로부터 1.5L 코로나를 들여왔고, 1966년 1월에 신진자동차공업회사로 새롭게 발족한 회사는 코로나를 출시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의 특징은 운전석과 승객석이 확실하게 구분되는 정통세단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4기동 1,490cc의 82마력 엔진을 탑재했고, 전진 3단-후진 1단의 수동변속기를 장착했습니다. 그리고 최고 시속 100km이상을 낼 수 있었습니다.

    높은 사양만큼이나 고가로 책정된 코로나의 가격은 80만 원 대였습니다. 그럼에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완제품을 조립해서 생산했던 새나라자동차와 달리 신진자동차는 타이어, 배터리, 유리 등의 21%를 국산화했습니다.

    하지만 토요타가 한국시장에서 철수하면서 신진 코로나는 1966년부터 1972년까지 총 4만여 대를 생산하고 단종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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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
    하동환자동차,
    한국최초 자동차 수출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66년:하동환자동차, 한국최초 자동차 수출

    하동환 자동차 수출

    1966년 가을, 하동환 자동차는 리어엔진 버스 1대를 브르네오 섬의 작은 석유 부유국인 브루나이로 수출하였습니다. 이것은 한국 최초의 자동차 수출이었습니다. 이 버스는 일본 닛산자동차에서 엔진 등 구동장치가 달린 섀시를 들여오고, 차체와 의자 등의 내외장품은 직접 설계하여 만든 버스였습니다. 이 버스가 브르네오로 출발하던 날에는 당시 교통부장관이던 안경모 씨가 직접 축하테이프를 끊어 한국 자동차 수출 1호를 축하하였습니다.

    그에 이어 1967년 월남전 당시 우리 국군이 파병됐던 베트남으로 대형 버스 20대를 수출하며 두 번째 수출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수송 수단이 미흡해서 버스를 직접 부산에서 서울까지 운전해 온 뒤에 완성 버스를 만들어 다시 부산항을 통해 수출하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차량 수출에 대한 기대가 컸기에 수출용 자동차를 제작하는 동안 박정희 대통령,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 박충훈 상공부 장관 등 정부의 고위급 인사들이 공장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완성된 수출버스는 서울 시청 앞에 전시되었고, 당시 서울 시장이던 김현옥 시장이 직접 시승한 뒤 경찰차의 호위를 받으며 부산항으로 이동할 만큼 대형 버스 수출은 매우 주목받는 사업이었습니다. 수출버스가 베트남 사이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당시 베트남의 수상이던 구엔 카오 키 수상이 직접 환영식장에 나와 축하하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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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
    아시아자동차,
    자동차 제조업체로 진입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66년:아시아자동차, 자동차 제조업체로 진입

    1966년 12월 3일에 아시아자동차는 자동차 제조업체로 진입하였습니다. 이때는 일원화계획이 시행되던 시기였지만 1966년 12월에 아시아자동차에 대한 외자도입인가가 외자도입심의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아시아자동차는 원래 군용차량 전담 생산 공장으로 추진되었습니다. 외자도입사업을 통해 외자등록 제2호로 경제기획원에 등록되어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 회사는 소형자동차 공장이나 대·중형자동차 공장과는 별도로 운영되었습니다.

    외자도입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아시아자동차는 민수용 차량 공장으로 전환을 꾀했습니다. 하지만 1964년 8월 '자동차공업 종합계획'에 따른 일원화 계획 추진으로 취소 처분되고 맙니다. 나주비료공장에서 손을 떼고 아시아자동차 사업계획을 추진한 이문환 씨가 상공부에 민수용 자동차공장의 허가를 요청했지만 무산된 것입니다. 1965년 7월에 개인자본 1,000만원과 서독 아이젠버그(Eisenberg)의 직접투자액 300만 달러로 직접 회사를 설립한 이문환 씨는 그렇게 자동차 제조업체로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1966년 12월 16일에 아시아 자동차는 연산 8,000대 규모의 광주공장 건설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1967년 10월에 차관선인 르노그룹이 의사를 변경하였기에 11월에는 차관선을 프랑스 피아트(FFSA)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두 회사는 전과 같은 내용의 계약을 맺고 1968년 2월에 이에 대한 정부의 인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세아자동차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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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7
    기아산업,
    기아마스타 T-2000 출시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67년:기아산업, 기아마스타 T-2000 출시

    기아산업은 1967년에 K-360과 T-1500의 판매 부진으로 인한 실패를 바탕으로 도요고교의 여러 차량 모델을 다각도로 분석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중형 3륜차인 T-2000을 출시했습니다.

    이 차량의 엔진배기량은 1,985cc이고 최대 적재량은 2톤입니다. 도요고교에서 CKD조립기술을 도입해서 초기 국산화율이 32%에 이르는 제품입니다. 기아산업은 이 모델을 기아마스타 T-2000으로 출시해서 크게 성공합니다.

    그리하여 기아는 일본에서 기계설비를 확충하는 동시에 6인승 겸용 트럭, 덤프 트럭, 특수차 등 T-2000의 변형모델을 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1969년 8월에는 기아마스타 T-600을 출시하여 이후 출시된 4륜차 생산에 큰 힘을 얻었습니다.

    T-2000
    T-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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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7
    신진자동차, 토요타의
    퍼블리카 조립생산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67년:신진자동차, 토요타의 퍼블리카 조립생산

    1967년 5월에 신진자동차는 토요타에서 퍼블리카를 들여와 조립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는 자가 운전자가 생길 무렵이었습니다. 퍼블리카는 양쪽 전조등이 툭 튀어나온 모양이라 '왕눈이차'라고도 불렸고, 빨간색 차량이 많아 '빨간차'라고도 불렸습니다. 우천 시를 대비해 지붕 테두리에 빗물받이 통로가 있다는 점이 특이했고, 공랭식 엔진을 사용해 운행 중 자주 멈춰서 엔진을 식혀야 한다는 단점도 있었습니다.

    신진 퍼블리카는 당시 고급차였던 크라운의 절반 남짓한 가격 밖에 되지 않아 국내 자동차의 대중화에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도로 사정이 여의치 않고 국민 경제력이 낮았던 시기라서 그리 많이 판매되진 않았습니다. 신진 퍼블리카는 2008년 8월 12일에 등록문화재 제401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국내에 3대가 남아 있습니다.

    퍼블리카
    퍼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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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7
    현대자동차 설립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67년:현대자동차 설립

    현대자동차'는 1967년 12월 29일에 정주영 회장에 의해 현대모타㈜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현대자동차'라는 이름으로 사명을 변경합니다.

    정주영 회장은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정비공장을 인수해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소규모로 트럭 운송 사업을 진행하는 등 다방면에서 사업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일제는 부족한 물자와 인력을 징발하는 강경책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군소공장을 강제 합병하는 기업 정비령이 떨어지면서 현대자동차는 일진공작소에 사실상 흡수·통합되는 불운을 안게 됩니다.

    광복 후 1946년 4월에 정주영 회장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1947년에 '현대토건사'라는 건설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1950년에 두 회사를 합병하여 현대선설㈜을 설립하면서 현대자동차의 기반을 쌓았습니다.

    1967년에 2차 5개년 계획이 발표되면서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고속도로 건설계획의 추진, 자동차 국산화의 필요성 대두 등 자동차산업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가능해졌습니다. 이에 정주영 회장은 자동차 산업 참여를 선언했습니다.

    1967년에 발표된 자동차 제조공장 허가 기준에는 '선진 외국과 기술 제휴를 한 업체'라는 자격 요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현대는 1968년 5월까지 포드와의 제휴 아래 자동차 제조공장 시설기준을 갖춘다는 조건으로 자동차제조를 허가받았습니다. 이에 총 자본금 1억 원인 '현대자동차'가 설립되었고 울산에 부지를 마련하여 공장 건설에 들어갔습니다.

    1968년 1월에 정부가 자동차 제조업체 삼원화 방침을 발표하면서 현대자동차는 한국 자동차 시장에 신생 업체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1968년 2월 23일 포드의 자회사인 영국포드와 기술도입계약을 체결한 현대자동차는 6월 10일 정부의 인가를 받음으로써 자동차산업에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현대자동차 설립
    현대자동차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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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7
    자동차 제조업체에 대한
    삼원화 방안 발표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67년:자동차 제조업체에 대한 삼원화 방안 발표

    1967년 1월 8일에 자동차 제조업체에 대한 삼원화 방침이 발표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전에 일원화, 계열화 방안을 통해서 추진하던 자동차 공업 국산화 정책이 제대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존 일원화 업체로 선정된 신진은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국산화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 하고 문제점을 정부 장관 등 상부를 통해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아시아와 현대자동차의 자동차시장에 대한 신규진입을 허가하여 독점으로 인한 성장 부진을 극복하려 한 것입니다. 기존 허가된 신진 이외에 아시아, 현대를 자동차 제조업체를 추가하여 삼원화 시키고, 더 이상의 공장 건설을 허가하지 않는 것이 삼원화 방안의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시아와 현대도 초년도 생산 시 신진의 초년도 국산화 비율이었던 21%를 유지하겠다는 내용을 추가하여 전보다 더욱 균형 잡히고 공정한 방안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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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
    현대자동차, 포드 코티나
    조립생산 시작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68년:현대자동차, 포드 코티나 조립생산 시작

    코티나
    코티나

    현대자동차공업주식회사는 영국 포드와 제휴하여 2세대 코티나를 1968년 11월부터 울산 공장에서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요부품은 모두 영국을 통해 들여왔지만 배터리, 시트, 매트, 일부 범퍼 등의 간단한 부품은 직접 생산해서 조립했습니다. 그래서 이 차량은 국산화율 21%를 달성했습니다.

    코티나는 1,600cc 엔진을 장착한 차량으로 실내가 넓어 6인승이 가능했습니다. 4단 수동 변속 기어가 달렸고, 최고 출력 75마력에 최고 시속 160km까지 주행 가능했습니다. 차체가 낮고 휠베이스가 넓어 고속 주행 시에도 안정감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노면상태가 좋지 않은 국내 도로와는 맞지 않았고 고장이 잦아 사용자의 불편이 잇따랐습니다. 그래서 '섰다 하면 코티나', '골치나' 등의 악명을 얻었습니다. 택시업계를 중심으로 반납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당시 허허벌판이었던 울산을 개발하여 생산 공장을 건설하고 자동차를 생산해낸 것을 사람들은 '보리밭에서 코티나가 튀어나왔다'며 기적이라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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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
    서울전차 철거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68년:서울전차 철거

    1899년부터 70년간 서울의 대중교통 수단으로 이용되던 서울 전차는 1968년 12월에 철거되었습니다.
    자동차와 전철의 증가에 밀려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서울전차는 하루 190대까지 운행되었습니다. 50만 서울 시민의 발이 되었던 전차의 철거로 인해 서울의 명물로 불리던 역사적인 유물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모습은 다르지만 서울전차는 지하철로 대체되어 여전히 시민들의 교통수단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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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
    경인 고속도로 개통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68년:경인 고속도로 개통

    1968년 12월 21일, 경부 고속도로의 전 구간 중 서울-수원 간과 경인 고속도로가 동시에 개통식을 열었습니다. 서울-인천 구간은 총 29.6km였지만 서울-가좌동까지의 23.4km만이 우선 개통되었고, 12월 31일에 전 구간 개통되었습니다.

    경인 고속도로 건설 당시의 설계 기준은 노폭 20.4m, 최소곡선반경 300~600m이었고 시속은 80~120km로 제한하였습니다. 건설비는 공사비 23억 3300만 원과 용지보상비 5억 4900만 원, 부대비 2억 6800만 원 등을 포함하여 총 31억 500만원으로 책정되었습니다. 연인원 60만 5000명이 동원된 대사업이었습니다.

    초기에는 4차로로 건설되었지만 이후 교통수요가 폭증함에 따라 1992년 5월 14일에 경인고속도로의 종점인 신월-부평 구간을 왕복 8차로로 확장하였습니다. 1993년 9월에는 서인천-부평 구간을 왕복 8차로로 확장 개통하였습니다.

    경인 고속도로의 개통은 국내 최장 최대 규모의 경부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이어졌습니다. 뒤따라 영동, 호남, 남해, 88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전국이 1일 생활권으로 묶이게 되었습니다. 고속도로의 개통은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을 빠르게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현대자동차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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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9
    현대자동차 포드 20M
    조립생산 시작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69년:현대자동차 포드 20M 조립생산 시작

    20M
    20M

    1969년 5월에 현대자동차는 포드의 자회사 중 독일 포드의 동명 모델인 포드 20M을 한국에서 조립 생산하여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포드 20M의 'M'은 'Masterpiece(명작)'의 앞머리 글자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포드 20의 배기량은 2,000cc였고 출력은 106마력이었습니다. 최고속도는 160km/h로 빠른 속도를 자랑했습니다. 고성능과 호화로운 실내장식의 이 차량은 고급 대형차로 분류되었습니다. 현대자동차의 2번째 모델인 이 차량은 1973년 1월까지 총 2,406대가 생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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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9
    자동차공업육성 기본계획
    (국산화 3개년 계획) 발표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69년:자동차공업육성 기본계획(국산화 3개년 계획) 발표

    1968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은 김정렴 상공부 장관으로부터 상공행정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불편함을 표시했습니다. 자동차의 국산화가 늦어지고 있던 까닭이었습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국산화 비율을 높이기 위한 보다 엄격한 조치를 취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1969년 12월 자동차공업육성 기본계획(국산화 3개년계획)이 발표되었습니다. 이 계획은 이전까지 다품종을 소량으로 생산하던 체제에서 탈피하여 전문화된 몇 가지의 차종을 기본형으로 양산하도록 한 것입니다. 1969년 말에 38%에 불과하던 국산화율을 3년 동안 100%까지 올리겠다는 게 목표였습니다. 조립공장과 부품공장을 분리하고, 부품공업을 품목별로 일원화하여 수평계열화를 추진하는 것이 주요 골자였습니다.

    이 계획의 추진목표를 단계별로 나눠보면, 1단계(1967~1969)에는 자동차 조립공장의 건설을 완료하고 관련 산업을 육성합니다. 2단계(1970~1973)에는 부품공장을 건설하고 부품을 양산화하며 엔진 주물공장과 자체 프레스공장을 건설하여 중추부품 공장을 일원화합니다. 3단계 (1973~1976)에는 국산화 목표를 달성하고, 완전 국산화된 표준 자동차의 제작을 통해 생산차형의 일원화, 양산 체제의 확립, 부품 단위의 국산화 완성, 자동차 가격을 국제수준으로 인화하는 등의 목표를 설정했습니다.

    국산화 3개년 계획에 따라 국내 자동차공업 시장은 국산화된 부품을 의무적으로 구매하도록 규정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국내 부품산업이 육성되도록 하는 효과를 낳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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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
    아시아자동차, FIAT로부터
    CKD 도입 FIAT124 생산판매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70년:아시아자동차, FIAT로부터 CKD 도입 FIAT124 생산판매

    피아트124
    피아트124

    1970년 3월에 아시아자동차는 피아트로부터 차량을 도입했습니다. CKD(Complete Knock Down) 방식으로 도입한 이 차량은 1,200cc급의 소형차인 피아트 124였습니다. CKD란 할 수 있는 만큼 해체한 제품을 목적지에서 재조립하는 것을 일컫습니다.

    피아트 124는 판매 첫해 1,737대가 생산되었습니다. 그러나 국산화 비율은 30%에 그쳤습니다. 그렇지만 자동차 제조업체 삼원화 방침에서 초년도 국산화 비율은 21%로 규정되어 있었기에, 30%라는 수치는 결코 낮다고 볼 수 없습니다.

    피아트 124는 구소련에서도 큰 인기를 얻은 유명 모델입니다. 65마력에 배기량 1,200cc와 1,300cc의 두 모델로 생산되었습니다. 외형에 비해 실내공간이 넓으며,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성능이 좋아서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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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
    자동차 보유대수 10만 대 돌파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70년:자동차 보유대수 10만 대 돌파

    연도별 자동차보유대수 10만 대 돌파

    1966년부터 1970년 사이 자동차 보유대수는 5년 동안 연평균 25.3%의 증가율을 나타내며 12만 8,298대를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보다 몇 년 전인 1960년대 초 자동차 보유대수 증가량은 연평균 3,000대에도 미치지 못하는 낮은 수치였습니다. 하지만 1965년 총 41,511대에 불과하던 자동차 보유대수는 1966년을 기점으로 빠르게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나라 자동차가 조업을 중단한 이후로 자동차 공급이 줄었지만 신진이 코로나를 조립하기 시작하면서 자동차의 보급에 속도가 붙었습니다. 그리고 경제계획의 성공적인 추진으로 국내 경제규모가 서서히 활성화되어 물동량의 운송이 늘었고, 운송업체 수와 자동차 면허대수가 급속하게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1968년과 1969년의 증가율은 35% 안팎에 달하는 높은 수치를 보입니다. 이는 위와 같이 여러 가지 긍정적인 조건들이 부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 자동차 보유대수는 10만 대를 돌파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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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
    경부 고속도로 개통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70년:경부 고속도로 개통

    1970년 7월 6일 경부 고속도로가 개통되었습니다. 왕복 4차로, 428km의 고로속도가 개통되면서 한국은 전국 1일 생활권으로 묶이게 되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는 총 공사비 429억 7,300만원 투자, 연 동력인원 892만 8,000명, 투입장비 연 165만대를 기록했습니다. 고속도로 공사 중에 사망한 산업전사도 77명에 이를 정도로 대사업이었습니다. 총 공사 기간은 2년 5개월이었는데 이는 세계 고속도로 건설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1km 건설 당 단가도 1억 원에 불가해, 당시 일본 고속도로 건설비가 1km당 8억 원에 달했던 것을 감안하면 8분의 1밖에 안 되는 적은 비용을 지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기반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놀라운 기록이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는 국내 최장·최대 규모의 고속도로였고, 이를 선두로 영동, 호남, 남해, 88고속도로가 연이어 개통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산업이 활성화되고 신도시가 개발되어 주거가 분산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통 편의성이 증가하여 관광자원 개발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경제 재건운동에 따라 물동량이 급증하고 자기 차를 운용하는 마이카 시대가 시작되어 자동차산업이 빠르게 발전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경부고속도로 개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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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
    외국산 고속버스의 대거 등장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70년:외국산 고속버스의 대거 등장

    1970년에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한 이후로 외국산 고속버스가 대거 등장하였습니다. 고속버스의 등장은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고속버스 안내양이 큰 인기를 끌어 여고생들이 전문학원으로 몰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각 도마다 고속버스 터미널이 생겨 손님맞이에 열을 올렸습니다.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나서 우리나라에는 13개의 고속버스 회사가 설립되었습니다. 이들이 운행하던 고속버스의 대부분은 외국산이었습니다. 미국제 반 이층버스인 그레이하운드, 독일 벤츠, 일본 히노 등 국적이 다양했습니다. 특히 미국제인 그레이하운드는 차량 내부에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었고, 버스 밑 부분의 화물칸이 컸습니다. 이러한 장점 때문에 관계 당국은 그레이하운드 회사에만 유료로 탁송할 수 있는 특혜를 주었고, 이는 고속버스 업계의 반발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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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
    자동차 엔진공장
    건설 추진계획 발표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70년:자동차 엔진공장 건설 추진계획 발표

    1970년 2월에 정부는 '자동차 엔진공장 건설 추진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이 계획의 내용은 첫째로 엔진 주물공장의 규모를 월 2,000톤으로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국내 자동차회사에 엔진을 공급하고 남은 물량은 수출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셋째로 1971년부터 자사에서 사용하는 엔진과 타사에 공급되는 엔진이 같은 가격으로 공급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업 계획서를 '자동차 국산화 촉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심사토록 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시아, 신진, 현대 자동차 3사는 사업계획서를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시아 자동차는 피아트 124를 출시한 뒤 자금 부족으로 사업을 포기했기에, 신진자동차와 현대자동차가 경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971년 4월 22일, 신진과 합작하던 일본의 토요타사는 중국의 주4원칙을 수락하고 한국에 대한 직접투자는 하지 않겠다고 발표, 국내시장에서 철수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신진은 결국 사업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현대와 포드 또한 수출시장과 사업영역 문제, 당사간의 의견 충돌 등의 문제가 발생해 1973년 1월 26일, 정부에 의해 합작계약 인가가 취소되었습니다.

    이렇게 국내 주력 자동차 업체들이 하나둘씩 손을 떼게 되면서 '자동차 엔진공장 건설 추진계획'은 이대로 무산되는 듯싶었습니다. 그러나 1972년 3월에 신진과 GM이 50:50의 비율로 합작하여 자동차 및 엔진공장을 설립하기로 한 사업이 인가되어 비로소 GM코리아가 엔진공장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GM코리아는 1,700cc및 1,900cc급 두 가지 엔진을 생산한다는 계획으로 1972년 6월부터 내자 35억과 외자 30억 원으로 부평에 엔진공장 건설에 착수하여 1974년 5월에 완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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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2
    GM코리아 설립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72년:GM코리아 설립

    1972년 6월 7일에 신진자동차와 GM사가 각각 2,400만 달러씩 투자하여 만든 GM코리아가 설립되었습니다. 원래 신진자동차와 제휴했던 곳은 토요타자동차였지만, 중국의 '주4원칙'이 발표되고 우리나라에서 철수하면서 기존 토요타 제품은 생산이 중단되었습니다. 중국의 주4원칙이란 1970년 4월에 중국 수상 주은래가 방중한 일본 측의 우호무역대표단과의 각서무역회담 후에 밝힌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 중에는 대만이나 한국과 거래하는 메이커와는 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토요타의 철수로 인하여 신진자동차는 토요타와 협력하여 추진해 왔던 엔진공장 건설계획도 무산시켜야만 했습니다.

    GM은 그동안 계속 국내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노력하던 회사였습니다. 신진은 재빠르게 GM과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GM은 1970년 이후로 계속 국내시장 진출을 모색해 왔습니다. 이는 미국 자동차업계에 위협이 되는 일본과 서독을 견제하고 1971년 이후 실시될 일본의 자본자유화를 노리고 일본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한국은 동남아 및 중국진출을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활용하기에 좋은 시장이었습니다.

    당시 GM은 해외 진출 시 50% 이상의 자본제휴를 원칙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국내에 진출할 때 GM은 자사 원칙의 최소수준인 50%의 자본참여로 진출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971년 11월에는 신진자동차와 GM이 합작원칙에 합의하고 GM의 에스터스 수석부사장이 청와대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사 간의 합작투자를 통해 회사를 설립하고 GM은 한국 자동차산업을 위해 시설 및 기술을 지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GM코리아 설립
    GM코리아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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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
    기아자동차, 소하리 공장 준공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73년:기아자동차, 소하리 공장 준공

    1973년 8월에 기아자동차는 소하리 공장을 준공합니다. 이 공장의 특징은 국내 최초의 종합 자동차 공장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일괄 생산 체제로 이루어져 있었고 18만 평의 넓은 면적에 연간 생산능력이 35만 대나 되었습니다. 기아자동차는 자전거 전문업체로 시작해서 2륜 오토바이, 3륜 자동차 등을 거치며 자동차 사업의 밑거름을 다졌습니다. 소하리 공장의 준공으로 인하여 기아자동차는 본격적으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기아자동차 는 바로 이 소하리 공장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기아자동차의 역사는 계속된 발전을 거듭해, 2004년에는 자동차 500만 대 생산이라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기아자동차의 소하리 공장은 광명시의 산업과 경제를 책임지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광명시 소하동 일대에 기아로, 기아대교, 기아천과 같이 기아자동차와 관련된 지명들이 명명되어 있습니다. 기아자동차는 단순히 자동차사업을 일구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 내 소외계층을 위한 봉사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소년·소녀 가장 돕기, 독거노인들과 노숙자를 위한 봉사 활동, 장애인 시설 확충 등의 사업을 통해 기아자동차는 단순한 자동차회사를 넘어서 사회와 교류하는 바람직한 기업으로서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아자동차 소하리공장
    기아자동차 소하리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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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
    현대, 미쓰비시 기술협약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73년:현대, 미쓰비시 기술협약

    1973년 9월에 현대자동차와 미쓰비시는 기술협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때 들여온 미쓰비시의 기술은 현대자동차가 훗날 우리나라 굴지의 자동차 기업으로 성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현대자동차는 영국 포드사와 합작회사 설립을 추진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1973년 1월에 정부의 인가가 취소되어 합작회사 설립이 무산되었습니다. 그리고 GM이 국내에 들어오고 기아가 일관공정 자동차 공장을 건설하면서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 현대자동차는 회사의 전략방향을 고유모델 개발로 선회하였습니다. 마침 일본의 자동차 시장에서 입지를 다지기 위해 자금이 필요하던 미쓰비시는 현대에 기술을 전수하는 조건으로 기술협약을 체결하였고, 현대는 이를 통해 고유 모델을 개발할 기술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영국 퍼킨스, 이탈디자인과 협력하여 현대자동차는 최초의 고유 모델인 포니를 출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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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
    기아산업, 국내에서
    국산 가솔린 엔진 1호 생산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73년:기아산업, 국내에서 국산 가솔린 엔진 1호 생산

    가솔린 엔진 공장
    기아마스터 픽업

    1965년에 기아산업은 자동차 엔진의 국산화 계획을 작성하였습니다. 이는 일본 자동차 업계 연수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기아산업은 가솔린 엔진 개발계획과 가솔린 엔진공장의 건설계획을 추진해서 1965년 7월에 경제기획원으로부터 최초의 가솔린 엔진공장 건설 허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기아산업은 1973년 6월에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에 종합자동차공장을 완공하여 완성차 메이커로서 첫걸음을 떼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에는 국내 최초로 국산 엔진 1호인 가솔린 엔진을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기아산업은 마쓰다 패밀리아 픽업 바디에 가솔린 엔진을 장착해서 B-1000을 출시했고, 이어 엔진, 구동축, 클러치 등의 자동차 부품을 직접 생산하여 국산화율 65%를 달성한 국산 차 브리사를 출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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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
    장기 자동차공업 진흥계획 발표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73년:장기 자동차공업 진흥계획 발표

    1973년 1월 12일에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공업정책을 선언합니다. 18일에는 자동차공업 육성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이 정책은 이전 발표했던 자동차공업육성 기본계획(국산화 3개년 계획)과 이어진 것으로 1980년 초까지 50만대의 완성차를 생산하고, 1억 5천만 달러의 수출을 목표로 하는 장기 자동차공업 진흥계획의 일부였습니다.

    1970년대 초까지 국내 자동차산업에 대한 정부 방침은 국산화율을 높이는 데 중심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1973년 수립되어 추진되기 시작한 장기 자동차 공업 진흥계획은 앞선 것과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었습니다. 비록 부품국산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국내 고유의 소형차량을 개발하고 자동차 산업을 수출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자동차 산업은 문제점이 많았습니다. 산업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소득 수준 또한 낮아 기술력이 저급했습니다. 국내 자동차 시장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고 내자, 외자 투자 자본 또한 적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선 뭔가 근본적이고 획기적인 대책이 필요했고, 그것이 1973년에 발표된 장기 자동차공업 진흥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계획이 발표되면서 아시아자동차는 퇴출되었고, 공급체계가 기존의 4사 구도에서 3사 구도로 변화하게 됩니다. 그리고 외국에서 개발되어 시판된 적이 없는 국내 고유의 자동차를 개발해야 한다는 숙제를 떠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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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
    중화학공업정책 선언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73년:중화학공업정책 선언

    1973년에 발표된 자동차공업 육성계획은 이전에 발표된 중화학공업정책와 맞닿은 부분이 있습니다. 1973년 1월 12일에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공업정책을 선언합니다. 중화학 공업이란 제조업을 제조되는 생산물의 중량에 따라 나눌 때, 금속공업·기계공업, 화학공업, 요업의 일부 및 전기·석유 등 중량이 큰 제품을 생산하는 산업을 말합니다.

    중화학공업정책은 자동차공업 육성 기본계획의 내용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조립공장과 부품공장을 분리하고, 두 공장 사이에 수평적 계열화를 추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1973년 말까지 부품 국산화를 72%로 상승시키고 1975년까지 완전한 국산화를 이루는 것, 1980년대 초까지 50만대의 완성차를 생산하고 1억 5천만 달러의 수출이 이루어지도록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기에 장기 자동차공업 진흥계획의 일부라고 봐도 좋습니다.

    중화학공업 육성방침이 정해지면서 담당부처인 상공부는 자동차공업진흥 세부계획 수립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자동차공업 진흥계획을 입안합니다. 이는 고유 모델을 개발하여 자동차산업을 중화학공업의 전략산업으로 발전시켜 수출산업으로 육성시킨다는 내용이 주요 골자였습니다. 이렇게 우리나라는 본격적으로 자동차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한 계획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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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
    기아산업, 고유모델 소형차
    브리사 출시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74년:기아산업, 고유모델 소형차 브리사 출시

    브리사

    1971년에 4륜 트럭을 출시한 기아산업은 1974년 10월에 고유형 소형차인 브리사를 출시하였습니다. 이것은 정부의 진흥계획안에 발맞춘 것이었습니다. 이 차량은 일본 도요고교의 패밀리아를 도입한 것이었습니다. 고유모델을 출시하지 않고 일본의 자동차를 도입한 이유는 브리사의 생산계획이 정부정책결정 이전에 이미 추진되어 사업의 대폭적 변경이 불가능하였고 고유모델을 개발하기에는 위험부담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행이도 정부의 고유모델 소형차 구상과 일치했기에 모델 변경 없이 사업이 추진될 수 있었습니다.

    브리사는 라틴어로 산들바람이라는 뜻입니다. 직렬 4기통, 62마력의 엔진에 985cc의 배기량을 갖췄습니다. 차체는 마쓰다 패밀리아를 가져다 썼지만 엔진을 포함해 추진축과 클러치 등의 주요부품을 국산화해서 사용했고 63%까지 국산화율을 달성했습니다. 이후 1976년까지 국산화율을 89.5%로 높여서 기아산업의 자동차 생산 기술을 높이는데 기여했습니다.

    뛰어난 연비의 차량이었던 브리사는 오일쇼크 여파가 가시지 않은 시대상황에 잘 부합되는 차량이었습니다. 최고 시속은 140km였고 경제형 세단으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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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
    서울지하철 개통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74년:서울지하철 개통

    1974년 8월 15일에는 서울지하철이 개통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지하철을 개통한 21번째 국가가 되었고 서울은 41번째 도시가 되었습니다.

    지하철 종로선과 수도권 전철이 개통되면서 수도 서울은 급변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역~청량리역 간의 9.54km의 지하철은 서울~인천, 서울~수원, 청량리~성북역 간의 수도권 전철 98.6km와 연결되었습니다. 이는 하루 평균 70만 명 이상의 승객의 교통난을 해결할 수 있는 규모였습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2014년에는 수도권에 1·2·3·4·5·6·7·8·9호선·분당선·신분당선·중앙선·경의선·경춘선·공항철도·수인선·인천 메트로 1호선이, 부산광역시에 1·2·3·4호선·부산-김해경전철이, 대구광역시에 1·2호선이, 대전광역시에 1호선이, 광주광역시에 1호선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서울지하철 개통
    서울지하철 개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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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
    현대자동차 포니,
    토리노 모터쇼 참가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74년:현대자동차 포니, 토리노 모터쇼 참가

    토리노 모터쇼 참가

    1974년 10월 30일부터 11월 10일까지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국제 모터쇼에 현대자동차의 '포니'가 쿠페와 함께 참가하였습니다. 토리노 국제 모터쇼는 세계 각국에서 유수한 자동차 브랜드가 다음 해에 생산할 모델을 출품하여 성능을 겨루는 전시회입니다. 현대자동차의 '포니'는 자동차 전문가들로부터 보디 스타일, 성능, 경제성 등이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고, 또한 앞 시트의 조절장치, 전기식 앞 유리 세척장치, 후진등 등의 설계가 우수하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호평을 받은 포니는 1975년 11월에 출시되었습니다. 포니 1호차의 생산으로 현대자동차는 우리나라를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 다음으로 고유모델 자동차를 생산하는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이듬해부터 포니는 자가용과 택시로 많은 인기를 끌며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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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
    자동차부품공업 육성계획안 수립

    1962~1974년-기술을 도입하며 성장을 꿈꾸다

    1974년:자동차부품공업 육성계획안 수립

    상공부는 1974년 3월에 자동차부품공업 육성계획안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장기 자동차공업 진흥계획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조기 국산화와 품질 향상을 목적으로 1975년 1월 9일에 정부는 계열화 육성 대상 업체를 선정·발표했습니다.

    총 25개 품목, 총 34개 업체가 계열화 육성 대상 업체로 선정되었습니다. 이 대상 업체에게 정부는 이후의 자금지원과 외자도입 및 각종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이를 위해 관계기관과 정부부처에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계열화 제도는 1974년 12월에 중소기업 계열화 촉진법이 제정되고 1976년 6월에 동법시행령과 시행규칙이 공포되어 법적 뒷받침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1977년 5월에는 무역진흥 월례회의에서의 대통령 지시에 따라 자동차부품공업의 전환대책이 마련되었습니다. 이는 각계의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115개 품목 179개 업체를 정밀 실사한 결과를 토대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전용화 라인 설치, 품질관리제도의 확립, 계열화의 재정비, 부품기업의 대형화, 수급기업 간 협력체제 강구 등입니다.

    이전까지의 '수평계열화' 방침은 이에 따라 '필요하면 수직계열화를 인정'하는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1품목 2업체 이상의 계열화 원칙이 세워지면서 수급기업 간에 도급거래 질서를 확립하고 협력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청업체들의 신규 설립과 생산 활동이 활성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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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5
    현대자동차,
    국산화율 85% 달성
    첫 독자모델 포니 출시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75년:현대자동차, 국산화율 85% 달성 첫 독자모델 포니 출시

    1973년 1월 정부의 인가 취소로 현대와 포드의 합작회사 설립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포드와의 합작투자가 결렬되고 GM이 국내 시장에 진출함과 동시에 기아가 일관공정 자동차 공장을 건설하면서 현대자동차의 위기감은 고조되었습니다. 이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현대는 1972년에 제휴위주의 사업방식에서 고유모델 개발로 회사의 기본전략 방향을 수정하였습니다. 하지만 고유모델 개발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 않는 현대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현대는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기술을 들여오기 위해 노력했고 1973년 7월에 영국 퍼킨스에서 소형 디젤 엔진을, 9월에 이탈디자인에서 차체 디자인을, 일본 미쓰비시에서 엔진과 변속기를 들여오기로 협력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들의 기술을 들여오기 위해 현대는 각 나라에 연구진을 파견해 기술을 습득시켰고, 이때 배운 기술들은 현대가 기술자립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75년 12월에 첫 독자모델인 포니 1호차가 탄생하였습니다. 차체를 제외하곤 우리 기술로만 제작된 것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16번째로 고유모델 자동차를 생산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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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5
    새한자동차, 대우자동차의
    ‘로얄 시리즈’의 시초가 되는
    레코드 로얄 출시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75년:새한자동차, 대우자동차의 ‘로얄 시리즈’의 시초가 되는 레코드 로얄 출시

    1975년 8월에 새한자동차는 레코드 로얄을 출시했습니다. 이 차량은 GM코리아가 1976년 새한자동차로 이름을 바꾸기 직전에 GM독일 자회사인 오펠에서 개발한 레코드의 후속기종입니다.

    레코드 로얄은 기존 레코드 차량에서 스타일을 조금 바꾸어 출시되었습니다. 4도어 세단에 1,897cc 수냉직렬을 장착했고 120마력에 최고시속 160km/h를 냈습니다. 생산기간 동안 1,500cc, 1,900cc, 2,000cc의 가솔린 엔진과 2,000cc 디젤 엔진을 사용한 다양한 모델을 선보였습니다. 이후에 로얄살롱, 로얄디젤, 로얄XQ, 로얄프린스 등 대우자동차의 "로얄시리즈"의 시초가 되는 차종입니다.

    레코드로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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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5
    기아, 중동지역 첫 수출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75:기아, 중동지역 첫 수출

    1975년 9월에 기아산업은 브리사 픽업 10대를 중동지역의 카타르로 수출했습니다. 하동환자동차가 1967년 8월 이후 월남과 브루나이에 35대의 대형버스를 2년 동안 두 차례에 걸쳐 수출한 적이 있지만, 실질적으로 자동차 수출이 처음 시작된 건 기아의 중동지역 수출부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아산업이 카타르에 차량을 수출하여 벌어들인 돈은 총 1만 4,800달러에 불과한 작은 규모였습니다. 하지만 첫 수출이니만큼 큰 의미를 지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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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6
    GM코리아,
    새한자동차로 상호변경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76년:GM코리아, 새한자동차로 상호변경

    1976년 11월에 GM코리아는 새한자동차로 회사명을 변경하였습니다. GM코리아의 시작은 1972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신진 자동차와 GM이 50:50으로 합작하여 출범한 GM코리아는 엔진 공장 건설에 착수했지만 투자 여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1차 석유파동까지 겹치자 극심한 판매부진에 허덕이게 됩니다. 그래서 GM은 국내 GM코리아의 전망이 나쁘다고 판단해 투자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악조건들 속에서 신제품인 제미니의 생산마저 미루게 된 GM코리아는 결국 경영부실로 인한 재정악화로 산업은행의 관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76년 11월에 산업은행이 신진 자동차의 출자본을 인수하면서 상호를 새한자동차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애초의 계획보다 훨씬 늦은 1977년 12월에 출시된 제미니는 안타깝게도 많은 인기를 끌지 못하고 단명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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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6
    현대자동차 수출 시작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76년:현대자동차 수출 시작

    현대자동차가 처음으로 자동차 수출을 이뤄낸 것은 1976년 7월입니다. 포니 5대와 대형버스 1대를 남미 에콰도르로 선적하면서 포문을 연 것입니다. 기아자동차가 먼저 시작한 자동차 수출 시장에 현대자동차도 뛰어들면서 국산 자동차의 수출량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1976년에 1,341대였던 수출량은 1977년에는 9,136대로, 1978년에는 26,337대로 증가하였습니다. 그리고 1979년에 31,486대로 정점을 찍었습니다. 이후 1983년까지는 평균 2만대 선에서 수출량이 유지되었습니다.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현대자동차의 수출규모는 1976년부터 1983년 사이에 승용차 기준으로 74%~97%를 기록하였습니다. 평균 86%의 큰 수치였습니다. 이는 현대자동차가 자동차 수출 시장에 얼마만큼의 열망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수출 사업에 위험부담이 크다는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대자동차는 수출 사업으로 방향성을 잡았습니다. 경쟁업체와 같이 도입 모델을 국산화 하는 안정적인 전략 대신 고유 모델을 개발하겠다는 목표를 선택한 것을 보면 현대자동차가 자동차 수출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국내 최초로 북미시장 자동차 수출에 성공한 현대자동차는 세계적인 자동차 기업으로 우뚝 서는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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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
    부가가치세 도입 관련
    특별소비세 추가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77년:부가가치세 도입 관련 특별소비세 추가

    1977년 7월에 부가가치세제가 도입된 이후 특별소비세제가 보완, 적용되었습니다. 자동차 세제를 살펴보면, 구매단계에서 특별소비세, 특별소비세 방위세, 부가가치세의 3가지가 부과되었고, 등록단계에서 취득세, 등록세, 등록세 방위세가 부과되었습니다. 그리고 유지단계에서는 자동차세, 자동차세 방위세, 면허세, 유류 특별소비세, 부가가치세 등이 부과되었습니다.

    세부 세목별로 살펴보면 1970년대 중반까지는 물품세가 부과되었습니다. 이는 배기량에 따라 세율을 3단계로 적용하는 제도였습니다. 1977년 7월부터는 이를 특별소비세, 특별소비세 방위세, 부가가치세로 대체하였습니다.

    특별소비세는 물품세와 구조가 비슷했지만 배기량 기준이 약간 변경되었습니다. 1979년부터 '캠핑용 자동차'가 추가되었고, 승용차를 '6기통 이상이며 2,000cc이하급'으로 정의하였습니다. 그리고 1982년부터는 1,500cc~2,000cc급을 '4륜구동 지프형'으로 별도 구분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자동차세제는 이처럼 1970년대 들어 점차 틀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동차 세제는 부가가치세제와 특별소비세가 추가되면서 현재 자동차세제의 구조를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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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
    자동차 수출전략 산업화 추진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77년:자동차 수출전략 산업화 추진

    1977년에 우리나라는 '자동차 수출전략산업화 추진'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78년 7월에는 '1986년 200만대 생산 목표설정'을 공표했고, 1979년 1월에는 '자동차산업에 대한 10대 수출전략산업화 선정'을 발표했습니다.

    내수를 활성화하던 1970년대 중반의 분위기는 자동차생산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그 성과는 1977년의 수출 성공으로 이루어져 결국 우리나라 자동차 시장은 내수가 확장되고 생산규모가 확대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동차공업 진흥계획상에 명시된 높은 생산규모 목표 수치를 달성하기 위해 자동차업체들이 공장을 앞다퉈 건설했습니다. 다만 생산규모에 비해 가동률은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자동차공업을 수출전략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정부는 기존 업체들을 상대로 각종 지원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시설 및 자본규모가 영세한 부품 생산업체를 통폐합하여 정비해 나갔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경공업 제품에 대한 위기감이 깔려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섬유류 등 경공업 산업을 통한 경제발전도 꾀하고 있었지만, 세계적으로 각국의 수입규제조치가 강화되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중공업산업의 수출전략 활성화가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기존 자동차 3사에 대한 자금 및 행정 지원을 강화하고 이들과 계열관계에 있는 부품 업체들을 대형화하여 국제 경쟁력을 높이려 시도한 것입니다.

    상당히 많은 부품업체들이 이러한 정책의 여파로 1980년대에 대폭적인 내수감소의 타격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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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
    현대자동차,
    국내최초 디젤엔진 장착 및
    1톤 트럭 HD-1000 포터 출시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77년:현대자동차, 국내최초 디젤엔진 장착 및 1톤 트럭 HD-1000 포터 출시

    1톤 트럭 HD-1000 포터
    1톤 트럭 HD-1000 포터

    상용차 부분에선 기아산업이 선두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1977년 3월에 미니버스 출시에 이어 1트럭 포터와 3톤 트럭 바이슨(BISON)여 기아산업과 경쟁체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특히 HD-1000 포터는 포니와 함께 고유모델로 개발된 것입니다. 1977년 2월에 현상공모를 통해 네이밍된 '포터'는 1981년 7월에 판매대수 5만 대를 돌파하는 인기를 과시했습니다. 하지만 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로 인해 승용차만 생산할 수 있게 된 현대자동차는 그해 포터를 단종시켰습니다.

    1986년 12월에 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가 해제되면서 현대자동차는 포터를 재생산하게 됩니다. HD-1000 포터는 처음으로 디젤 엔진을 장착한 트럭이었고, 국내 최초의 1톤급 트럭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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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
    현대자동차,
    미니버스 HD 1000 출시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77년:현대자동차, 미니버스 HD 1000 출시

    미니버스 HD1000
    미니버스 HD1000

    1977년 3월에 현대자동차는 미니버스 HD-1000을 출시하였습니다. HD-1000은 트럭과 미니버스 등 두 종류로 생산되었는데, HD-1000 트럭은 포터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이는 포터의 1세대 모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HD-1000은 55마력을 가졌고, 앰뷸런스의 경우 7명, 미니버스의 경우 12명이 탑승 가능했습니다. 당시 아시아 자동차의 상용차 모델인 AC076, AV076과 경쟁하며 앰뷸런스 등 다방면에서 애용되었습니다. 그러나 1981년 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로 인해 단종되었습니다. 이후 1986년에 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가 해제되면서 그레이스와 포터가 출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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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
    새한자동차, 제미니 1호차 생산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77년:새한자동차, 제미니 1호차 생산

    1975년 11월 GM코리아는 정부에 기술도입 인가 신청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신청된 차량은 일본 이스즈의 제미니였습니다. GM코리아는 제미니에 시보레 1700용 엔진을 변형한 1,492cc 엔진을 장착해 생산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GM코리아는 1979년 연말까지 차체 국산화율 100%를 달성할 계획을 밝혔고, 정부는 이를 1976년 말로 앞당기도록 조정하는 방침으로 1976년 4월에 제미니 기술도입을 인가하였습니다. 하지만 GM코리아에 악재가 겹쳤고 1976년 11월에 산업은행이 신진 측 출자본을 인수하면서 GM코리아는 새한자동차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습니다.

    결국 1977년 12월에 제미니 1호차가 생산되었습니다. 제미니는 카미나를 대체하는 후속 차종이었고, 오펠 카데트 C를 이스즈 자동차에서 개량한 차량이었습니다. GM의 월드 카 계획을 통해 만들어진 오펠 카데트는 르망의 시초이기도 했습니다. 이를 새한자동차가 우리나라에 맞춰 개량한 것입니다. 하지만 제미니는 브리사와 포니와는 다르게 연비가 좋지 않아 단명하고 맙니다.

    제미니
    제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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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1979
    자동차산업 정책 결정의 부작용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77~1979년:자동차산업 정책 결정의 부작용

    국내 자동차 산업은 여러 가지 방향으로 발전을 꾀했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특히 자동차산업의 가동률은 1977년에 42.8%, 1979년에는 71.9%의 낮은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이 중 승용차부분의 가동률이 가장 낮았는데, 이는 1977년의 '자동차 수출전략산업화 추진'과 1978년 7월의 '1986년 200만대 생산목표 설정', 1979년 1월의 '자동차산업에 대한 10대 수출전략산업화 선정'으로 인한 과도한 시설확충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1978년에 발표된 '200만대 생산목표 설정'을 통해 완성차 업계와 부품업계로 하여금 생산능력을 키우도록 주도한 정부의 태도였습니다. 물론 정부의 정책 결정이 모두 달성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업체별로 전략이 달랐고 대응방향과 속도에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수립된 시설확충 계획도 상당부분 제대로 집행되지 않았고 일부분만이 추진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정부의 유도에 맞춰서 자동차 업계는 공장 건설에 열을 올렸습니다. 특히 부품업계의 경우 업체수가 적다보니 1970년대 말 정부의 시설확충 유도에 적극 대응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석유파동에 따른 경기침체를 맞이하면서 1980년대에 많은 부품업체들이 내수감소로 인한 시련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로 인해 국내 자동차 업계는 미진한 자동차산업 가동률을 극복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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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8
    제2차 석유파동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78년:제2차 석유파동

    1978년에 발생한 제2차 석유파동은 한국 자동차 산업에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석유파동이란 아랍석유수출기구(OAPEC)와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원유 가격인상과 원유 생산 제한으로 인해 세계 각국에서 일어난 경제적 혼란을 뜻합니다.

    제1차 석유파동은 1973년에 일어났습니다. 아랍의 이슬람문명권의 여러 국가와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아랍지역의 산유국들이 석유생산을 줄이고 가격을 인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을 압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석유에 의존하던 국가들은 인플레이션과 불황을 맞이하게 되었고 석유자원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었습니다.

    1978년 12월부터 1979년 3월까지 이란의 석유생산 축소와 수출중단으로 일어난 제2차 석유파동으로 국제 유가가가 치솟으면서 우리나라의 자동차 수출량은 떨어졌고, 무역수지에서도 큰 적자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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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8~1979
    자동차부품 전문공장 지정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78~1979년:자동차부품 전문공장 지정

    1978년 7월에 상공부는 자동차부품 전문공장을 지정했습니다. 이는 자동차부품 지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동차부품 전문공장을 지정·가지정하고 추가 선정 요령을 공고한 뒤에 관련 전문가들로 구성된 실태조사반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진행됐습니다. 그리하여 1979년 7월에는 59개 품목 228개 업체가 자동차부품 전문공장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업체에 대하여 정부는 각종 지원 혜택을 주었습니다. 장기 저리 시설자금, 외자구매를 위한 각종 차관 자금, 생산제품 구매자에 대한 국산기계 구입자금 지원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부의 각종 기술지도 사업의 우선실시 등의 정책도 펼쳤습니다. 그러나 당시 자동차 부품업체들은 소규모의 영세업체들이 많았기에 담보능력이 부족하고 신용상태가 좋지 않아 기대만큼 성과가 좋진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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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9
    자동차산업, 정부 지정
    10대 수출전략산업 선정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79년:자동차산업, 정부 지정 10대 수출전략산업 선정

    10대 수출전략산업화
    10대 수출전략산업화

    1979년에 자동차산업은 정부가 선정하는 10대 수출전략산업의 하나로 선정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진행되던 자동차 수출이 성장산업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자동차 내수시장의 호황과 고유모델 소형차 '포니'의 성공으로 1970년대 초반에 약 1만 대에 불과하던 국내 승용차 생산량은 1979년에 이르러 10만 대를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전체 자동차 생산량도 20만 대를 돌파했으며, 국산화 역시 자동차 진흥계획시 수립했던 95%의 수치에 거의 근접했습니다.

    이처럼 자동차산업이 10대 수출전략산업의 하나로 선정하면서 정부는 다양한 부양책도 내놓았습니다. 최각규 상공부장관은 1986년까지 수출산업 시설을 연평균 15%씩 증가시켜 현재의 3배 이상으로 만들고, 수출은 연평균 20%씩 증가시켜 현재 4배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하여 10대 주종업종을 모두 세계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중 자동차 업종은 생산능력을 연 200만 대로 증가시키겠다고 계획했는데 이는 자동차산업이 발전가능성을 인정받았다는 의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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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9
    자동차 생산규모 확대와
    가동률 감소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79년:자동차 생산규모 확대와 가동률 감소

    1979년에 이르러 자동차 생산량은 20만 4천대를 달성하였습니다. 하지만 가동량은 71.9%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습니다.

    소형 국민차가 출시되면서 자동차 내수시장은 호황을 이루었고, 1977년부터 수출산업이 활성화됨에 따라 생산규모는 점차 증가했습니다. 1974년의 자동차 생산량은 30,451대에 불과했지만 1975년에 37,179대, 1976년에는 5만 대, 1978년에는 15만 9천 대, 1979년에는 20만 4천 대를 기록해 가파른 상승세를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자동차 공업 진흥계획에 설정된 생산규모 목표치는 필요보다 높았고, 이에 맞춰서 지어진 공장들은 결국 극히 낮은 상태의 가동률밖에 보이지 못했습니다. 1977년의 국내 자동차 생산능력은 승용차 13만대, 트럭 5만 4,600대, 버스 9,400대를 합해 19만 4천대(지프형 및 동아자동차 제외)였지만 1979년에는 승용차 생산능력만 21만6천대였고, 전체적인 규모는 28만대에 달했습니다. 그 결과 자동차 공장의 가동률은 1977년에 42.8%, 1979년에 71.9%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이는 정부가 수요를 발생시키기 보다는 생산능력을 키우는 데 사업의 중점을 잡았고, 생산 능력의 증가폭에 비해서 수요가 한꺼번에 일어나지 않은 탓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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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
    새한자동차,
    로얄의 후속 차종 로얄 DSL,
    로얄 살롱(오토) 출시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0년:새한자동차, 로얄의 후속 차종 로얄 DSL, 로얄 살롱(오토) 출시

    로얄디젤
    로얄디젤

    새한자동차는 로얄에 디젤 엔진을 장착한 로얄 DSL과 최초 자동변속 차량인 로얄 살롱(오토)를 출시했습니다. 1975년 8월에 출시된 로얄 레코드는 서독 오펠에서 기술을 들여온 모델인데, 오펠이 이 차량을 이어받는 모델을 출시함에 따라 새한자동차도 새로운 차종을 내놓은 것이었습니다.

    1980년 5월에 출시된 로얄 DSL은 승차정원 5명에 수동 4단과 수동 5단 두 종류의 변속기를 달고 있었습니다. 후륜 구동 형식에 오펠의 2,000cc급 디젤엔진을 탑재했습니다. 디젤 엔진은 후드가 불룩 솟아 나와 있어서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1985년에 로얄 듀크와 마찬가지로 부분 변경을 거친 바디에 디젤 엔진을 단 로얄 DSL은 우리나라 최초의 디젤 세단이었습니다. 디젤 엔진의 장점인 높은 연비를 가졌지만 소음과 진동이 심해서 1989년 로얄 듀크와 함께 단종 되었습니다.

    또한 그와 동시에 발매된 로얄 살롱은 최초의 자동변속 차량이었습니다. 홀덴 VB 코모도어와 유사한 프런트 디자인을 적용한 로얄 살롱은 배기량 1,979cc, 4사이클 4실린더 직렬형 엔진으로 최고출력 119마력(6,000rpm), 최대토크 18kgm(3,800rpm), 최고속도 178km/h를 발휘했습니다. 변속기는 전진3단 후진1단이 가능한 자동변속기가 적용되었고 변속레버는 P→R→N→D→2→1로 배치되었습니다. D위치에서는 저속부터 고속까지 3단계로 자동 변속되었습니다.

    1983년에 새한자동차는 대우자동차로 사명이 변경되었고, 그 이후에도 로얄시리즈는 계속해서 출시되어 대우자동차의 주력 모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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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1
    자동차부품의 수출경쟁
    산업화(자동차부품공업의
    생산성향상 대책) 추진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1년:자동차부품의 수출경쟁 산업화(자동차부품공업의 생산성향상 대책) 추진

    1981년 정부는 '자동차부품공업의 생산성향상 대책'을 추진했습니다. 제2차 석유파동으로 인해 자동차산업이 극심한 불황에 빠지자 수출을 통해 부품업계의 위기를 극복해 보려는 시도였습니다.

    정부는 1980년대 자동차 산업 정책으로 '부품산업의 경우 생산성 향상 및 수출 촉진에 의한 자동차산업의 저변 보강'을 정했습니다. 그리하여 1986년까지 부품수출 10억 달러를 목표로 부품업체의 육성을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그 주요 내용은 수출산업에서 성장잠재력이 있는 260~300개 업체를 부품 전문 공장으로 재정비해서 중점적으로 육성하는 것입니다.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수출용 부품개발 및 기술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고, 시설 및 운전자금 지원, 수출거래 알선 등을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이를 통해 완성차 업체별로 부품공장을 계열화하고 해외시장 진출을 확대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 세부계획으로 수출업체의 재무구조 개선을 위하여 중소기업은행 및 신용보증기금의 1981년 출자계획 470억 원 중에서 100억 원을 자동차 부품업체에 출자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중소기업 저리 자금 중 운영자금 100억 원을 자동차부품 전문·계열화 공장에 우선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부품개발비의 지원을 위해서 기계공업 진흥기금 중 1981년도 운용계획이었던 60억 원의 절반인 30억 원을 연 6%의 저리로 지원토록 했습니다.

    하지만 자동차부품공업 생산성 향상 대책은 그 세부계획대로 추진되지 못한 부분이 많았고, 그래서 부품업계의 활성화는 예상만큼 빠르게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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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1
    전륜구동형의 X카(엑셀)
    개발계획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1년:전륜구동형의 X카(엑셀) 개발계획

    X카 개발계획
    X카 개발계획

    1981년 10월에 현대자동차는 전륜구동형의 X카(엑셀) 개발계획을 발표함과 동시에 30만 대 생산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내자 1,211억 원과 외자 2,758억 원 등 총 3,969억 원을 투입한 이 공장은 1985년 2월에 준공했습니다. 하지만 30만 대 생산시설로는 곧 공급부족 사태가 일어날 거라고 판단한 현대자동차는 새로운 30만 대 생산시설을 세울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그리고 이 계획을 1단계, 2단계로 나눠 1985년 8월에 1단계 사업인 15만 대 증설계획을 수립하고 곧바로 건설에 들어갔습니다.

    1985년 2월에 X카는 포니엑셀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습니다. 1978년에 개발계획을 수립한 이후 7년만이었습니다. 이 제품은 미국시장을 겨냥한 수출용이었고, 그렇기에 제품 디자인부터 부품 개발까지 현대자동차의 1천여 명의 개발팀이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수차례에 걸친 국내 테스트와 캐나다에서 진행한 혹한 테스트까지, 선진국 제품에 뒤지지 않는 차량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엑셀은 해치백과 세단형의 다양한 모델과 저렴한 가격을 무기삼아 1986년에 미국시장에 진입했습니다. 기본형은 4,995달러였고 풀옵션의 경우에도 7천 달러 수준이었습니다. 이는 토요타나 닛산 소형차의 기본 모델 가격에 불과했습니다. 그리하여 엑셀은 미국 시장의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소비되면서 미국시장에서 현대자동차를 톡톡히 알리는 몫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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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1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1년: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

    정부는 1981년 2월 28일에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2.28 합리화 조치)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이전 1980년 8월 20일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추진한 자동차산업 분야의 통합합병이 무산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GM과 현대의 통합 협상은 6개월간의 협상 끝에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기아와 GM의 통합 역시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이 자동차공업 합리화조치의 내용을 보면,
    1. 승용차는 현대와 새한으로 이원화하여 경쟁체제를 유지하고 수출시장 개척에 주력하도록 한다.(1~5톤 트럭 및 버스 생산금지)
    2. 차종별 전문생산체제의 강화를 위해 기아는 1~5톤 트럭(승용차 변형인 픽업은 제외) 및 중소형 버스, 동아(1977년 하동환자동차에서 상호변경)는 소방차, 믹서트럭, BCC(Bulk Cement Carrier: 비포장 시멘트 운반차), 탱크로리 등 특수특장차의 생산을 각기 전문화한다.
    3. 기아와 동아의 전문생산체제에 대비한 양사의 경영합리화 방안으로 양사의 통합을 추진하고 기아는 2륜차 부문을 대림산업에 인계한다.

    위와 같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의 핵심은 거대 기업인 GM의 협력 없이는 승용차부분의 통합이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통폐합 조치의 명분을 기아와 동아의 통합에서 찾아보고자 한 것입니다. 2륜차 부문을 대림산업에 넘겨준 기아산업은 동아와 함께 합병에 대한 협상에 들어갔고, 1981년 11월 30일, 드디어 두 회사는 상공부 회의실에서 비로소 합병에 합의하게 되었습니다.

    정부는 이 조치를 통해 중화학공업의 과잉투자 문제와 경기침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자동차산업 분야의 합병을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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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1
    기아산업,
    미니버스 봉고 코치 개발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1년:기아산업, 미니버스 봉고 코치 개발

    기아산업은 1980년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에 따라 승용차를 생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승용차 생산을 중단하고 소형트럭을 생산하는 것만으로는 경영에 차질이 생길 거라 판단한 기아산업은 미니버스이자 RV(Recreational Vehicle- 캠핑카를 포함한 레크레이션 전용으로 만들어진 자동차)차량인 봉고 코치를 개발했습니다.

    봉고 코치는 1981년 8월에 판매에 돌입했습니다.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에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봉고 코치의 폭발적인 인기로 인해 기아산업은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의 타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현재에도 승합차를 봉고차라고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봉고 코치는 승합차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봉고 신화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봉고코치
    봉고코치 생산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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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1
    신진자동차,
    거화자동차로 상호변경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1년:신진자동차, 거화자동차로 상호변경

    1981년 3월에 신진자동차는 상호를 주식회사 거화(巨和)자동차로 변경했습니다. 1965년에 새나라 자동차를 인수한 신진 공업사는 1966년에 상호를 신진자동차로 변경한 후 일본 토요타 자동차와 기술을 제휴하여 국산화율 20% 수준의 코로나, 크라운, 에이스, 퍼블리카 등을 생산하였습니다.

    1972년에 토요타 자동차가 중국진출을 위해 한국에서 철수하자, 신진자동차는 제너럴모터스(GM)와 합작하여 GM코리아를 설립했습니다. 하지만 경영악화로 GM코리아는 산업은행의 관리를 받게 되었고, 이후 산업은행이 신진 자본을 인수하여 새한자동차로 회사명을 변경하였습니다. 그리고 1978년에 산업은행의 보유지분을 대우그룹에 넘기면서 대우자동차(현재 한국GM)이 설립되게 되었습니다.

    신진지프자동차는 신진자동차의 계열사였습니다. 이후 신진자동차로 이름을 변경하고, 1981년에 거화자동차로 상호를 바꾸었습니다. 거화자동차는 1983년에 코란도를 출시해 호평을 받았지만 회사 내부 갈등으로 흑자도산을 일으킨 뒤 문을 닫게 되었고, 1985년 6월에 거화자동차는 동아자동차(현 쌍용자동차)에게 인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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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2
    4개 품목의
    부품기술연구조합
    각각 설립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2년:4개 품목의 부품기술연구조합 각각 설립

    1980년대 초의 부품업체들은 영세업체가 많았습니다. R&D투자 여력이 부족했고 기술 인력 규모나 기술 수준도 떨어졌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관련업체들은 협동조합을 중심으로 자동차부품 기술연구조합을 설립해서 공동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1982년에는 클러치, 헤드램프, 콤비네이션 램프, 와이퍼 암 블레이드 등 4개 품목의 연구조합이 각각 설립됐습니다. 이러한 연구조합의 설립에는 기술개발 촉진법이 뒷받침 되었는데, 이는 연구개발에 따르는 위험과 개발비 부담을 해결하고 신기술 개발을 추진하기 위한 법률이었습니다.

    과학기술처는 자동차부품 기술연구조합이 가진 4건의 연구 과제를 특정 연구개발과제로 승인했습니다. 그래서 개발 사업에 총 3억 2,890만원이 정부지원금으로 제공되었습니다. 1988년 이후 부품업체들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자체적으로 기술개발이 가능해지기 시작했고, 결국 조합은 해산되었습니다. 부품산업의 초기에 기술개발을 위해 부품업체들이 힘을 모아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기술개발에 힘썼기에 가능한 결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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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2
    현대자동차,
    자체 개발한 포니2 생산 시작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2년:현대자동차, 자체 개발한 포니2 생산 시작

    1982년 1월에 현대자동차는 부분 변경을 거쳐 자체 개발한 포니2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1978년부터 현대자동차는 포니 모델의 인기가 사그라질 것을 대비해 새로운 제품을 연구했습니다. 그러한 이미지 쇄신 작업을 통해 포니 모델을 개량해 출시한 것이 포니2였습니다. 기존의 포니는 캐빈 룸과 트렁크 룸이 분리된 4도어 패스트백이었지만, 포니2는 캐빈 룸과 트렁크 룸이 연결된 5도어 해치백이었습니다. 포니2는 출고와 동시에 인기를 끌어 첫 해에만 무려 3만 9,344대를 판매했습니다. 2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던 현대자동차를 흑자로 돌아서게 한 제품입니다.

    지속적으로 인기를 끌은 포니2는 1983년에 4만 2,886대, 1984년에 4만 226대를 판매하며, 1985년 신차 엑셀을 발매하기 전까지 인기 차종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1988년 4월에 자가용이 단종 되었고, 1990년 1월에 영업용이 단종 되었습니다.

    포니
    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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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2
    자동차부품 수출의 증대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2년:자동차부품 수출의 증대

    자동차 부품의 수출은 1982년에 이르러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양적 성장에 비해서는 더딘 편이었지만 점진적으로 대외 경쟁력이 향상되었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1980년 들어 자동차 부품의 국내 수요가 급감한 탓에 부품업체들이 해외로 시선을 돌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1975년에 970만 달러에 불과했던 부품 수출액은 1980년에 5,400만 달러로 늘어났고 1984년에는 최초로 1억 달러를 돌파하였습니다. 그리고 1986년에는 1억 6,500만 달러를 기록했습니다. 수출업체의 수도 빠르게 늘어나서 1975년에 33개에 불과하던 업체는 1982년에는 140개로 늘어났습니다. 수출 대상국 수도 40개국에서 122개국으로 증가했습니다.

    수출이 증가하면서 품목 수도 늘어났고, 주종 품목도 타이어 체인, 시트 커버 등의 보수용 단순 부품에서 클러치 커버, 디스크, 기어류, 리프스프링, 라디에이터 등 기능부품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일부 업체의 품목에서는 OEM 수출도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자동차 업체들이 미국시장 진출을 위해 전륜구동형 소형차를 생산하게 된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외국 업체들과 제휴를 강화하고 국내 업체들의 기술력이 증가하면서 나타난 결과였던 것입니다.

    자동차부품 수출 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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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3
    신진지프, 코란도 출시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3년:신진지프, 코란도 출시

    코란도
    코란도

    1978년, 신진자동차는 합작회사 AMC로부터 지분을 철수하겠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는 신진자동차가 리비아로 자동차를 수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리비아와 미국은 적대관계였고, AMC는 공산국가에 수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겼다며 신진자동차의 지프 브랜드 사용 계약의 연장을 불허했습니다. 결국 신진자동차는 1981년 3월에 거화자동차로 회사명을 변경하게 됩니다.

    거화자동차는 1982년에 12인승 롱 바디의 외형을 크게 변경한 뉴 훼미리와 익스테리어가 크게 변경된 픽업트럭을 발매했고, 그해 11월에 9인승 훼미리 디럭스를 발매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지프라는 차명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 1983년 3월부터는 코란도라는 새로운 차명을 사용하게 됩니다. 이는 "한국인도 할 수 있다"(Korean Can Do)라는 뜻을 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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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3
    대우자동차,
    중형급 로얄 프린스 생산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3년:대우자동차, 중형급 로얄 프린스 생산

    1983년 7월에 대우자동차는 레코드의 부분 변경 모델을 바탕으로 로얄 프린스를 출시하였습니다. 이후 1,500cc, 1,900cc, 2,000cc의 배기량을 가진 로얄 프린스 1500, 로얄 프린스 1900, 로얄 프린스 2000이 출시되며 인기를 끌었습니다.

    로얄 시리즈는 인기리에 판매되었지만 1980년 후반에 접어들면서 위기를 맞았습니다. 현대자동차에서 출시된 스텔라가 중형차 시장에서 빠르게 점유율을 늘려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1986년에 등장한 그랜저도 고급차 시장에서 점유율을 잠식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대우는 1986년 로얄 살롱을 기반으로 6기통 3.0리터 엔진 +A90을 탑재한 최상위 모델 '임페리얼'을 출시했습니다. 하지만 가파르게 상승하는 현대자동차의 인기를 꺾지는 못했고 로얄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갔습니다. 그리고 1991년 로얄 프린스의 후속 모델인 '프린스'와 로얄 살롱의 후속 모델인 '슈퍼 살롱 브로엄'이 출시되며 기존 모델은 단종 되었고, 로얄이라는 이름도 완전히 버리게 되었습니다.

    로얄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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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3
    현대자동차,
    코티나 대체용 고유모델
    중형급 스텔라 출시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3년:현대자동차, 코티나 대체용 고유모델 중형급 스텔라 출시

    스텔라
    스텔라

    1983년 7월, 현대자동차는 코티나를 대체하는 고유모델인 스텔라를 개발했습니다. 차명인 스텔라는 라틴어 'stellaris'에서 유래한 것으로, '별의', '중요한', '우수한', '일류의'라는 뜻을 가집니다. 현대자동차는 참신한 이미지와 세련된 품위, 뛰어난 기능을 지닌 승용차라는 의미로 스텔라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후륜구동 방식이고 1,400cc 엔진과 1,600cc 엔진을 장착하고 먼저 출시되었지만, 1985년 2월에 1,500cc 엔진으로 통일되었습니다. 바디 타입은 일반 자가용, 영업용 택시 등으로 출시된 세단형과 경찰차로만 출시된 스테이션 왜건형이 있습니다.

    스텔라가 단종된 후 제네시스가 출시될 때까지 한동안 현대자동차에서 후륜구동 방식의 승용차는 없었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대회의 공식 차량으로 쓰였으며 후에 출시되는 쏘나타의 기반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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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3
    새한자동차,
    대우자동차로 상호변경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3년:새한자동차, 대우자동차로 상호변경

    1983년에 새한자동차는 GM으로부터 경영권을 인도받았습니다. 그리고 명칭을 '대우자동차 주식회사'로 변경하였습니다. 1971년에 토요타가 저우언라이 4원칙에 따라 한국 시장에서 철수한 뒤에 새한자동차는 GM을 새로운 파트너로 삼았습니다. GM과 1:1비율로 출자한 GM코리아가 설립되었지만 1973년 오일쇼크로 인한 판매부진으로 인한 경영난 때문에 GM코리아의 신진자동차 보유 지분은 산업은행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명은 새한자동차로 변경되었습니다.

    1978년에 대우는 산업은행이 가진 새한자동차의 보유 지분을 인수하면서 경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83년에는 GM으로부터 경영권을 인도받아 새한자동차의 명칭을 대우자동차로 변경하였습니다. 1992년에는 GM이 보유한 지분을 전부 매입한 대우자동차는 이전의 새한자동차와는 완전히 독자적인 회사로서 운영되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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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3
    대우자동차의
    기술연구소 신설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3년:대우자동차의 기술연구소 신설

    1983년에 대우자동차는 기술연구소를 신설했습니다. 이는 1980년대 중반 자동차업계의 R&D(Research and Development)체제 구축에 동참한 것입니다. 자동차업계가 R&D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은 현대자동차의 엑셀 개발로 부터였습니다. 현대자동차는 울산공장 옆에 78억 4,500만원을 들여 각종 부대시설을 갖춘 주행시험장을 건설하였고, 1983년에는 엔진개발실을 신설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담당할 마북리 연구소를 1984년 설립, 이관하였습니다. 기아자동차는 1981년 중앙기술연구소를 설립하였고 148명의 인력으로 기술개발을 시작하였습니다. 1984년 말에는 소하리 공장에 중앙연구소를 지어 베스타와 프라이드 등을 개발했고 1988년 말에는 기아기술센터(KTC)를 설립하여 운영했습니다.

    이러한 업계 흐름을 쫓아 기술연구소를 설립한 대우자동차는 신모델 개발, 기존제품의 품질개선, 신소재 및 신공법 개발 등을 진행했습니다. 또한 기술연구소에 엔진연구실을 설치하여 엔진개발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대우자동차의 제휴선인 GM은 제휴회사의 독자적 제품 개발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우자동차 기술연구소의 연구개발을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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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3
    현대 자동차, 주행시험장 준공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3년:현대 자동차, 주행시험장 준공

    1983년에는 현대자동차의 자동차 주행시험장이 완공되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자동차를 개발해도 국내에 주행시험장이 없어서 제대로 된 시험이 불가능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포니 엑셀의 미국시장 진출 성공에는 자체적인 주행시험장의 확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1978년부터 건설에 들어갔습니다. 계획 초기에는 현재 기술연구소 부지인 남양만 근처로 위치를 잡았지만 경영여건이 악화되어 울산공장 옆으로 자리를 옮겨 1982년부터 공사를 재개했습니다.

    총 78억 4,600만원이 투자된 이 시험장은 고속 주행로를 비롯해서 각종 시험로와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당초 계획보다 규모를 축소 건설해서 최고 속도를 시험하는 데에는 다소 제약이 있었지만, 1984년 말에 충돌시험장과 환경시험실 등이 완비되면서 현대자동차는 본격적인 기술개발이 가능한 제반 시설들을 상당 부분 갖추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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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4
    자동차 제조업체를 통한
    품질관리 등급제 실시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4년:자동차 제조업체를 통한 품질관리 등급제 실시

    1984년 9월 상공부는 자동차 제조업체를 통한 품질관리 등급제를 실시하기로 하였습니다. 자동차 제조업체별로 지도대상 부품 공장을 선정하고 분류한 후에 자동차업체가 책임 하에 전문가를 동원하여 부품 공장의 관리 상태에 따라 정기적으로 기술, 품질관리, 경영 등의 지도를 실시하는 제도였습니다. 효과적인 지도를 위해 지도 후에는 당해 공장에 대한 품질 관리 평가를 실시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평가결과의 평점을 산출하여 평점에 따른 품질관리 등급을 부여하고 등급별 인센티브를 주기로 하였습니다.

    자동차 제조업체별로 지도대상이 되는 부품공장 수는 기아산업이 111개, 대우자동차가 105개, 현대자동차가 140개로 총 356개 공장을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공장 심사 기준은 공업진흥청 고시의 공장 품질 관리등급제 운영 요령과 동일한 기준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이 제도는 종합자동차 제조업체가 가진 계열 부품공장을 비롯해 전 부품 공장에 기술지도, 품질관리지도, 경영 지도를 의무화하는 것입니다. 부품공장의 체질개선 및 자동차 부품의 품질향상, 생산성 향상이 목적이었습니다. 또한 원가절감을 유도하여 자동차 부품의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자동차산업의 수출산업화를 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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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4
    현대자동차의 북미시장 진출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4년:현대자동차의 북미시장 진출

    현대자동차 북미시장 진출
    현대자동차 북미시장 진출
    현대자동차 북미시장 진출

    1984년에 현대자동차는 캐나다 시장 진출에 성공했습니다. 북미시장을 개척한 현대자동차는 1986년에는 미국시장에도 진출하여 우리나라 자동차 수출을 주도했습니다. 북미시장 진출로 현대자동차의 수출량이 급증했는데 그로 인해 자동차 생산 대수가 1984년에 14만 1천대로 늘어났고, 1986년에는 무려 42만 9천대를 달성했습니다. 승용차의 경우, 같은 기간에 4만 대에서 41만대로 증가하여, 10배에 가까운 증가폭을 보였습니다. 이는 1980년 이후로 연평균 38.3%, 승용차는 무려 47.5%에 달하는 높은 증가율을 보인 셈입니다.

    현대자동차 포니와 그 후속 모델인 엑셀에 대우 르망과 기아 프라이드가 가세하면서 우리나라의 수출량은 급격하게 증가했습니다. 1983년에 3만대 선에서 맴돌았지만 1987년에는 44만대, 1988년에는 48만대에 이를 정도로 급증한 것입니다. 1986년 이후로 1988년까지의 3년 동안 연평균 증가율은 67%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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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4
    품질관리 등급제 도입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4년:품질관리 등급제 도입

    1984년 9월에는 정부에 의해 품질관리 등급제도가 도입되었습니다. 이는 모기업과 부품공급업체간의 협력 강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품질관리 등급제도는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자신의 계열 부품공장을 포함한 전 부품공장에 기술지도와 품질관리 지도, 경영 지도를 의무화하는 제도였습니다. 이러한 제도를 통해 부품공장의 능력을 개발해 부품의 품질과 생산력을 향상시키고 원가를 절감토록 유도했습니다.

    품질관리 등급제도는 모기업이 부품업체의 품질관리를 평가하여 우수한 업체에게는 납품 시 품질검사의 면제, 대금지불기간의 단축, 제품개발 시 우선권 부여 등의 인센티브를 등급별로 차등 부여하고, 부진한 업체에는 페널티를 주도록 하는 제도였습니다. 정부는 이를 통해 부품산업의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부품업체들이 품질향상에 적극적으로 노력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했습니다.

    1985년부터 이 제도가 시행되면서 전체 부품업체중의 46.1%인 164개 업체가 첫 해에 1~3등급을 부여받았습니다. 1986년에는 53.6%인 222개 업체로 확대되었습니다. 주요 3사중에 가장 등급 부여율이 높았던 업체는 기아였습니다. 기아의 등급 부여율은 78.4%에 달했고 대우, 현대는 50%대를 보였습니다.

    완성차업체의 품질관리등급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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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
    중화학 투자조정 수정안 발표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5년:중화학 투자조정 수정안 발표

    1985년 1월에 정부는 중화학 투자조정 수정안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국내 자동차업체들의 경영상태가 흑자로 전환되어 국내경기의 호조가 지속됐을 뿐 아니라 수출이 증가하여 자동차산업의 가동률이 높아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산업화가 빠르게 호전되어 정상상태에 가까워지고 자동차수입 자유화가 이뤄질 무렵 정부는 국내 자동차산업을 더 발전시켜 수출량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경쟁력이 향상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1987년부터 기존업체에 대한 생산차종 제한을 없앤다는 내용의 중화학 투자조정 수정안을 발표했습니다.

    자동차산업의 배양을 위해 1987년 초부터 승용차, 소형트럭 및 버스에 대한 생산체제를 1981년 2·28 투자조정 시기 이전으로 환원시킨다는 정책이 발표되면서 현대자동차, 기아산업, 대우자동차 등 자동차 3사는 신규 차종생산을 위해 외국 업체들과의 기술제휴 및 시설보완을 서둘렀습니다. 기아의 경우 Y카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1987년 1월에는 프라이드라는 이름의 승용차를 출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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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
    현대자동차, 30만대 공장 준공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5년:현대자동차, 30만대 공장 준공

    자동차 업계의 성장에 따라 자동차 수출 규모는 점점 비대해졌습니다. 그래서 완성차 업계는 자동차를 양산하기 위한 체제의 확립이 필요해졌습니다. 1970년대 중반에 고유모델을 개발해 수출 경험을 쌓은 현대자동차는 1985년 2월에 우리나라 완성차업계 최초로 30만대 규모의 포니 엑셀 전용 생산 공장을 완공하였습니다.

    현대자동차는 1987년 3월에 1단계 사업으로 15만대 규모의 공장을 증설했고, 12월에 2단계 사업 30만대 규모의 제2공장을 준공하였습니다.

    현대자동차는 1981년 10월에 전륜구동형의 X카(포니 엑셀) 개발계획과 함께 30만대 공장 건설 계획에 착수했습니다. 내자 1,211억 원과 외자 2,758억 원 등 총 3,969억 원이 투입된 이 사업은 1985년 2월에 준공이 완료되었습니다. 뒤이어 1985년 8월에는 15만대 증설계획을 수립하여 곧바로 건설에 들어갔습니다. 기존에 건설된 공장만으로는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5만대 증설계획은 30만대 공장 건설 계획을 2단계로 나눠 추진한 첫 사업이었습니다. 1980년 이후 기아가 승용차 생산을 중단하여 1982년에 그보다 4만대 이상 줄어든 19만 2천대의 생산 능력을 보유하던 우리나라는, 현대의 공장 건설로 인하여 1985년에는 48만 9천대의 생산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대의 공장증설과 대우의 르망공장 신설로 인하여 1986년에는 92만 4천대로 크게 늘었습니다.

    1980년대의 10만대 수준이 1985년까지 유지되던 트럭 생산 능력은 1986년에 16만 7천대로 증가했고, 버스도 1980년의 2만 3천대에서 1982년 4만대로 확대되고 1986년에는 9만 4천대 까지 증가했습니다. 현대의 30만대 공장 준공으로 인해 현대자동차는 내수·외수용 자동차 공급을 여유롭게 진행시킬 수 있었습니다.

    현대자동차 생산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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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
    현대자동차,
    국내 첫 독자디자인 모델
    쏘나타 출시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5년:현대자동차, 국내 첫 독자디자인 모델 쏘나타 출시

    1985년 현대자동차에서 출시한 쏘나타는 스텔라의 최상급 모델이었습니다. 하지만 각진 모양의 바디가 스텔라와 비슷했고, 성능은 대우 로얄 시리즈에 비해 뛰어나지 않아 반응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델명인 '소나타'를 '소나 타는 차'라며 비아냥거렸습니다. 현대자동차는 1987년 차명을 '쏘나타'로 변경하는 등 이미지 쇄신을 하려 했지만 결국 1987년 12월에 단종 되었습니다.

    1984년 초부터 현대자동차는 수출 전략형인 독자적인 중형차 Y2카를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Y2카가 1988년 6월에 뉴 쏘나타라는 이름으로 출시되며 국내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차량은 1993년 5월 Y3카인 쏘나타 2에 자리를 물려주기까지 총 55만2천433대가 팔리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뉴 쏘나타는 외국의 힘을 빌리지 않은 국내 첫 독자모델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쏘나타
    쏘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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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
    현대자동차,
    국내 최초 전륜구동방식 차량
    포니 엑셀 출시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5년:현대자동차, 국내 최초 전륜구동방식 차량 포니 엑셀 출시

    1985년 2월에 현대자동차는 신라호텔에서 신차 발표회를 했습니다. 이곳에서 포니 엑셀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 차량은 국내에서 처음 생산된 전륜구동방식(FF)의 차량이었습니다. 당시 전세계적으로 유행하던 2박스 5도어 해치백 스타일을 채용했고 직렬 4기통 1,298cc, 1,468cc 엔진을 장착했습니다.

    석유파동이 2차례 일어나면서 소비자들은 공간 효율과 연비가 좋은 차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엑셀은 이에 맞춰서 엔진을 차체 앞쪽에 얹어 승객공간을 늘렸고, 뒤 차축과, 차축을 돌리던 프로펠러샤프트를 없애고 가볍게 하여 연비를 향상시켰습니다. 그리고 까다로운 미국 배기가스 규제와 안전도 검사를 통과했고, 당시 고급차에만 사용되던 네 바퀴 독립현가장치 서스펜션을 도입해 불규칙한 노면에서도 좋은 승차감을 유지했습니다.

    이처럼 훌륭한 사양 덕분에 1989년 후속모델 뉴 엑셀이 출시될 때까지 포니 엑셀은 3가지 형태로 판매되어 약 136만대가 생산되었습니다. 그리고 포니 엑셀은 1988년 7월에 단일모델 100만대 생산이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엑셀
    엑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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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
    기아, Y카 프로젝트 발표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5년:기아, Y카 프로젝트 발표

    1985년 5월에 기아자동차의 승용차 생산계획인 'Y카 프로젝트'가 발표되었습니다. 이것은 기아·마쓰다·포드 3사가 3각 협력 체제를 구축하고 소형승용차를 분업체제로 개발·생산·판매한다는 구상이었습니다. 개발은 마쓰다, 생산은 기아, 미국 내 판매는 포드가 각각 맡기로 하였습니다.

    이 구상은 1982년 8월에 작성된 기아의 리터카 개발계획으로부터 시작됩니다. 2·28조치로 중단된 승용차 생산 재개 문제와 시장 개방을 앞두고서 배기량 1리터급의 국제적인 수준의 소형차를 개발하려는 구상이었습니다. 당시 기아자동차는 마쓰다와 협력관계에 있었는데, 마쓰다는 포드와 협력하여 소형차를 개발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아는 1983년 9월에 마쓰다와 이토추의 자본참여를 받아들이고 1983년 10월에 기아·마쓰다·포드 3사 합동회의에서 리터카 개발구상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말에 기아와 마쓰다 사이에서 리터카 개발에 대한 기본적인 합의가 이루어졌고, 그 합의를 바탕으로 사업이 추진되게 되었습니다.

    1984년 말에 3사가 Y카 프로젝트를 공동으로 추진하기로 합의하면서 3국 3사의 분업체제가 시작되었습니다. Y카 프로젝트는 1986년 말 양산이 이루어졌고 1987년 1월에 프라이드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습니다. 수출명 페스티바 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이 차량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먼저 판매되었고, 국내에선 3월부터 판매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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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
    현대자동차,
    국내 최초 완성차업체
    해외연구소 설립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5년:현대자동차, 국내 최초 완성차업체 해외연구소 설립

    1985년 미국 캘리포니아에 국내 최초 완성차업체의 해외연구소 '현대 아메리카 테크니컬 센터'가 설립되었습니다. 이는 국내 독자 자동차 개발 모델이 늘어나고 수출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진국의 기술개발 동향을 적극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었고, 현지 시장에서 나타나는 수요자들의 요구를 지속적으로 파악하여 신제품에 반영해야 했습니다. 주로 선진국 업체들이 먼저 실시했던 전략이었지만, 국내 자동차 업계의 기술력이 증가하면서 해외 연구개발 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현대 아메리카 테크니컬 센터는 배기가스, 연비, 안전도 등에 대한 기술을 연구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1990년에 캘리포니아 오렌지 타운티에 현대 디자인 센터를 설립해서 자동차 디자인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캘리포니아는 미국산 신차의 10%, 수입차의 20%가 판매되는 지역이었습니다. 현대는 수요자들의 요구를 빠르게 파악하기 위해서 캘리포니아를 연구소 입지로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해외연구소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현대자동차는 다른 지역에도 연구소를 설립하기 시작했습니다. 1994년에는 독일과 일본에 기술연구소를 설립해서 2014년 현재까지 현지 시장에 적합한 기술 및 제품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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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6
    기계류 부품 및 소재 국산화
    5개년계획 발표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6년:기계류 부품 및 소재 국산화 5개년계획 발표

    국산화 5개년계획

    1986년 12월에 정부는 '기계류 부품 및 소재 국산화 5개년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정부는 이에 따라 수입대체 촉진책으로 1987년에 '자동차부품 국산화 5개년계획'을 별도로 수립하여 부품 국산화를 적극 추진했습니다. 이 계획에 따라 정부는 1987년에 175개 품목, 1988년에 261개 품목, 1989년에 99개 품목, 1991년에 118개 품목을 국산화 개발 대상 품목으로 선정했습니다. 그리고 정부는 91년까지 5년간 7조 8천 5백 97억 원을 투입하여, 1만 3천 4백 35개 품목의 기계류와 부품 및 소재를 국산화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선정된 대상 품목은 자동차조합이 중심이 되어 국산화를 추진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 1990년에 457개 품목을 국산화하고, 1991년에 1,170개 품목을, 1992년에는 991개 품목을 국산화하는 등 1997년까지 거의 8,000개 품목의 국산화를 완료하였습니다. 이는 약 16억 달러에 이르는 수입대체 효과를 거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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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6
    자동차 수입 개방방침 발표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6년:자동차 수입 개방방침 발표

    1986년에는 자동차 수입 개방방침이 발표되어 수입자유화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가장 먼저 특장차가 적용되었고, 1987년에는 일반 버스 및 트럭, 중대형 승용차가 추가되었으며 1988년 4월 1일에는 전 차종에 대한 수입 자유화가 실시되었습니다.

    다만 수입제품에 비해 국내제품의 경쟁력이 충분치 않거나 대일 무역역조가 심한 몇몇 완성차와 부품들은 수입선 다변화 품목으로 지정하여 수입선을 미국, 서유럽 등으로 전환 유도했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수입자유화 정책은 과거에 시행되던 정책과는 그 방향성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전에는 국내 기업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방식으로 산업정책을 결정하였다면 이제는 대내외적으로 경쟁을 촉진하여 기업의 기술을 혁신하고 생산성 향상을 꾀하는 방향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외형 성장 중심의 기업경영 풍토를 개선하고 대기업에 의한 경제력 집중 등 국내 산업구조의 불균형을 시정할 뿐 아니라 국제 경쟁력의 강화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수출량을 증대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러한 자동차 수입 개방방침의 발표로 국내 자동차업계는 경쟁력 강화를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는 생태계가 조성되었고, 결국 우리나라의 자동차산업이 수입차와 비등해질 정도의 기술력을 가지게 되는 데 한몫을 했습니다.

    자동차수입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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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6
    기아자동차, 국산 전기자동차
    베스타 첫 제작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6년:기아자동차, 국산 전기자동차 베스타 첫 제작

    베스타 전기자동차

    1986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자동차가 만들어졌습니다. 기아의 베스타를 기본 모델로 하여 만든 이 자동차는 1회 충전으로 141km를 주행했습니다. 최고속도는 72km/h까지 나왔습니다. 등판능력은 0.21, 정지 상태에서 40km/h까지 가속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8초였습니다. 이 차는 시판용은 아니었고 TV중계용으로 만들어졌는데, 마라톤 경기 진행시 차량을 뒤따르는 선수들에게 배기가스를 내뿜지 않고 소음이 없어서 쾌적한 조건을 제공하였습니다.

    이 제품은 미국, 일본에 이어 세 번째로 개발된 차량입니다. 하지만 기술수준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진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전기자동차라는 점, 그리고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때 마라톤 경기 중계용으로 선보여 활약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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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6
    대우중공업, 스톰엔진 개발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6년:대우중공업, 스톰엔진 개발

    1986년 대우중공업은 스톰엔진을 개발했습니다. 이것은 설계에서 생산까지 완전 국산화한 차량용 디젤엔진이었습니다. 이 엔진을 개발하기 위해 대우자동차는 1976년부터 독일에 기술자들을 파견해 독일MAN사에서 근무하면서 디젤엔진의 설계, 시험, 개발, 탑재, 생산관리, 생산 기술 등의 생산 공정을 연수시켰습니다. 이 연구진은 1978년 초 한국으로 돌아와 같은 해 3월부터 국산 디젤엔진 개발에 착수했고, 결국 완전 국산 디젤 엔진인 '스톰'을 개발해낼 수 있었습니다.

    '스톰'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폭풍처럼 강력한 추진력을 갖고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이 엔진은 대우중공업이 두산 인프라 코어에 합병된 현재까지 총 34개 대표 기종의 차량용, 산업용, 선박용 디젤엔진 생산의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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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6
    현대자동차,
    대형급 자동차 그랜저 출시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6년:현대자동차, 대형급 자동차 그랜저 출시

    그랜저
    그랜저

    1986년 7월에 현대자동차는 대형승용차인 그랜저를 출시했습니다. 그랜저(GRANDEUR)라는 차명은 웅장, 장엄, 위대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차량은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올림픽의 공식 스폰서였던 현대자동차가 일본의 미쓰비시와 공동 개발한 차량입니다. 그랜저는 1985년 12월에 단종된 그라나다의 빈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직선 위주로 디자인되어서 선 외각이 뚜렷해 각(角)그랜저 라고도 불렸습니다.

    디자인은 현대자동차가 맡았고 설계는 미쓰비시가 맡았습니다. 우리나라 대형차 중에선 최초로 전륜구동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1세대 그랜저는 단종된 지 20년 이상 지났는데도 지금도 볼 수 있는 차량입니다. 그리고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 종종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전까지 대형차 시장은 대우 로얄 시리즈가 잠식했지만, 그랜저는 출시와 동시에 대형 자동차의 선구자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다양한 모델로 출시되어 현대자동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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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6
    대우자동차,
    GM의 월드카 생산계획을 통해
    르망 생산 시작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6년:대우자동차, GM의 월드카 생산계획을 통해 르망 생산 시작

    1983년에 새한자동차가 대우자동차로 회사명을 바꾸었을 때, 승용차 생산규모는 현대자동차의 1/5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동차를 그룹의 주력으로 키운다'는 목표를 가졌던 대우자동차는 이를 달성하기 위한 방편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세계시장에서 뒤지지 않는 경쟁력 있는 상품을 만들기 위해 협력선인 GM을 설득해 GM이 추진하고 있던 월드카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월드카 계획에서 생산을 담당한 대우는 1986년 7월에 월드카 르망을 생산, 출시하였습니다. 르망이라는 차명은 내구 레이싱 대회가 열리는 프랑스 르망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르망 24시의 경주용 차처럼 내구성과 성능이 뛰어나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르망은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눈길을 끌었습니다. 1991년 오펠의 이름셔를 튜닝하여 출시된 르망 이름셔는 엔진 튜닝과 전용 휠, 형상기억물질이 포함된 에어로 파츠와 포르쉐에서 주문제작한 서스펜션, 독일 레카로사의 버킷시트 등 고급 부품으로 치장된 고급 승용차였습니다. 1997년 2월에 생산이 중단된 르망은 만 10년 8개월 동안 승용차 판매 536,254대, 수출 516,099대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르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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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6
    쌍용그룹, 동아자동차 인수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6년:쌍용그룹, 동아자동차 인수

    1986년 9월에 동아자동차는 쌍용그룹에 인수되었습니다. 1980년대에 국내 3내 자동차 회사는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대우자동차였습니다. 동아자동차는 지프 및 버스 등에만 사업이 한정되어 다른 자동차 회사에 비해선 경쟁력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동환이 창업한 동아자동차 계열은 성장 부진으로 인해 쌍용그룹에 매각되고 맙니다.

    쌍용자동차는 쌍용그룹의 탄탄한 지원을 받았습니다.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지면서 기존 동아자동차의 주력차종이었던 지프차 및 상용차 생산에 이어 1992년에는 세단형 승용차를 생산하였습니다. 그리고 1993년에 벤츠와의 승용차사업 합작을 정부로부터 승인받아, 스포츠 유틸리티카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업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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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
    현대자동차,
    촉매변환장치의 국산화

    1975~1986년-도약하며 성장하고 고유 모델을 개발하다

    1987년:현대자동차, 촉매변환장치의 국산화

    1980년대 후반부터 자동차 성능에 대한 규제가 강해졌습니다. 배기가스 규제가 강화되었고 소음규제 또한 높아졌습니다. 이러한 규제의 강화는 관련기술의 발전을 가져왔고, 안전규제는 수출과 관련된 발전을 유도했습니다.

    1987년 7월에는 국내 자동차 배기가스 규제가 대폭 강화되었습니다. 그래서 배기가스 수치를 낮출 촉매변환장치의 장착이 필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현대자동차는 럭키그룹(현 LG그룹)과 미국 Engel Hard 사와의 합작회사인 한국엥겔하드에 자본을 투입해 촉매변환장치 국산화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엔진의 전자화를 이루기 위해 합작회사인 KEFICO를 설립하고 여러 부품을 국산화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밟으며 현대자동차는 촉매변환장치의 국산화는 물론이고 엔진과 관련부품의 성능개선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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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
    자동차부품 국산화
    5개년 계획 적극 추진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87년:자동차부품 국산화 5개년 계획 적극 추진

    1987년에 정부는 자동차부품 국산화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부품국산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이것은 1986년 12월에 수립된 정부의 '기계류, 부품 및 소재 국산화 5개년 계획'에 따른 수입대체 촉진을 위해 자동차부품 관련 산업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정부는 이 계획에 따라 1987년에 175개 품목, 1988년에 261개 품목, 1989년에 99개 품목, 1990년에 69개 품목, 1991년에 118개 품목을 국산화 개발 대상 품목으로 선정했습니다. 그리고 자동차조합이 중심이 되어 대상품목에 대한 국산화를 추진했습니다. 자동차 전용 부품의 국산화를 위해 78개 업체에 5백58억 원의 개발자금이 지원되었고, 자동차 부품개발업체에 대해 수출산업설비금융 대폭 지원, 부품개발을 위한 설비 도입시 관세 감면, 부품국산개발 품목에 대한 국립시험검사기관의 검사수수료 면제 등의 혜택을 주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1990년에는 457개 품목을 국산화했고, 이듬해인 1991년에 1,170개 품목, 1992년에는 991개 품목을 국산화했습니다. 1997년까지 거의 8,000개 품목의 국산화를 완료하여 16억 달러에 이르는 수입대체 효과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부품국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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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 해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87년: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 해제

    1982년에 자동차산업에 제한을 걸었던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2·8합리화조치)가 1987년에 해제되었습니다. 기아자동차는 승용차부문이, 대우자동차와 현대자동차는 중소형 상용차부문의 제한이 풀려 각각 생산을 재개하게 되었습니다.

    기아자동차는 1984년에 포드, 마쓰다와 삼각협력을 통해 소형승용차를 개발해 미국에 공급하기로 합의하고 이전부터 생산을 준비해왔기 때문에, 자동차공업합리화 조치의 해제와 동시에 신형차량을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대우자동차와 현대자동차도 이전부터 중소형상용차 생산계획을 마련하여 1987년부터 즉각 생산에 돌입했습니다.

    2·28합리화 조치 이후로 분업화되었던 자동차산업의 공급구조는 1987년 이후 다시 경쟁체제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기아, 대우, 현대 3사는 국내시장과 미국시장을 놓고 치열한 판매경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쟁구도는 업계의 자동차 개발 기술이 발전하는데 순작용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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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
    자동차 배기가스,
    소음 규제 강화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87년:자동차 배기가스, 소음 규제 강화

    1987년 7월, 자동차 배기가스 규제와 소음 규제가 대폭 강화되었습니다. 특히 자동차 배기가스 규제 수준이 매우 높아서 자동차 업체들은 촉매변환장치를 필수적으로 장착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촉매변환장치의 국산화와 관련기술의 습득이 요구되었고, 이러한 필요는 엔진 및 관련부품의 성능개선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강화된 우리나라의 배기가스 규제 수치는 일본보다 높고 미국과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2000년 이후에는 미국보다 더 높은 수치로 규제되었습니다. 다만 경승용차의 경우에는 훨씬 완화되어 적용되었고, 2000년 이후에는 그보다 조금 강화되어 1990년대의 소형차 이상 급에 대한 규제수준과 동일한 수준으로 적용되었습니다.

    소음규제 또한 서유럽수준 이상으로 높게 규제되었고, 이에 따라 엔진, 동력전달장치 및 관련 부품은 물론 차체의 구조설계기술, 소음차단 기술 및 재료의 개발 등에서 많은 발전을 이뤄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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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
    현대자동차 KEFICO 설립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87년:현대자동차 KEFICO 설립

    촉매변환장치의 국산화에 성공한 현대자동차는 촉매변환장치 적용에 필수적인 엔진의 전자화를 위해 독일 보쉬, 일본 미쓰비시와 합작하여 KEFICO(Korea Electric Fuel Injection Co.)를 설립했습니다. 총 자본금 2백억원으로 1987년에 설립된 KEFICO는 현대자동차가 49%, 보쉬사와 미쓰비시 전기가 각각 25.5%씩 지분을 나눠 갖은 회사였습니다.

    현대자동차는 KEFICO에서 전자식 가솔린 분사장치와 ECU(Engine Control Unit-공기량, 공기온도, 대기압, 주행속도 등의 8가지 입력신호를 분석, 최적의 흡입공기량과 점화시기를 제어하는 기술) 등의 기술을 국산화했습니다.

    이를 통해 자동차 성능 규제와 관련한 경험과 기술을 습득한 현대자동차는 후에 자동차 배기가스 규제와 같은 환경문제에 대처할 능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현대자동차 KEFICO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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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
    국내 첫 모터스포츠대회 개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87년:국내 첫 모터스포츠대회 개최

    국내 첫 모터스포츠 대회
    국내 첫 모터스포츠 대회

    1987년 3월 19일, 강원도 진부령에서 랠리 형식의 자동차대회인 '제1회 용평레이스'가 열렸습니다. 레이스 코스는 알프스 스키장에서 시작되어 원릉, 인제, 운두령, 진부, 횡계 등을 거쳐 용평 스키장에 이르는 150km의 산악 길이었습니다.

    이 경주는 아리랑 모터스포츠 클럽이 주최한 것이었는데, 참가자는 아마추어 동호인 18명이 전부였습니다. 제대로 꾸려진 정식 경기가 아니었기에 출발점과 도착점이 정해져 있을 뿐 별다른 규정이나 규칙도 정해진 게 없었습니다. 단순히 엔진 배기량 1,500~2,000cc 급의 국산차로 출발신호를 받고 출발하여 제일 먼저 피니시 라인을 통과한 선수가 우승하는 형식이었습니다.

    비록 시작은 소소했지만, 1989년에 들어서면서 기아자동차, 대우자동차, 현대자동차 등 메이커별로 치르는 원메이커 경기방식이 도입되었습니다. 이전까진 게임이 단조롭고 후원이 없어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를 통하여 자동차업체의 관심을 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부산 에이스원 그랑프리, 챌린지컵 레이스, 몽산포 300km 레이스 등이 개최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상설 경기장이 없었기에 자동차가 달릴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경기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경기가 개최되는 곳은 인천 송도와 영종도, 충남 청포대와 몽산포, 부산 등 전국의 해변이 주를 이뤘습니다. 비록 제대로 된 트랙도 없었지만 이후 국내 모터스포츠 대회를 안착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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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
    수입자유화 시행 이후
    수입승용차 판매 현황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87년:수입자유화 시행 이후 수입승용차 판매 현황

    수입자유화 정책은 1980년대 들어서서 단계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마지막 단계로 자동차 수입자유화가 1986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해외 승용차가 수입된 것은 1987년부터입니다.

    자동차 수입은 1986년에 특장차가 우선적으로 도입되었고, 1987년에 일반 버스 및 트럭과 중대형 승용차가, 1988년 4월 1일에는 전 차종에 대한 수입자유화가 실시되었습니다. 다만 경쟁력이 충분치 않고 대일 무역역조가 심한 완성차 및 부품에 대해서는 수입선 다변화 품목으로 지정하여 수입선을 미국, 서유럽 등으로 전환하도록 유도했습니다. 1988년 4월 1일을 기준으로 자동차분야에서 완성차 11개 품목과 부품 12개 품목 등 총 23개 품목이 수입선 다변화 품목(HS 6단위 기준)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자동차 산업 보호를 위해서 해외 자동차의 수입을 제한하던 정부는 수출량이 늘어날수록 외국 자동차 업계와 마찰이 생기자 수입자유화에 대한 필요를 느꼈습니다. 외국산 자동차가 들어오더라도 뒤지지 않고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기술력을 국내 자동차 업계가 확보했다고 판단한 정부는 수입자유화를 전면적으로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국내에 수입승용차가 들어온 첫 해에는 벤츠230E 1대, 300SEL 9대, 아우디200 1대 등 11대가 판매되었는데, 이는 모두 독일의 차량이었습니다. 이듬해부터는 다양한 메이커가 참여하면서 1988년에는 11개 메이커의 승용차가 318대 팔렸고 1989년에는 1,414대가 판매되며 점차 수요가 많아졌습니다. 1990년에는 총 2,436대가 판매되었다가, 1993년에 1,952대가 판매될 때까지 2천대를 약간 밑도는 판매실적을 유지했습니다.

    국내 수입 승용차 판매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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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
    자동차산업 노사분규 발생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87년:자동차산업 노사분규 발생

    1987년 6·29 선언을 계기로 정치, 경제, 사회 전반으로 민주화 요구가 확산되었습니다. 자동차산업 현장에서도 노동자 계층의 불만이 드러났습니다.

    1987년 8~9월의 노사분규로 인해 자동차업계는 일시적인 전면 휴업에 들어갔습니다. 이후 매년 완성차 업체 및 부품업체에 노사분규가 발생하면서 조업 단축 및 중단이 이어졌습니다. 자동차업체에서는 노조의 유무와 상관없이 직선제에 의한 노동조합의 결성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발생했고, 대우와 기아에서는 직선제로 선출된 새로운 노조 집행부가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현대자동차 또한 노조가 없었지만, 새로운 집행부가 노조와 함께 출범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장기간의 노사분규가 발생했고, 많은 생산차질을 겪게 되었습니다. 노사분규에서 거론된 주요 현안은 임금인상, 근로시간 단축 등의 노동 조건이 포함되었고, 단체협약 체결과 관련한 조합가입 형태, 경영 참여, 해고 복직 문제도 중요 사안으로 다뤄졌습니다.

    이후 자동차업계는 1990년대 중반까지 해마다 임금협상과 단체협상을 둘러싸고 파업과 조업중단을 되풀이하며 노사 양측 간의 힘겨루기를 이어나가야 했습니다.

    자동차산업의 노사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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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8
    전 차종 수입자유화 실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88년:전 차종 수입자유화 실시

    1988년 4월 1일, 우리나라는 전 차종에 대한 수입자유화를 실시했습니다. 이전까지 국내 자동차업계는 수입제한을 통해 보호되었습니다. 자동차 산업이 전략적으로 집중 육성되어야 할 기간산업이었기에, 이전까지 정부는 수입을 제한하여 국내 자동차 산업을 보호해 왔던 것입니다.

    국내 자동차산업이 성장함에 따라, 1986년의 수출규모는 30만대를 넘어섰습니다. 선진국 수준의 차량을 생산하게 되면서 점차 대량수출의 기회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동차의 수입제한이 국산 자동차 수출시 통상 마찰 요인으로 작용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수입제한을 풀기로 결정했습니다. 국내외의 여건이 변화하고 국내 자동차산업의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수입제한을 해제하고 경쟁력을 강화하도록 장려하는 게 장기적인 수준에서 바람직하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수입 자유화는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는데, 1986년에 특장차, 1987년에 일반버스 및 트럭과 중대형 승용차의 규제가 풀렸고, 1988년 4월 1일부터 전 차종에 대한 수입자유화를 실시했습니다. 다만 경쟁력이 충분하지 않고, 대일 무역역조가 심한 완성차 및 부품은 수입선 다변화 품목으로 지정하여 수입선을 미국, 서유럽 등으로 전환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수입자유화가 실시되자 두 달 뒤인 6월 22일까지 2백26대의 차량이 수입되었습니다.

    수입자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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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8
    현대자동차 독자적 기술로
    중형차량 뉴 쏘나타 출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88년:현대자동차 독자적 기술로 중형차량 뉴 쏘나타 출시

    뉴쏘나타
    뉴쏘나타

    1984년 초부터 현대자동차는 수출 전략형 독자적 중형차인 Y2카를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존 모델인 스텔라와는 다르게 전륜구동 방식의 중형차로 개발된 이 차량은 여러 최종 차명 중에서 뉴 쏘나타를 최종적으로 선택했고, 1988년에 출시되었습니다. 기존 쏘나타는 비록 실패한 차량이었지만 쏘나타 차명이 딜러들이 부르기 쉬운 이름이라며 선호했기 때문에 차명을 다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실패한 차명을 다시 사용한다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지만 뉴 쏘나타는 국내외에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현대에서 출시된 자동차는 이전까지 직선적인 외관을 가진 것이 특징이었지만 이 차량은 공기저항계수 0.34인 공기역학적 구조로 변화되었습니다. 1.8L와 2.0L의 시리우스 엔진을 장착한 뉴 쏘나타는 부드러운 곡선의 차체와 편한 운전감을 장점으로 내세웠고, 대우 로얄 프린스와 기아 콩고드 등의 경쟁 차종에 비해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였습니다. 1993년 5월에 Y3카로 개발된 쏘나타II가 출시되기까지 뉴 쏘나타는 55만 2천 443대를 생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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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8
    기아기술센터(KTC) 설립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88년:기아기술센터(KTC) 설립

    1988년 말에 기아자동차는 기초연구부문의 발전을 위해 기아기술센터(KTC)를 설립했습니다. 기초연구부문은 기술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투자비용이 높고 투자/회수 기간이 너무 길기 때문에 그 나라의 과학기술 수준이 낮거나 업체 규모가 작으면 쉽사리 참여하기 어려운 분야였습니다. 주요 다국적기업들 대부분이 이 부문을 자회사에게 허용하지 않은 것도, 우리나라 자동차 업체들이 지금까지 이 부문에 투자하지 못한 것도 이 까닭이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마북리 연구소를 설립하여 국내 최초로 기초연구부문에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에 뒤따라 기아자동차와 대우자동차도 기초연구부문에 인력을 투입했습니다. 기아자동차는 기아기술센터를 설립하고, 대우자동차는 기술연구소 내에 엔진연구실을 설치하여 각자 기초연구부문의 발전을 위해 힘썼습니다. 이후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은 엔진을 포함한 모든 부문에서 기술자립을 목표로 개발체제를 정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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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8
    한국자동차공업협회
    (현 한국자동차산업협회) 설립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88년:한국자동차공업협회(현 한국자동차산업협회) 설립

    1988년 9월, 현대, 기아, 대우 등 주요 자동차 업체를 중심으로 '한국자동차공업협회(Korea Automobile Manufacturers Association; KAMA)가 설립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은 지속적인 성장을 이뤄왔고, 1980년대 중반엔 미국시장 진출에도 성공했습니다. 국내 자동차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기술력이 증대되면서 수입자유화가 추진되는 등 국내 시장에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민주화 운동의 여파로 노사분규가 발생하는 등의 사회적인 문제와 더불어 원화절상 압력, 통살 마찰 조짐 등의 국내외적 여건 변동 때문에 자동차 업계는 민간차원의 자율적이고 체계적인 대응을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협회는 창립 이후 국내 자동차산업의 경쟁력 향상과 선진화를 위해 정부 관계부처 및 관련기관에 대한 정책건의 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해 왔습니다. 아울러 2012년에 한국자동차산업협회로 사명을 변경하였습니다. 국제협력 및 통상사업, 교통안전사업, 소비자보호사업, 산업조사사업, 전이사업 등을 수행하며 국내외의 자동차산업과 관련한 여러 현안들을 대응해나가고 있습니다.

    관련단체로는 1962년 4월에 발족한 한국자동차산업협동조합이 있습니다. 이 조합은 국내 자동차 부품산업의 육성과 지원을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한국자동차공업협회 설립 기념식
    한국자동차공업협회 설립 기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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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
    자동차업계 최초로
    해외 현지생산 사업 시작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89년:자동차업계 최초로 해외 현지생산 사업 시작

    1989년 3월에 기아자동차는 대만에서 현지생산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에서 추진된 최초의 해외 현지생산 사업은 현대의 캐나다 브로몽 공장이었지만, 실제로 현지생산이 시작된 것은 기아자동차보다 4개월 늦은 1989년 7월이었습니다. 비록 기아자동차가 현대자동차보다 늦게 추진되었지만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였기 때문에 빠른 생산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기아자동차는 KD수출(부품을 수출하여 현지에서 조립)이라는 새로운 시스템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현지의 관세장벽을 우회하면서 수출량을 늘리려는 전략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지 생산규모가 작은 편이었고, 관세로 인한 수입 장벽이 높고 일본세가 강한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을 주요 타겟으로 삼았습니다.

    국내 자동차업체들이 현지생산을 강화한 목적은 저마다 다르지만, 현지의 수입 장벽을 우회하거나 시장을 선점하려는 목적은 공통됐습니다. 대우자동차의 경우 1990년대 중반 이후에 현지화 전략을 대폭 강화했는데, 이는 좁은 국내시장에서 벗어나 서유럽시장 등에 우회수출을 노리려는 목적이 더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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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
    자동차 제조업에 대한
    합리화업종 지정 해제로 인한
    신규참여 업체 등장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89년:자동차 제조업에 대한 합리화업종 지정 해제로 인한 신규참여 업체 등장

    1989년 7월 1일부터 자동차 제조업에 대한 합리화업종 지정이 해제되면서 다양한 업체들이 자동차 산업에 신규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자동차산업에 뛰어든 업체는 대우조선이었습니다. 대우자동차는 1983년 이후 대우가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었지만 GM과 협의에 난항을 겪는 중이었습니다. 1980년대 말 개도국 진출을 염두에 두고 경차 개발을 계획하던 대우자동차는 경차의 생산을 대우조선에게 맡기기로 했습니다.

    다음으론 현대정공이 참여했습니다. 당시 현대정공 매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던 컨테이너 사업은 후발국들이 성장으로 어려움을 겪는 중이었습니다.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4륜 구동형의 지프를 생산하기로 한 현대정공은 합리화 업종지정이 해제되자 그룹 차원에서 이를 신규 사업의 하나로 승인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동차 생산은 당시 현대정공의 정몽구 사장의 승인으로 강력하게 추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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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
    현대자동차,
    미국 전역에 대한
    부품서비스체계 구축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89년:현대자동차, 미국 전역에 대한 부품서비스체계 구축

    1989년 5월에 현대자동차는 캘리포니아주 온타리오시에 서부지역 부품 공급센터를 설립하고 뉴저지주에 동부지역 부품센터, 조지아주에 남부지역 부품센터, 일리노이주에 중부지역 부품센터를 설립하며 미국 전역에 걸친 부품 서비스체계를 구축했습니다. 미국 지역 판매를 현지 협력업체가 담당하는 대우자동차, 기아자동차와 다르게 직접 판매와 A/S를 진행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990년에는 오리건주 포틀랜드 항에 현대자동차 전용 자동차하역장을 준공하여 중서부지역 딜러들에게 신속하게 제품을 공급할 수 있는 인프라를 제공했습니다. 또한 1988년는 278개였던 딜러망은 지속적으로 확충되어 1991년 말에는 526개로 늘렸습니다. 초기에 딜러 수가 줄었던 중부지역을 집중적으로 강화하여 126개로 늘리면서 현대자동차는 미국 전 지역에서 완벽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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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
    쌍용자동차,
    독일 벤츠와 기술제휴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1년:쌍용자동차, 독일 벤츠와 기술제휴

    쌍용자동차는 닛산과의 기술제휴가 만료되고 더 이상의 연장이 어려워지자 1991년에 독일의 벤츠와. 소형상용차 부문의 기술제휴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1992년 10월에는 전 차종에 대한 기술협력으로 확대하였고, 11월에는 벤츠가 쌍용의 지분 중 5%를 갖는 자본협력을 체결했습니다. 벤츠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쌍용은 소형상용차에 이어 지프와 세단까지 승용차 전 부문을 아우르는 제품군을 확보하게 되며 국내 자동차 시장의 신흥 강자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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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0
    중소기업 기술선진화
    육성사업 실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0년:중소기업 기술선진화 육성사업 실시

    1990년에 상공부는 '중소기업 기술선진화 업체 육성사업 추진요령'에 의해 5백85개의 희망업체를 접수했습니다. 그리고 매출액의 5% 이상을 연구개발비로 투자하는 등 기본요건을 갖춘 업체 1백20개를 선정했습니다. 그 중 89개사의 자동차 부품업체가 선정되어 1990년부터 1997년까지 많은 지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중소기업 육성정책은 우리나라 산업전반의 기술수준 선진화가 목표였습니다. 중소기업청장이 정한 요령에 의해 발굴된 중소기업들을 대상으로 유관기술지도 기관이 합동하여 기술 지도를 실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망 선진기술기업으로 선정된 중소기업의 경우, 가능한 모든 정책 지원 제도를 활용하여 3년간 집중적인 지원을 실시하였고, 기준을 넘어서면 졸업시켰습니다. 자동차 부품업체의 경우 1990년에 26개사, 1991년에는 11개사, 1992년에는 9개사 등 1997년 까지 총 78개사가 유망 선진기술기업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러한 중소기업 기술선진화 사업은 2000년대 선진 사업사회 진입을 대비한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금전적으로만 지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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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0
    현대자동차 준중형급차량
    엘란트라 출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0년:현대자동차 준중형급차량 엘란트라 출시

    엘란트라

    1990년 10월에 현대자동차는 스텔라의 대체 차종인 엘란트라를 출시했습니다. 이 차량은 프로젝트명 J로 개발하기 시작했고, 4,100억 원의 개발비와 4년의 개발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이 차량은 소형급과 중형급 사이의 포지션에 자리를 잡아 준중형급 차량 시장을 넓혔습니다.

    이전까지 현대자동차는 조르제토 쥬지아로의 영향 하에서 차량 디자인을 해왔지만, 엘란트라는 독자적인 디자인의 차량이었습니다. 개발 무렵부터 차종간 플랫폼을 공유하였고, 그랜저(L)와 쏘나타(Y2)에서 앞축 맥퍼슨 스트럿과 후축 토션 빔의 서스펜션을 이어받았습니다. 이를 통해 현대자동차는 독자 개발 차량을 출시하는 것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출시 초기 시장 반응은 조용했지만 차츰 인기 차종으로 자리 잡아 1992년과 1993년에 우리나라 최다 판매 차량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엘란트라'라는 차명은 프랑스어로 '열정'을 뜻하는 'Elan'과 영어로 '수송'이나 '운송'을 뜻하는 'Tansport'의 약자인 'Tra'의 합성어입니다. 현재 엘란트라는 국내에선 자취를 감춘 것처럼 보이지만 해외에선 아반떼와 i30의 수출명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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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0
    현대자동차,
    국내 최초 쿠페카 스쿠프 출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0년:현대자동차, 국내 최초 쿠페카 스쿠프 출시

    1990년 2월 20일, 현대자동차는 '스포츠 루킹카' 또는 '스포츠 패션카'라는 타이틀을 내세운 스쿠프를 출시하였습니다. 이 차량은 우리나라 최초의 쿠페 자동차였습니다. 쿠페 자동차란 2도어 2인승의 차체가 낮은 차량을 뜻하는데, 이 차량의 이름은 Sports와 Coupe의 합성으로, 특종을 의미하는 Scoop와 동음이기도 합니다. 이 차량은 방송을 통해 PPL로 노출되어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스쿠프는 미쓰비시 오리온 엔진을 개선한 직렬 4기통 1.5L 97마력 유닛을 얹었고 최고시속 174km, 제로백 12.1초의 성능을 보였습니다. 이 성능은 외국의 다른 스포츠 쿠페에 비하면 좋은 성능은 아니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1991년 4월에 고유 설계의 1.5L 12밸브 102마력 알파 엔진과 자체 트랜스미션을 얹은 스쿠프 알파를 선보였고, 같은 해 10월에 터보 엔진을 얹은 차량을 선보이며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갔습니다. 특히 국내 첫 휘발유 터보 엔진을 장착한 스쿠프 터보는 129마력으로, 시속 205km, 제로백 9.18초로를 기록해 국내 최초로 시속 200km, 제로백 10초의 벽을 허물었습니다.

    이 차량은 1995년 6월까지 생산되었고, 1996년 4월에 아반떼(J2)를 베이스로 한 상위 등급의 스포츠 쿠페 차량인 티뷰론이 출시되었습니다.

    스쿠프
    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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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0
    현대·대우자동차의
    동유럽 시장 진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0년:현대·대우자동차의 동유럽 시장 진출

    1990년 2월, 현대는 러시아에 렌터카 33대를 시험 수출한 뒤 3월에 322대를 선적하며 동유럽 진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7월에는 러시아, 헝가리, 폴란드 등으로 확대했습니다. 동유럽에 진출한 첫 해에 유고 8,309대, 헝가리 426대, 폴란드 600대, 러시아에 100대 등 1만대에 가까운 수출을 달성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서유럽과 미국시장의 성공을 바탕으로 동유럽 시장에 안착했습니다. 그동안 동유럽은 서유럽이나 북미지역과는 다른 경쟁 제품의 특성을 가지고 닫혀 있던 시장이었기 때문에, 현대자동차의 진출은 새로운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대우자동차 역시 현대자동차를 뒤따라 동유럽시장에 진출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 우즈벡, 러시아 등 동유럽 주요국에 수출량을 늘려온 대우자동차는 나중에는 현지생산으로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루마니아와 폴란드에서는 1996년 봄부터 씨에로 등을 생산했고, 체코에서는 트럭, 우즈벡에서는 씨에로와 경차 생산에 들어갔습니다. 또한 러시아에서도 에스페로 등을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듯 국내 자동차 업계는 북미와 서유럽을 넘어서 동유럽까지 진출하면서 그 저력을 과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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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0
    자동차부품연구원 설립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0년:자동차부품연구원 설립

    자동차부품연구원 현판식
    자동차부품연구원 전경

    1990년 8월에 한국 자동차부품 종합기술연구소가 설립되었습니다. 1994년 4월에 자동차부품연구원으로 명칭을 변경한 이 연구소는 자동차부품업계의 기술개발 능력제고, 자동차부품의 품질 향상, 기술 인력의 양성 등을 촉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정부는 완성차업체 5개, 자동차 부품업계의 공동 출원으로 민간 생산기술 연구소 설립을 허가했습니다. 자동차부품연구원은 자동차 부품기술 연구를 통해서 국내 자동차산업의 기술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연구개발 중심체로서의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또한 산업부와 기술표준원의 지원 아래 자동차부품 신뢰성평가센터 구축사업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1992년 12월부터 10년 동안 G-7 차세대 자동차 기술개발사업을 통하여 저공해 분야, 안전도 분야 및 전기자동차 분야 등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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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
    현대자동차 알파엔진 및
    자동변속기 자체 개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1년:현대자동차 알파엔진 및 자동변속기 자체 개발

    현대자동차는 일본 미쓰비시사로부터 엔진기술을 제공받아 왔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에 마북리 연구소 폐쇄에 대한 협상 결렬이 계기가 되어 현대자동차는 독립적으로 엔진 개발에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엔진 구조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에 당시 엔진 개발자들은 외국 엔진을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연구해야만 했습니다. 수많은 실패 끝에 현대자동차는 1991년에 국내 최초로 소형 알파 엔진을 독자 개발할 수 있었습니다.

    알파엔진은 영국의 엔지니어링 전문업체인 리카드로와 협력하여 개발되었습니다. 이 엔진은 자연흡기식과 터보차저식 두 종류로 개발되었는데, 3밸브 방식에 노크 컨트롤 시스템이 적용되었습니다. 알파엔진과 자동변속기의 설계에는 자체 개발한 최적화 프로그램을 사용한 CAD/CAE기술이 적용되었습니다.

    알파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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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
    기아자동차 서울대학교 산학
    합동 알코올 자동차 개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1년:기아자동차 서울대학교 산학 합동 알코올 자동차 개발

    1991년 6월에 기아자동차는 서울대학교와 산학 합동으로 7년 6개월 동안 개발한 알코올자동차를 선보였습니다. 이 알코올자동차는 베스타 M-85와 콩고드 M-100 두 종류였습니다. M-85는 메탄올 85%에 휘발유 15%를 혼합연료로 사용하였고, M-100은 메탄올만을 연료로 사용하였습니다.

    알코올을 연료로 사용할 경우 연소실과 연료탱크와 같은 곳에 부식이 생길 우려가 있어, 특수 재질로 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M-100의 경우, 알코올만을 연료로 하기 때문에 저온에서 시동이 잘 걸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동 시에는 휘발유가 공급되는 2중 연료 시스템을 채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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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
    현대자동차 전기1호차 개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1년:현대자동차 전기1호차 개발

    전기자동차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휘발유나 경유 등의 연료로 엔진을 움직이지 않고 전기로 모터를 돌려 움직이는 차를 뜻합니다. 배출가스가 전혀 발생하지 않는 무공해 자동차입니다. 이 자동차는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일반 자동차보다 먼저 개발되었지만 기술적인 한계로 실용화되진 못했습니다. 그리고 1991년에 환경 규제의 강화로 전 세계적인 전기차 개발 붐이 일어나자 국내 자동차업계도 전기차 개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현대자동차는 1991년 11월에 쏘나타를 베이스로 전기1호차를 개발했습니다. 최고속도 60km/h에 최대 주행거리 70km의 이 차량은 1년 11개월의 연구기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리고 1년 뒤 1992년에는 납축전지와 컴퓨터 제어장치를 적용해서 전자제어 면에서 많은 성능개선이 이루어진 2호차를 개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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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
    기아자동차 경승용차용 엔진과
    중형차용 엔진 개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1년:기아자동차 경승용차용 엔진과 중형차용 엔진 개발

    H1엔진
    PA엔진

    기아자동차는 1991년 10월 12일에 순수 자체기술로 경승용차 엔진과 중형차용 엔진을 개발했습니다. 경승용차용 PA엔진은 배기량 800cc급 3기통 9밸브형이었고, 중형차용 DOHC엔진인 H1엔진은 2,400cc급이었습니다. 3년 6개월의 개발 기간과 각각 2백억 원, 2백50억 원의 개발비가 투입되었습니다. 이중 중형차용 H1엔진은 도쿄모터쇼에 출품되기도 했습니다.

    기아는 경승용차용 PA엔진을 장착한 차량을 1993년 도쿄모터쇼에서 M카란 이름으로 공개했으나, 티코와 맞붙기에는 경제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개발을 중단했습니다. 이 차량은 훗날 모닝이란 이름으로 다시 등장했습니다. 또한 H1 엔진을 적용하기로 했던 T카는 1992년 4월에 마쓰다 루체를 베이스로 하고 포텐샤란 이름으로 출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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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
    대우조선,
    경승용차 티코·경밴 다마스 출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1년:대우조선, 경승용차 티코·경밴 다마스 출시

    티코

    1989년 7월 1일,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가 해제되었습니다. 신규업체의 참여와 생산차종 확대가 자유로워지면서 신규업체들이 자동차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대우조선 또한 경자동차 생산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1983년 이후 GM과의 협의에 어려움을 느끼던 대우자동차는 1980년대 말 개도국 진출을 위해 경자동차 개발 전략을 세우면서 대우조선에 프로젝트를 일임했습니다. 대우조선 또한 이 당시 조선 경기의 부진으로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대우자동차와 대우조선의 고민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결정이었습니다. GM측은 반발했지만, GM이 경자동차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1991년 5월, 대우조선은 경차 티코를 출시했고, 11월에 경밴 다마스를 출시했습니다.

    티코는 스즈키의 경차 알토를 베이스로 개발되었습니다. 직렬 3기통 796cc 엔진이 장착되었고 3단 자동변속기, 4단 수동변속기, 5단 수동변속기가 달린 모델이 출시되었습니다.

    정부는 1995년에 경차 지원책을 내놓았고, 그 영향을 받아 티코는 내수판매 3위를 기록했습니다. 또한 90년대 자동차 유머에 주로 활용되면서 친근한 이미지로 소비자에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1998년에 후속 차종인 마티즈가 출시되었지만, 티코는 단종 되지 않고 병행 생산되었고 3년 후인 2001년에 단종 되었습니다.

    한편, 다마스는 스즈키 에브리(DA형)을 베이스로 제작된 차량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가솔린 엔진만 적용되었으나 1993년 4월 12일에 LPG 엔진이 추가되었고, 추후엔 LPG 엔진만 장착되었습니다. 2인승 밴, 5인승 코치, 7인승 코치의 3가지 종류로 개발되었으며, 5인승 코치는 2열 의자를 접어 2인승 벤처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2013년 1월에 한국GM은 우리나라의 배기가스 규제를 맞추기에 애로사항이 많아 경트럭 라보와 함께 다마스 또한 단종 시킬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소상공 업계의 생산 재개 요청이 끊이지 않아 라보와 함께 2014년 7월 21일 사전 계약을 시작, 2014년 8월 중순부터 다시 생산라인을 가동했습니다.

    다마스
    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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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
    현대자동차, 대형 상용 버스
    에어로시티 520 출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1년:현대자동차, 대형 상용 버스 에어로시티 520 출시

    1991년 2월, 현대자동차는 전·후륜휠 8핀 형식의 대형 상용 버스 자동차인 현대 에어로시티 520을 출시했습니다. 이 차는 미쓰비시 후소의 에어로스타 K를 베이스로 하여 제작된 차량이었습니다. 당시 도시형 버스는 대우버스 NEW BS106 뉴로얄시티, 초저상버스는 대우버스 NEW BS110 뉴로얄논스텝, 한국 화이바 프리머스 등이 시판되고 있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에어로시티 520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버스 라인업을 구축했습니다. 도시표준형인 520L, 520과 520L보다 지상고가 낮은 도시저상형 520SL, 업무용, 시외직행/일반형, 시내좌석형인 540, 도시표준형인 540L, 540과 540L보다 지상고가 낮은 도시저상형 540SL 등이 1991년에 출시되었습니다.

    에어로시티 520은 540보다 전장이 약 20cm 짧은 저출력형 모델로 외관은 540과 동일했습니다. 업무용, 시외직행/일반형이 520에 해당됩니다. 이 차량은 1994년 말, 540시리즈와 함께 부분 변경되어 자가용으로 소수 판매되었습니다. 이 차량은 국방부와 치안본부(현 경찰청)에 공식 납품되어 병력/경력 수송버스로도 많이 이용되었습니다.

    에어로버스
    에어로시티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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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
    기아자동차,
    LA디자인스튜디오 설립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1년:기아자동차, LA디자인스튜디오 설립

    LA 디자인연구소 전경
    LA 디자인연구소

    1989년 미국 디트로이트에 신기술개발과 관련하여 기술연구소를 설립한 기아자동차는 1991년에는 LA에 디자인스튜디오를 설립했습니다. 국내 독자 모델 개발이 증가하고 수출이 본격화되면서 해외 연구개발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자동차 디자인 연구에 관한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1990년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에 현대디자인센터를 설립하여 기아보다 1년 먼저 자동차 디자인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1994년에 기아는 엔진 등 주요 부품 및 차세대 자동차, 신소재 등을 연구하기 위해 일본연구소를 세웠고, 1995년에는 유럽지역에 대한 자동차 인증 대응과 부품개발 및 첨단기술 연구를 위해 유럽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기아자동차 LA디자인 스튜디오는 2003년에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2003 북미국제오토쇼에서 크로스오버 SUV 콘셉트카인 KCD-1 슬라이스(Slice)를 공개하는 등 혁신적인 디자인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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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
    자동차업계 공동 발전을
    위해 X-5 프로젝트 계획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2년:자동차업계 공동 발전을 위해 X-5 프로젝트 계획

    1992년 10월, 자동차업계는 공동의 발전전략을 마련하여 X-5 프로젝트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자동차공업발전 민간협의회를 통해 정부의 지원을 건의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자동차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중장기 발전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로젝트는 2000년까지 3년씩 3단계로 나누어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1단계(1992~1994년)는 생산능력을 확대하여 양적 성장을 이루고 기술을 자립하는 것이 중심이 되었고, 2단계(1995~1997년)는 도약기로서 품질 등 질적 수준의 향상을 통하여 안정적인 수출기반을 확립하였습니다. 3단계(1998~2000년)에는 자동차 산업이 우리나라 수출을 선도하는 주력산업이 될 수 있도록 해외 현지생산 등을 통해 산업을 국제화 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러한 전개방향 아래 각 분야별, 단계별로 추진목표를 설정했습니다. 생산능력과 생산 목표는 1단계에 280만대와 191만대, 2단계에는 340만대와 249만대, 3단계에는 400만대와 320만대로 각각 설정했습니다. 수출은 1단계에 61만대, 2단계 87만대, 3단계에는 120만대를 달성한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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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
    기아자동차 태양광자동차 개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2년:기아자동차 태양광자동차 개발

    기아와 현대자동차는 자동차산업과 관련한 대체에너지 개발을 위해 무공해자동차, 태양광자동차 등의 프로젝트를 추진하였습니다. 기아자동차는 1992년 말에 1993년 대전 엑스포에 출품할 목적으로 태양광 자동차 '컨소울'을 개발했습니다. 한편, 현대자동차는 2년 뒤인 1994년에 1인승 경주용 태양광자동차를 개발했습니다.

    이 태양광 자동차는 1993년 11월 호주에서 열린 월드 솔라카 랠리에도 참가했습니다. 아쉽게도 경기경험 부족, 배터리와 태양광 셀의 효율 부족 등으로 평균 34km/h의 속력에 그치고 말아, 납 배터리 부문 3위, 전체 28위의 순위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3,013km를 완주하여 우리나라 기술력을 외국에 알리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태양광자동차
    태양광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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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
    현대자동차 알코올자동차 개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2년:현대자동차 알코올자동차 개발

    1992년 1월에 현대자동차는 알코올자동차를 개발하였습니다. 이 차량은 무연휘발유 75%에 알코올 25%을 혼합해서 사용했고, 알코올에 의향 차량 부식과 누유 등을 방지하기 위해서 연료계통에 특수재료를 사용하였습니다.

    1992년 5월에 브라질에 알코올자동차를 수출한 현대자동차는 개발공로를 인정받아 1992년 장영실 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또한 이 차량은 미국 캘리포니아의 까다로운 배기가스규제를 만족시켰고, 카뷰레터식 전자제어 연료분사식 DOHC에도 적용 가능하도록 개발되어 현대자동차의 기술이 선진국에 뒤쳐지지 않는 수준임을 증명했습니다.

    현대알코올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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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
    현대자동차, 포항공대와
    공동연구로 무인자동차 개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2년:현대자동차, 포항공대와 공동연구로 무인자동차 개발

    1992년 11월에 현대자동차는 포항공대 로보틱스 팀과 협력하여 무인자동차를 개발했습니다. 이 차량은 센서를 통해 차량의 위치, 속도를 감지하여 출발, 가속, 회전, 정지 기능을 자동으로 수행 가능했습니다.

    1년 4개월 동안 2억 원의 연구비가 투입된 이 무인자동차는 순수 국내기술로 개발되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이 차량의 개발을 통해 도로조건이 가장 험한 가속내구도 시험도로 주행과 주행시험을 자동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대 무인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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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
    현대자동차,
    가변연료자동차(FFV) 개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2년:현대자동차, 가변연료자동차(FFV) 개발

    현대자동차는 1992년 6월 17일에 가변연료자동차(FFV, Flexible Fuel Vehicle)을 국내 최초로 개발하였습니다. 가변연료자동차란 가솔린과 메탄올을 자유자재로 혼합할 수 있는 저공해 차량을 의미합니다. FFV는 현재 세계적으로 개발되고 있는 저공해차 가운데 가장 빨리 실용화될 수 있는 차량으로, 현대자동차는 가변연료자동차를 개발하면서 에너지 대체 시장에 새 길을 열었습니다.

    이 차량은 가솔린과 메탄올을 어떤 비율로도 혼합해서 사용할 수 있었고, 메탄올의 연소효율이 뛰어나 같은 배기량의 가솔린 전용차량보다 출력이 5% 정도 뛰어났습니다. 또한 옥탄가(octane number)가 높아 노킹(knocking) 현상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1996년부터 연차적으로 수입물량의 25%, 48%, 73%, 96% 이상을 저공해 차량으로 의무화하는 미국의 규정에 대비해 1987년 6월에 FFV의 개발에 착수하였고, 50억 원의 개발비가 투입되었습니다.

    현대자동차 가변연료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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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
    현대자동차, 납축전지와
    컴퓨터 제어장치 적용된
    전기2호차 개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2년:현대자동차, 납축전지와 컴퓨터 제어장치 적용된 전기2호차 개발

    1991년 환경 규제가 강화되면서 자동차업계에서는 전기차 개발 붐이 일었습니다. 현대자동차 또한 이러한 시류에 편승했는데, 1991년 11월에 개발한 전기1호차는 성능이 매우 미흡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여 1992년 6월에 개발된 엑셀 전기2호차는 납축전지와 컴퓨터 제어장치를 적용해서 전기1호차보다 충전시간이나 전자제어면에서 많은 성능개선을 이뤄냈습니다. 1회 충전으로 100km를 주행할 수 있었고 최고 시속도 100km에 달했습니다. 이 차량은 다음 해에 동시 발매된 3,4호차의 성능 개선과 실용화의 발판이 되었고, 이후 장거리 운행이 가능한 가변연료식 하이브리드 전기자동차 개발에 초석이 되었습니다.

    현대자동차 전기2호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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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
    기아자동차, 순수 국내 기술로
    2.7리터급 디젤엔진 개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2년:기아자동차, 순수 국내 기술로 2.7리터급 디젤엔진 개발

    기아자동차는 1992년 10월에 2.7리터급 디젤엔진인 JS엔진의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개발기간에는 4년 5개월이 소요되었고, 220여 대의 시제품을 만들어 약 15만 시간에 이르는 내구시험을 실시한 결과였습니다. 순수 국내 기술로 만들어졌음에도 당시 새로 개발된 동급의 닛산엔진보다 모든 면에서 우수한 제품이었습니다. 독자기술 개발 분야에 대한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JS엔진은 1992년 5월 26일에 과학기술처의 장영실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기아자동차가 JS엔진을 개발하게 된 배경에는 정부의 배기가스 규제강화가 있었습니다. 정부의 규제 수준에 맞는 엔진이 필요했기에 기아자동차는 기존의 엔진을 개선하는 방향을 잡았습니다. 추진과정에서 내부기술을 통해 독자개발하기로 방향이 바뀐 JS엔진은 당시 향상되던 우리나라 자동차산업기술을 증명하는 성과를 이뤄냈습니다.

    2.7리터급 디젤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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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
    GM, 대우와의
    합작관계 종료로 사업 철수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2년:GM, 대우와의 합작관계 종료로 사업 철수

    1971년에 신진자동차공업(주)과 GM이 공동출자로 GM코리아를 설립하면서 20년 가까이 이어진 두 업체의 관계는 1992년에 끝을 맺었습니다. GM과의 합작관계 청산으로 대우자동차는 100% 대우그룹 출자회사가 되었고, 그 이후로 독자 모델 개발과 해외 진출에 더욱 박차를 가했습니다. 동구권과 아시아를 중심으로 완성차 조립 공장을 짓고 라노스, 누비라, 레간자 등 3개 모델을 동시에 개발했습니다.

    대우사태 등으로 영업력이 약화되면서 대우자동차는 1999년 8월에 대우 계열사들과 함께 동반 워크아웃을 맞이했고, 2000년 11월에는 법정관리(정리절차) 개시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대우자동차는 GM으로의 매각을 전제로 9992억 원이 자구계획을 마련해 구조조정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2001년 9월에 GM과 매각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2002년 4월에 신설법인 설립에 대한 최종계약을 체결했습니다. 2003년 4월, 대우자동차는 GM대우오토앤테크놀로지로 상호를 변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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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
    삼성중공업,
    대형상용차 생산 참여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2년:삼성중공업, 대형상용차 생산 참여

    삼성중공업의 대형상용차 생산참여

    1992년 6월, 삼성중공업이 상공부에 기술도입 신고서를 제출하면서 자동차산업에 신규진입을 추진했습니다. 1980년대 들어 자동차사업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던 삼성그룹은 합리화업종지정 해제를 계기로 1990년 이후 두 번에 걸쳐 대형상용차 부문에 대한 신규참여를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1993년부터는 승용차부문 진입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대형상용차 부문은 1990년 10월, 상공부에 기술도입 신고서가 제출되면서 공식화되었지만 신고서 수리 여부를 두고 찬반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중복 과잉투자의 유발, 국산화 및 부품산업의 발전, 기술개발의 지연, 경쟁력 제고 등이 주요 이슈였습니다. 이러한 찬반 논쟁은 신고서 제출 훨씬 이전부터 문제시되어 왔습니다. 당시는 건설경기 과열에 따라 정부의 진정책 추진으로 대형상용차의 주문적체가 크게 줄어든 데다 신규 계약이 큰 감소세를 나타냈고, 한편으로 해약률은 점차 높아지고 기존업체들은 생산능력을 크게 늘린 상태였습니다.

    1992년 7월 4일에 드디어 상공부가 기술도입을 인가함으로써 삼성중공업의 대형상용차부문 참여가 결정되었습니다. 삼성중공업은 닛산의 디젤 기술을 도입하여 대형상용차 개발에 착수했고, 1994년 5월에 첫 제품인 15톤 덤프트럭을 출시하고 7월에는 11.5톤 카고 트럭을 내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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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2000
    전기자동차 개발을 목표로
    HAN 프로젝트 추진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1992~2000년:전기자동차 개발을 목표로 HAN 프로젝트 추진

    선진국의 공해 및 안전규제에 대한 중요성이 대두되자, 자동차업계는 수출 경쟁력을 갖춘 차세대 자동차 개발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이때 추진된 HAN 프로젝트는 차세대 자동차의 자체개발에 필요한 핵심 기반 기술과 무공해(ZEV)의 전기자동차 개발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HAN 프로젝트는 자동차 5사 및 부품업체, 자동차부품연구원 및 정부출연 연구소, 서울대학교 등 공동으로 참여하도록 할 계획이었고, 구체적인 개발 내용은 수소엔진, CNG엔진, 린번 엔진 등의 저공해 엔진과 고안전 차체, 저소음 저진동 차체, 지능형 현가 및 조향장치 등의 첨단 차체, 무단변속기 등 차세대 수송기계와 부품에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전기자동차 개발과 관련된 고성능 전기기술, 경량 모터 및 제어기술, 전기자동차 시스템 설계기술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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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2002
    G7 프로젝트 추진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1992~2002년:G7 프로젝트 추진

    1992년에 정부는 자동차 부품의 기술개발 지원을 위해서 G7 프로젝트를 추진했습니다. G7 프로젝트는 2000년 과학기술을 선진 7개국 수준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이를 뒷받침할 11개 핵심 원천 기술개발 사업을 지원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11개 핵심 원천 기술은 차세대 반도체, 신의약·신농약, 신기능 생물소재, 정보·전자·에너지 첨단소재, 광대역 종합정보통신망, 고선명 TV, 첨단생산시스템, 차세대 자동차, 환경공학기술, 신에너지기술, 차세대 원자로기술을 뜻합니다.

    G7프로젝트는 2002년에 종료되고 이에 이어서 핵심기반기술 개발 사업이 2004년부터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자동차 부품 산업과 관련된 사업은 총 18개로, 2006년까지 1단계 기간에 집중적으로 지원되었으며, 이외에도 37개 유망부품에 대한 기술개발이 지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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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3
    X-5 프로젝트 계획 발표를 통한
    자동차 3사 세계10위권
    진입 목표 설정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3년:X-5 프로젝트 계획 발표를 통한 자동차 3사 세계10위권 진입 목표 설정

    1993년 말에 자동차업계가 X-5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서 자체 발전계획을 수립하면서 주요 3사는 세계 10위권 진입을 목표로 설정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9개의 완성차 업체가 있었는데, 그중 주요 3사는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대우자동차를 일컬었습니다. 이들은 2000년까지 국내외 2백만 대 안팎의 연간 생산체제를 갖춰 세계 10위권에 진입하는 경영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그래서 3사는 GT-10 발전계획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게 되었습니다.

    자동차업계는 자동차 산업의 발전을 위해 핵심기술 습득, 독자기술 확보, 응용기술 확보를 주요 과제로 설정했습니다. 핵심기술 습득을 위해서 독자모델 확보와 핵심부품 국산화를 추진했고, 독자기술 확보를 위해서 모델 다양화와 전기자동차 개발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응용기술 확보를 위해서 전자제어시스템 국산화와 첨단기능자동차 개발 등을 추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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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3
    현대자동차,
    전기자동차3,4호차 개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3년:현대자동차, 전기자동차3,4호차 개발

    1991년 환경규제가 강화되면서 자동차업계에 전기차 개발 붐이 일었습니다. 1991년 11월에 현대자동차는 쏘나타 전기 1호차를 개발했고, 1992년에 성능을 개선하여 엑셀 전기2호차를 개발했습니다. 그리고 1993년에는 쏘나타 전기3호차와 스쿠프 전기4호차를 개발했습니다.

    전기3호차의 경우 이전 제품에 비하여 배터리와 모터가 향상되었고 컴퓨터 제어장치가 적용되어 1회 충전 시 최대 주행거리 120km, 최고속력 130km/h를 기록하여 1회 충전 주행거리와 최고속력이 20%이상 개선되었습니다. 전기4호차의 경우 특수합금으로 만든 부품을 사용하여 중량을 줄이는 방법으로 1회 충전 시 최대 주행거리 140km, 최고속력 120km/h를 기록했습니다.

    1995년에 현대는 전기자동차 시리즈를 개발하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1998년부터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시행할 예정인 전기자동차 의무판매규정에 대응할 수 있는 기술기반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전기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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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3
    쌍용자동차, SUV 무쏘 출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3년:쌍용자동차, SUV 무쏘 출시

    무쏘
    무쏘

    1993년 8월에 쌍용자동차는 SUV 자동차 무쏘를 출시했습니다. '무쏘'라는 이름은 코뿔소를 뜻하는 순 우리말 '무소'를 경음화한 표현입니다. 하지만 스페인어로 musso가 여성을 비하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스페인어권 국가에서는 코란도 훼미리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습니다.

    차량 디자인은 돌고래를 모티브로 제작되었는데, 영국의 RCA(Royal College Of Art)의 켄 그린리 교수가 총괄했고, 엔진은 메르세데스-벤츠에서 직수입한 2.9L 디젤엔진을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전자식 파트타임 4륜구동 시스템과 5단 수동변속기는 보그워너의 시스템을 적용했습니다.

    당시 SUV차량의 컨셉은 박스형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쌍용자동차는 'SUV는 투박하다'는 개념을 뒤엎어 직선과 곡선이 조화를 이룬 세련된 컨셉의 디자인을 선보였습니다. 덕분에 국내외에서 많은 관심을 받아 1994년에는 우수 디자인상, 1994년과 1996년에는 영국 버밍엄 모터쇼에서 4륜구동 부문 오토 디자인상을 수상하였습니다.

    2005년 6월에 후속 차종인 카이런이 출시되며 단종되었고, 무쏘 스포츠는 2006년 4월에 후속 차종인 액티언 스포츠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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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3
    기아자동차,
    SUV 스포티지 출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3년:기아자동차, SUV 스포티지 출시

    스포티지

    1993년 7월에 기아자동차는 소형 SUV인 스포티지를 출시했습니다. 스포티지라는 이름은 스포츠(sports)와 대중(mass), 명품(Prestige)의 합성어입니다. 이 차량은 1991년 10월에 도쿄 모터쇼에서 세피아와 함께 처음 발표되었습니다.

    처음에는 5도어 차량만 출시되었지만 1996년 1월 19일에 트렁크룸을 늘린 롱바디 사양으로 그랜드와 2도어가 추가되었습니다. 1997년 8월 23일에는 그랜드를 기본으로 한 벤 사양 자동차 빅밴이 출시되었습니다. 이 차량은 베스타와 같은 2.2L HW디젤엔진을 사용하였는데, 1995년 7월 1일에 2.0L 터보 인터쿨러 디젤엔진으로 대체하였습니다.

    미국에서는 1997년과 1998년에 2년 연속으로 가장 값진 차로 선정되는 등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제품이었습니다. 기아자동차 일본 법인을 통해 일본에도 20대 정도 수출되었지만 우리나라 경제위기로 인해 본격적인 수출은 하지 못하고 철수했습니다. 엔진과 섀시 등은 군용차 K-131과 민수용 차량인 레토나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출시되기 전인 1993년 1월에 파리-다카르 랠리에 2대가 출전하였는데, 1대는 중도 탈락하고 1대는 완주하는 성적을 냈습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2000년과 2001년 파리-다카르 랠리에는 T3(완전 개조 부문)로 출전해 공식 완주하였습니다.

    1세대 스포티지는 2002년 9월에 단종되었지만 내수 시장인 우리나라보다 해외에서 높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도심형 SUV라는 컨셉은 토요타 RAV4, 혼다CR-V에도 영향을 주었을 만큼 시장을 선도한 차량이었습니다. 1세대는 비록 단종되었지만 그 이후로 후속차량이 계속 출시되어 판매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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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3~1996
    현대자동차,
    배기가스 배출량 30% 이상 낮춘
    디젤엔진 독자 개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3~1996년:현대자동차, 배기가스 배출량 30% 이상 낮춘 디젤엔진 독자 개발

    현대자동차 저공해디젤엔진

    알파 엔진을 독자기술로 개발한 현대자동차 마북리 연구소는 '기술자립 10년 계획'을 수립하여 후속 엔진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베타엔진, 감마엔진 등을 개발하던 현대자동차는 1996년 2월에 배기가스 배출량을 30% 이상 낮춘 디젤엔진을 개발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1993년부터 80억 원의 개발비를 투자하여 15종의 디젤엔진을 개발했습니다. 이 엔진들은 연소능력을 개선시키기 위해서 연료분사와 공기흡입에 관련한 첨단 기술을 적용하여 당시 강화된 배출가스 규제치보다 25%이상 공해배출량이 적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이 기술을 1996년 6월 상용차 전 차종에 적용해서 배출가스 규제에 대한 문제점을 해소했습니다. 이러한 기술들의 독자개발을 통해 국내 자동차업계는 기술자립의 기반을 단단히 다져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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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
    자동차부품산업의
    발전전략(XC-5 프로젝트)
    수립 발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4년:자동차부품산업의 발전전략(XC-5 프로젝트) 수립 발표

    XC-5 프로젝트 연구개발
    XC-5 프로젝트 연구개발

    1994년 12월, 상공자원부는 자동차부품산업의 발전전략을 수립해 발표했습니다. 이는 부품산업의 경쟁력을 완성차 수준을 넘어서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995년 2월에 세부 추진계획을 확정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1992년 10월에 발표된 X-5 프로젝트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어서, 사업명도 XC-5로 지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국산 소형차의 미국 시장 진출 성공과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양적 성장으로 인해 완성차 부문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기반이 되는 부품산업은 상대적으로 열세인 상황이었습니다. 1980년대 말 미국시장의 판매 부진은 이와 같은 부품산업의 뒤떨어진 경쟁력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상공자원부는 자동차부품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자동차부품산업 발전전략 프로젝트를 수립한 것입니다. 이 전략의 기본방향은 공급기반을 확충하고, 품질경쟁력을 제고하며, 기술을 자립화하고, 부품을 공용화하고, 하청구조를 개선함과 더불어 산업구조를 선진화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X-5프로젝트를 뒷받침하는 것을 정책목표로 정하고, 2000년 생산액 25조원, 수출 30억 달러를 사업목표로 설정했습니다.

    상공자원부는 XC-5프로젝트를 3단계로 나눠서 진행했습니다. 1단계 기간인 1994년에는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제도 정비 등 여건 조성, 2단계부터는 가격 및 품질경쟁력 강화를 위한 생산체제 및 개발능력 정비, A/S부품의 공급체계 개선에 집중했습니다, 3단계에서는 독자 생산체제 구축, 독자 기술개발능력 확보, 국제화 기반 구축 등에 중점을 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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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
    1가구 2차량에 대한
    중과세제 도입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4년:1가구 2차량에 대한 중과세제 도입

    1989년의 특소세 5%포인트 인하를 제외하면 우리나라의 자동차세제는 점차 강화되는 추세였습니다. 1994년에는 1가구 2차량에 대한 중과세제가 도입되었는데, 취득세와 등록세가 각각 2배씩 부과되는 제도였습니다. 다만 경차의 경우에는 1996년부터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에는 교통세 인상 등의 조치를 통해 자동차관련 세수는 빠르게 늘었습니다. 1992년에 국세 및 지방세수의 13%를 차지하던 자동차관련 세수는 1994년에는 15.4%, 1997년에는 17.2%까지 빠르게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행정자치부는 도입 4년만인 1998년 8월에 중과세제를 폐지하였습니다. 이는 맞벌이부부와 자영업자 등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법인이 대도시에서 본점이나 주사무소용 부동산을 취득할 경우 취득세를 5배로 물리던 조항도 경제난 극복을 이유로 삭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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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
    현대자동차,
    1인승 경주용 태양광자동차 개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4년:현대자동차, 1인승 경주용 태양광자동차 개발

    무공해자동차와 대체에너지에 대한 개발은 90년대 자동차 산업계에 중요한 화두였습니다. 기아와 현대는 이를 위해서 태양광자동차 개발을 추진했는데, 기아의 경우 1992년 말에, 현대는 1994년에 태양광자동차를 개발했습니다. 기아자동차가 개발한 태양광자동차는 1993년 호주 월드 솔라카 대회에 참여하여 그 우수함을 뽐내기도 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3륜구동의 1인승 경주용 태양광자동차를 개발, 발표했습니다. 태양광 자동차에는 태양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변환하는 태양전지가 필요했는데, 이 차량에 장착된 태양전지는 에너지 변환효율 17%의 고성능 제품이었습니다. 차체의 무게도 180kg 밖에 되지 않는 초경량이었고 최고 시속은 120km에 달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이 차를 1995년 제1회 서울모터쇼와 8월 일본 태양광 자동차 경주대회, 1996년 호주 세계 자동차 경주대회에 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1993년 5월부터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울산공장 승용제품개발연구소에서 개발된 이 차량은 10명의 전담 연구원을 투입했고 총 7억 원의 개발비를 투자해서 자체개발에 성공했습니다.

    경기용태양광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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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
    현대자동차,
    니켈/메탈 수소배터리 자동차 개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4년:현대자동차, 니켈/메탈 수소배터리 자동차 개발

    니켈수소자동차

    현대자동차는 1991년 11월에 미국 오보닉 배터리사와 차세대 첨단 배터리 공동개발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92년 5월에 니켈/메탈 수소전지 개발계약을 체결했습니다. 2년 후인 1994년 5월에 현대자동차는 오보닉 배터리사와 공동으로 최고시속 130km의 니켈/메탈 수소 배터리 자동차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1회 충전에 필요한 시간은 3시간이었는데, 주행 가능거리는 240km에 달했습니다. 니켈/메탈 수소전지가 가지고 있는 특성 덕분에 당시 납축전지를 장착한 전기자동차보다 두 배 이상 성능이 뛰어났습니다.

    니켈/메탈 수소전지는 100% 무공해 제품이었고, 기존 배터리보다 2배 이상의 에너지 밀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이 전지를 가벼운 강화 플라스틱 차체에 장착할 경우 시속 200km를 낼 수 있으며, 1회 충전 시 400km가 주행 가능하다고 밝혔습니다. 현대자동차는 니켈/메탈 수소전지 개발에 이어 전기자동차용 모터와 컨트롤러, 전지급속 충전기를 개발하여 전기자동차의 실용화를 앞당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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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
    대우자동차,
    압축천연가스(CNG) 자동차 개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4년:대우자동차, 압축천연가스(CNG) 자동차 개발

    1994년에 대우자동차는 압축천연가스(CNC) 자동차를 개발하였습니다. 이 차량은 94년 7월 8일에 서울 힐튼호텔에서 발표회를 가지면서 공개되었습니다. 대우 NGV II (Natural Gas Vehicle)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 차량은 에스페로 1.6을 기본 모델로 하여 제작되었습니다. 총 21억의 개발비와 1년 7개월의 개발기간이 소요된 차량이었습니다.

    이 차량의 1회 충전 주행거리는 400km에 달했고 최고 속도는 시속 170km에 육박하여 휘발유 차량에 뒤지지 않는 성능을 자랑했습니다. 또한 탄화수소나 일산화탄소, 질소산화물 등의 배기가스는 가솔린 엔진에 비해 50% 이상 적었습니다. 당시 세계 자동차산업의 목표였던 저공해·무공해 차량에 부합하는 친환경 자동차였던 셈입니다. 이 압축천연버스 기술은 현재 천연가스버스에 적용되어 운행되고 있습니다.

    대우자동차 압축천연가스자동차
    대우자동차 압축천연가스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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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
    현대자동차,
    수소 연료전지자동차 개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4년:현대자동차, 수소 연료전지자동차 개발

    현대자동차는 1994년 10월에 서울대학교와 산학 공동연구로 수소 연료전지자동차를 개발했습니다. 1991년부터 시작된 이 연구는 3년 10개월의 개발기간과 30억 원의 개발비가 소요되었습니다. 국책과제인 G-7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개발된 전기자동차와 함께 추진된 수소 연료전지자동차 개발에는 1993년부터 현대가 주관기관으로 참여해 왔습니다.

    기존의 엑센트 차체에 DOHC 수소연료엔진을 탑재한 이 차량은 수소연료를 실린더 내에 직접 분사시킬 수 있는 전자제어 연료공급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 기술을 통해 기존 가솔린 엔진과 비슷한 수준의 높은 출력을 달성했습니다. 배기가스 배출량 또한 1마일 주행에 탄화수소 0.013g, 일산화탄소 0.03g, 진소산화물 0.04g에 불과해서 미 캘리포니아 주의 초저공해자동차 규제치를 밑도는 수치를 나타냈습니다.

    당시에 수소 연료전지자동차는 제너럴 모터스를 비롯한 미국의 3대 자동차회사와 일본의 닛산과 마쓰다, 독일의 BMW와 벤츠사만이 개발한 최첨단 자동차였습니다. 현대의 수소 연료전지자동차 개발은 국내 자동차 업계의 기술력을 증명하는 사건이었습니다.

    현대 수소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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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
    기아자동차,
    1.8DOHC엔진 독자 개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4년:기아자동차, 1.8DOHC엔진 독자 개발

    1994년에 기아자동차는 국내 최초로 가솔린엔진 'T8D 엔진'을 독자적으로 개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것은 배기량 1천8백cc, DOHC 16밸브 가솔린 엔진이었습니다. 이 엔진은 1990년 5월부터 개발에 착수했고, 설계, 엔진성능 내구실험, 차량탑재테스트 및 양산설비 과정까지 4년 5개월의 개발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순수개발비 5백억 원 등, 총 1천3백억 원이 투입된 사업이었습니다.

    출력은 1백37마력이었고, 다중연료분사(MPI) 방식을 사용해서 1997년부터 강화되는 미국의 북미 환경규제를 충족시킬 수 있었습니다. 또한 20만km까지 보증 가능한 훌륭한 엔진이었습니다. 고강성 알루미늄 오일 팬을 적용해서 소음과 진동을 대폭 줄였고 전자제어 자동공회전 제어장치와 유압식 밸브 간극 자동조정장치를 사용하는 등 각종 첨단기술을 집약했습니다.

    기아DOHC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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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
    대우자동차
    전기자동차 DEV2 제작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4년:대우자동차 전기자동차 DEV2 제작

    1991년 환경규제가 강화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전기차 개발 붐이 일었습니다. 대우자동차는 1993년 2월부터 부평연구소에서 13명의 연구진으로 구성된 전기자동차 연구개발팀을 운영했습니다. 1993년 12월에 르망 전기자동차 DEV1(Daewoo Electric Vehicle)을 처음 내놓은 대우자동차는 1994년에 에스페로를 기반으로 한 DEV2를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1995년에는 알루미늄차체의 전기자동차를, 1996년에는 씨에로를 기반으로 한 DEV4를 개발했습니다.

    DEV4의 최고출력은 95마력이었고 최대속도는 시속 120km이었습니다. 고성능 납산축전지를 사용했고, 1회 충전으로 300km 주행이 가능했습니다. 충전 시간은 220V의 가정용 전원 사용 시 6시간이었고, 외부 급속 충전기 사용 시 15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후 개발된 DEV5는 알루미늄 차체에 강화플라스틱을 덮은 모델로, 고성능 니켈메탈 수소전지를 사용했고, 1회 충전으로 250km 주행이 가능했습니다.

    대우자동차의 DEV시리즈는 후에 라노스와 누비라 전기자동차를 개발하는데 보탬이 되었습니다.

    대우 전기자동차 DEV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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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
    현대자동차,
    100% 독자기술로 개발한
    소형차 엑센트 출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4년:현대자동차, 100% 독자기술로 개발한 소형차 엑센트 출시

    엑센트
    엑센트

    1994년 4월에 현대자동차는 소형차 엑센트를 출시하였습니다. 이 차량은 모든 제품을 100% 독자기술로 개발한 차량이었습니다. 엑센트는 영어로 '강세', '강조'라는 뜻을 가졌을 뿐 아니라 '신기술로 자동차의 신기원을 창조하는 신세대 자동차(Advanced Compact Car of Epoch-making New Technology)'의 약자이기도 했습니다. 이 차량은 엑셀의 후속 차종으로 개발되었는데, 올 라운드 클린바디와 개성 있는 바디 컬러를 선보였습니다.

    이전까지 현대자동차는 미쓰비시 자동차 공업에 로열티를 제공하며 차량을 판매했지만, 이 차량은 100% 독자기술로 개발되어 로열티의 부담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또한 부품의 85% 이상을 재사용할 수 있도록 리사이클 기술이 적용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소형차 최초로 ABS와 에어백이 선택사양으로 적용되었고, 개선된 1.3L 알파 엔진과 1.5L SOHC 알파 엔진을 장착해 엑셀에 비해서 성능을 높였습니다.

    이 차량을 개발하기 위해서 총 3,500억 원의 개발비가 투자되었고, 4년 4개월의 개발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차체는 물론 엔진, 변속기, 섀시장치까지 완전히 독자기술에 의해 개발된 첫 번째 제품이었고 앞으로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는 제품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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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
    현대자동차,
    국내 최초 100만대 생산규모 달성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4년:현대자동차, 국내 최초 100만대 생산규모 달성

    현대자동차는 1994년 11월에 국내 업계 최초로 100만대 생산규모를 달성했습니다. 당시 현대의 국내 전체 생산규모는 113만 4,611대였고, 그 중 승용차가 89만 6,592대, 버스가 9만 5,160대, 트럭이 13만 8,682대, 특장차가 4,177대였습니다.

    1970년대 말에 포니를 생산하면서 현대는 급속도로 성장하였지만 이때는 아직 자동차 산업 기반이 자리를 잡기 전이라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중·후반은 현대의 성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현대는 캐나다 판매가 급증하고 미국 진출에 성공했으며 내수시장에서도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였습니다. 또한 합리화조치 해제로 중소형 상용차 생산 재개가 이루어지면서 종합 자동차업체로서 확실한 체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1989년에 미국시장의 부진으로 수출이 급감하였기에 1985~1988년 사이가 가장 성장 폭이 컸던 시기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기간의 자동차생산 증가율은 1985~1989년 사이의 연평균 증가율 34.3%보다 훨씬 높은 46.4%였습니다.

    현대가 이렇게 단기간에 100만대 생산규모를 달성한 것은 후발 개도국 업체로서는 전례가 없는 고유모델 개발전략을 과감히 추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발 빠른 해외시장 진입으로 수요 창출에 성공한 것이 성장 비결이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1994년의 현대자동차는 일본 마쓰다와 스즈끼에 이어 세계 13위의 자동차 메이커로 올라서게 되는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현대자동차 100만대 생산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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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
    경차 보급 촉진방안 발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5년:경차 보급 촉진방안 발표

    1995년 6월에 정부는 '경차 보급 촉진방안'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는 경승용차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정책이었습니다.

    경승용차는 1991년에 출시되었지만 수요가 매우 저조했습니다. 첫해에 3만 1,783대에 불과했던 판매대수는 이듬해에 6만대까지 늘어났지만, 1994년까지 지속적으로 감소했습니다. 경차는 자원 및 유류절약에 도움이 되는데다가 도로정체 해소에도 도움이 되었기에 정부는 경차를 보급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국내에는 경승용차에 대한 지원이 거의 없었습니다. 구매할 때 특별 소비세가 면제되고 자동차세가 낮았지만 누진세율이 적용되었기에 실직적인 지원은 매우 적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운행 및 유지단계에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경차 보급 촉진방안'을 내놓았습니다.

    ‘경차 보급 촉진 방안’은 등록·유지단계에서의 비용절감을 위해 등록세, 면허세, 채권 매입액을 각각 인하하고 1가구 2차량 중과세 대상에서 제외시키며 종합 및 책임보험료, 고속도로 통행료, 공영 주차료를 각각 인하해주는 정책이었습니다. 그리고 개구리 주차(인도와 차도에 걸쳐서 주차하는 것)를 허용하고 운전면허 시험용 차량으로 인정하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1995년 하반기부터 우리나라 경승용차의 수요는 증가세로 돌아섰고, 1996년부터는 급증세를 나타냈습니다.

    당시 경차의 규격은 배기량 800c 미만, 전폭 1.5m 미만, 전장 3.5m 미만으로 정해져 있었으나, 2008년 1월부터 경차의 규격을 배기량 1,000cc 미만, 전폭 1.6m 미만, 전장 3.6m 이하로 확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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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
    서유럽 시장에 경유(디젤)차량
    연간 30만대 이상 수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5년:서유럽 시장에 경유(디젤)차량 연간 30만대 이상 수출

    1995년에 우리나라는 경유차의 비중이 높은 서유럽 시장에 연간 30만대 이상의 경유차를 수출하게 되었습니다. 서유럽시장에 경유 승용차를 수출하기 위해선 국내 시장여건의 조성이 선결되어야 했습니다. 수출되는 경유 차량의 국내 판매를 허용하지 않으면 통상 마찰이 초래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대형 차량을 많이 보유하고 있어서 이로 인한 대기환경 오염 문제가 대두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경유 차량에서 많이 배출되는 질소산화물(NOx)은 매우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었습니다.

    그래서 1990년대 중반부터 경유 차량에 대한 배출가스 규제가 강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90년대 말에는 질소산화물(NOx)을 제외하면 휘발유 자동차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규제되었습니다. 그리고 2002년부터 적용된 배출가스 허용 기준은 세계최고 수준으로 강화되는 결과가 초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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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
    현대자동차,
    압축천연가스 자동차 개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5년:현대자동차, 압축천연가스 자동차 개발

    1995년 1월, 현대자동차는 초저공해 압축천연가스(CNG-Compressed Natural Gas)자동차를 개발했습니다. CNG란 메탄을 주성분으로 하는 여러 연소성 가스의 혼합체를 일컫습니다. 액체로 변하는 온도가 매우 낮아서 2400~3600psi의 높은 압력으로 압축해야하기에 천연 압축가스라고 부릅니다.

    현대자동차의 압축천연가스 자동차는 엑센트 차체에 고압의 천연가스 저장용기와 압력조정기, 다중연료분사식 연료공급 시스템, 천연가스용 촉매 등을 장착하여 가솔린 차량과 동등한 수준의 출력과 속도를 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1회 주입으로 400km 가량을 주행 가능했습니다.

    규제가 엄격한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1997년 기준 배기가스 규제(ULEV)를 만족했고,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실시된 8만km 도로주행 테스트도 성공적으로 통과하며 내구성을 입증했습니다. 서울모터쇼에서 시범운행을 선보인 이 차량은 훗날 천연가스버스 기술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현대 초저공해 압축천연가스CNG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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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
    현대자동차,
    가변연료식 전기자동차 개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5년:현대자동차, 가변연료식 전기자동차 개발

    현대 전기자동차 FGV-1
    현대 전기자동차 FGV-1

    1995년 4월에 현대자동차는 전기자동차에 보조동력엔진을 장착하여 장거리운행이 가능한 저공해 하이브리드(가변연료) 전기자동차 FGV-1을 개발했습니다. 이 차량에는 자동항법장치와 태양전지 등이 장착되어 있었고, 차세대 니켈 메탈 수소전지와 보조동력원을 사용하여 독자 개발한 8백cc 가솔린 엔진이 탑재되어 있었습니다.

    FGV-1은 차량 주행 중에도 계속 전기를 충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40km/h 정속 주행 시에 배터리만으로는 197km를 주행할 수 있었으며, 휘발유 엔진과 병용하면 810km까지 주행할 수 있었습니다. 최고 속력은 152km/h였고 제로백은 13초였습니다. 5인승 스포츠 왜건형인 이 차량은 강화플라스틱으로 차체를 경량화하여 주행거리를 늘렸습니다. 이 차량은 후에 출시되는 하이브리드 차량 개발의 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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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
    현대자동차,
    첨단 무단변속자동차 개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5년:현대자동차, 첨단 무단변속자동차 개발

    현대 무단변속자동차

    1995년 1월, 현대자동차는 무단변속자동차를 개발했습니다. 엑센트 차체에 무단변속기를 장착한 이 차량은 기존 자동변속자동차에 비해서 변속 충격이 전혀 없었고, 주행조건에 맞춰 엔진을 최적화시켰기에 연비와 가속성능을 10%이상 향상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존 자동변속자동차가 제로백까지 12.3초가 걸리는데 비해 무단변속자동차는 제로백까지 10.8초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무단변속기가 작고 가벼워서 차량의 무게를 줄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저소음 금속벨트를 차용해서 소음도 거의 없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이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2년 10개월 동안 15억 원의 연구비를 투입했습니다. 당시 무단변속기 독자기술을 가진 업체는 미국 포드, 일본 닛산과 스바루, 스웨덴 볼보, 이탈리아 피아트 등 일부 업체 뿐이었기에 더욱 값진 성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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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
    현대자동차,
    중형급 베타 엔진 개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5년:현대자동차, 중형급 베타 엔진 개발

    기술자립 10년 계획'을 수립한 현대자동차 마북리 연구소는 알파 엔진 개발로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1995년에 중형급 베타 엔진을 개발했습니다. 4기통 가솔린 엔진인 중형급 베타 엔진은 티뷰론과 아반떼에 가장 먼저 쓰였습니다. 그리고 2001년 출시된 베타2는 신형 아반떼와 투스카니에 사용되었습니다.

    이 엔진은 고성능 DOHC 가솔린 엔진이었습니다. 연비와 성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협각밸브구조, 고압축비화, 신개념 흡기포트인 텀블포트, 노킹 제어장치 등 다양한 최신기술을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소음억제를 위해 엔진을 고강성화하고 구동계의 경량화, 동력계의 강성화, 진동분리 등의 기술을 사용했습니다. 배기량에 따라 3종류의 엔진으로 개발되었는데, 저비용형 차량을 위한 1.6l형, 실용형 차량을 위한 1.8l형, 고성능 차량을 위한 2.0l형이 그것이었습니다. 이 엔진은 1995년에 제48주 장영실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이 엔진을 시작으로 현대자동차는 1997년 입실론 엔진, 1998년 델타엔진, 1999년 오메가 엔진 등의 개발에 잇달아 성공해 세계적인 기술력을 과시했습니다.

    현대자동차 베타엔진
    현대자동차 베타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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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
    삼성-닛산 기술 제휴,
    삼성자동차 설립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5년:삼성-닛산 기술 제휴, 삼성자동차 설립

    삼성승용차
    삼성승용차 기술제휴

    1994년 4월 28일에 삼성은 닛산과의 생산기술 제휴와 관련된 기술도입신고서를 제출했습니다. 12월 5일에 통산부 차관이 접수하며 삼성-닛산 간 승용차 생산기술 제휴가 체결되었고 1994년 12월 7일에 삼성의 승용차부문에 대한 신규진출이 결정되었습니다. 이것은 2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의 결과였습니다.

    삼성중공업은 1995년 3월에 자본금 1천억 원을 투자하여 삼성자동차를 설립하였습니다. 1995년 4월 말에는 1997년 상반기 준공을 목표로 승용차 공장 건설에 들어갔습니다. 이 공장은 부산 신호공단에 부지 55만평, 건평 20만 3천 평 규모로 착공되었습니다.

    삼성자동차는 투자계획과 생산 및 판매계획도 발표하였습니다. 승용차 사업계획은 1998년 1월부터 중대형급을 6만 5천대 규모로 생산하여 1999년에는 소형급, 2003년에는 독자모델 개발을 추진하는 것이었습니다. 초기년도의 부품국산화는 중소형급 80%, 대형급은 70%를 각각 계획했습니다.

    1998년 생산 및 판매계획의 첫 해 목표는 1998년에 6만 5천대를 생산하여 국내시장에서 4만 5천대, 수출시장에서 2만대를 판매하는 것이었습니다. 2000년에는 28만 5천대를 생산하고 수출비율 40%를 달성하는 것이 목표였고, 2002년에는 50만대를 생산하여 55%의 수출비율을 달성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이를 위하여 삼성은 2002년까지 총 4조 3천억 원을 투자하여 연산 50만대 규모의 생산체제를 구축한다는 투자전략도 확정 발표하였습니다.

    설립 후 3년 뒤인 1998년 4월에 첫 양산모델인 SM5를 출시한 삼성자동차는 IMF외환위기를 맞아 당초 계획과는 다르게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1999년 6월 30일에 누적되는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법정관리 신청에 들어가 2000년 9월에 프랑스의 자동차 회사인 르노에게 인수되어 르노 삼성자동차로 변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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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
    승용차 생산규모 200만대 돌파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5년:승용차 생산규모 200만대 돌파

    국가별 자동차 생산 현황
    국내 차종별 생산 현황

    1995년에 국내 승용차의 생산규모가 200만대를 돌파했습니다. 자동차 생산대수가 252만 6천대에 달하면서 241만 7천대를 생산한 캐나다를 제치고 '세계 5위 자동차 생산국'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장기진흥계획에 따라 1974년에 고유모델 개발을 시작한 뒤로 21년, 1991년에 생산규모 100만대 돌파 이후 4년 만에 달성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은 이러한 양적 기반을 마련하였고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승용차 생산 200만대 달성 추이를 기간별로 살펴보면 1985년에 35.8%를 기록하며 가장 증가율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1980년의 승용차수요가 1979년보다 50%나 급감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실질적인 규모증가는 1980년대 후반에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1996년에는 승용차 생산대수가 226만 5천대를 기록했고, 자동차 전체 생산대수는 281만 3천대를 기록했습니다.

    1990년대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은 여러 호조건과 악조건이 뒤섞이는 속에서 세계5위의 생산규모를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자동차와 승용차의 생산규모가 각각 200만대를 돌파하면서 생산기반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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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
    현대자동차,
    남양 종합기술연구소 설립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5년:현대자동차, 남양 종합기술연구소 설립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 설립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 설립

    1995년에 현대자동차의 종합기술연구소가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에 설립되었습니다. 1986년부터 주행시험장 및 부대시설 공사를 시작으로, 1993년 총 연장 70㎞의 시험로와 70종의 노면을 갖춘 종합주행시험장을 완공하고, 2003년 현대차 울산연구소와 기아차 소하리연구소를 통합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총 103만평 부지에 설계동, 시험동, 연구동, 시작동, 엔진트랜스미션동 등 연건평 2만 5천 평의 시설과 250km까지 주행이 가능한 60만평 규모의 고속주행로, 마찰로 등 첨단 시설 장비를 갖춘 남양 연구소는 세계적인 규모의 연구소입니다. 2015년 현재 약 10,000여 명의 연구원이 차량의 성능과 품질, 친환경 부문을 연구 개발하고 있는 남양 종합기술연구소는 국내 자동차업계 최대 연구조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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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
    국내 최초의 모터쇼
    서울모터쇼 개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5년:국내 최초의 모터쇼 서울모터쇼 개최

    제1회 서울모터쇼 개최
    제1회 서울모터쇼 오픈식

    1995년 5월, 서울 한국종합전시장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모터쇼가 개최되었습니다. 처음 모터쇼를 구상한 것은 1992년이었는데, 이때는 국내 모터쇼를 기획했었습니다. 이후 미국 빅3, 서유럽 업체들을 비롯한 해외 업체들의 요구에 의해 1994년 11월 승용차에 한해 참가를 허용하면서 준 국제 모터쇼로 규모가 커지게 되었습니다. 1980년 후반부터 시작된 자동차대중화와 1994년 세계 자동차 생산 6위국으로 부상한 점 들을 미루어본다면 다소 늦은 감이 있기도 했습니다.

    국내 완성차 업체는 서울모터쇼에 컨셉트카, 승용차, 상용차 등 다양한 전시품을 출품하였고, 해외업체는 승용차에 한해 출품하였습니다. 차종별로는 승용차 131대, 상용차 59대, 이륜차 26대 등 총 126대가 출품되었고, 그 밖에 각종 자동차 부품과 용품 등이 전시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술세미나, 전야제, '어린이 자동차 그림그리기 대회' 등 다채로운 각종 부대행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서울모터쇼는 1995년 이후 2015년 까지 1997년, 1999년, 2002년, 2005년, 2007년, 2009년, 2011년, 2013년, 총 10회가 개최되었으며, 세계자동차 5대 생산국의 위상에 걸맞게 국제적인 자동차 축제로 자리매김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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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
    현대자동차,
    엔진전자제어장치(ECU) 개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6년:현대자동차, 엔진전자제어장치(ECU) 개발

    현대자동차 엔진전자제어장치 ECU
    현대자동차 엔진전자제어장치 ECU

    세계 자동차산업의 동향은 경량화 및 전자화와 관련된 기술개발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또한 이에 대한 자체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진행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1985년부터 엔진을 제어하는 ECU를 비롯한 전자제어장치와 경량소재 개발을 추진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11년의 연구개발 기간, 50여명의 연구인력, 1백억 원의 연구비를 투자해 1996년 2월에 드디어 ECU개발에 성공했습니다. ECU(Engine Control Unit)는 엔진전자제어장치로 공기량, 공기온도, 대기압, 주행속도, 엔진회전수, 엔진온도 등 8가지 입력신호를 종합적으로 분석해서 흡입 공기량을 최적화하고 점화시기를 제어하는 첨단 장치입니다.

    현대자동차는 ECU를 엑센트와 그레이스 등에 장착했고,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혹서지방과 스웨덴 같은 혹한지 및 고지대에서 실험하여 연비, 운전성, 배기가스 부분에서 얼마나 뛰어난 결과가 나오는지 확인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현대자동차는 기술도입 로열티를 절감할 수 있었고, ECU개발 과정에서 20여건의 특허를 등록하는 성과를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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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
    현대자동차,
    음성인식 자동차 개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6년:현대자동차, 음성인식 자동차 개발

    현대장동차 음성인식차

    1996년 2월, 현대자동차는 음성인식 자동차를 국내 처음으로 개발했습니다. 이 차량은 운전자가 마이크에 명령을 내리면 차량에 탑재된 음성인식 장치가 이것을 해석해서 차량제어장치로 전달하는 기술이 적용되어 있었습니다. 차량제어장치는 운전자의 명령에 따라 에어컨, 오디오, 실내등, 비상등, 파워 윈도우, 와이퍼, 트렁크 등 각종 편의장치를 작동하게 하거나 멈추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차량은 엔진, 연료, 배터리, 브레이크액, 엔진오일 등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그리고 안전벨트 미착용, 문을 연 상태에서 주행, 핸드 브레이크가 걸린 상태에서 출발과 같은 상황이 발생할 경우 음성으로 경고하는 기능 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차량을 위해서 현대자동차는 약 5억 원을 투자했고, 1998년 우리나라 특허대전에서 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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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
    현대자동차, 니켈/메탈
    수소전지 및 자체 개발 모터를
    장착한 전기자동차 개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6년:현대자동차, 니켈/메탈 수소전지 및 자체 개발 모터를 장착한 전기자동차 개발

    1996년 3월에 현대자동차는 니켈/메탈 수소전지와 자체 개발한 모터를 장착한 전기자동차를 개발했습니다. 엑센트 차체에 적용한 이 차량은 최고 시속 140km에 한 번 충전으로 390km을 주행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제로백 시간이 15초 밖에 되지 않아 가솔린 엔진 차량과 성능이 비슷했습니다.

    이 차량은 1996년 동아국제마라톤의 기록게시 선도 차량으로 도입되어 선수들이 매연이나 소음에 방해받지 않고 레이스를 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이 엑센트 전기자동차는 1994년 1월부터 미국 오보니 배터리사와 공동으로 개발한 니켈/메탈 수소전지가 장착되어 있었습니다. 이 배터리를 만들기 위해서 현대자동차는 15명의 연구 인력을 투입했고, 약 10억 원을 투입했습니다. 이 차량은 1997년 미국 캘리포니아 대기보전국의 인증을 획득하였는데, 이는 미국 빅3와 혼다에 이어 5번째로 인증된 것이었습니다.

    현대 엑센트 전기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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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
    현대자동차,
    TCU 국내 최초 독자 개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6년:현대자동차, TCU 국내 최초 독자 개발

    경량화 및 전자화는 세계 자동차산업의 기술발전 방향이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이에 발맞춰 1996년에 TCU개발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에 자동 변속기 전자제어 장치인 TCU(Transmission Control Unit)를 국내 최초로 독자 개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를 위해 현대자동차는 무려 7년 동안 20명의 연구 인력과 50억 원의 개발비를 투입해야 했습니다.

    TCU는 차량의 주행속도와 엑셀레이터의 조작 정도, 변속기 오일의 온도 등 9가지 조건을 종합하여 최적의 비율로 자동변속기를 변속시키는 핵심부품입니다. 현대자동차는 TCU를 엑센트에 장착하여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혹서지방과 스웨덴 등의 혹한지, 또한 고지대에서 실험하여 수차례 보완했습니다. 1996년 9월부터 TCU를 양산하기 시작한 현대자동차는 이와 함께 모니터링 시스템, 시뮬레이션 장치 등 총 61건의 특허를 출원하여 경쟁력을 키웠습니다.

    현대자동차 T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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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
    쌍용자동차,
    SUV 코란도 출시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6년:쌍용자동차, SUV 코란도 출시

    쌍용자동차에서 출시된 SUV(Sport Utility Vehicle) 차량 코란도는 199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처음 선을 보였습니다. 1996년 7월에 출시된 이 차량은 1세대 코란도의 디자인을 계승하면서도 현대적인 느낌을 더해 네오 클래식 디자인을 선보였습니다. 처음에는 보그워너제 5단 수동변속기만 장착하였지만 10월에 메르세데스-벤츠제 4단 자동변속기를 추가했습니다.

    메르세데스-벤츠의 2.9L 디젤엔진, 2.3L 디젤엔진, 2.3L 가솔린엔진, 3.2L 가솔린 엔진을 무쏘와 이스타나에 이어 공용으로 사용하였습니다. 1997년 5월에는 경제성을 강조한 2인승 밴이 추가되었고, 이는 5인승 승용차보다 높은 판매율을 보이며 SUV 판매 1위를 거머쥐었습니다. 한때 쌍용자동차가 대우자동차(한국GM의 전신)에 인수되어 대우자동차의 엠블럼을 달고 판매되기도 했습니다.

    2.3L 가솔린 엔진과 3.2L 가솔린 엔진, 2.3L 터보 디젤 엔진, 2.9L 디젤 엔진 등 다양한 엔진들이 장착되어 출시되었지만, 2004년에 배출가스 규정미달로 단종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120마력의 2.9ℓ 터보 인터쿨러 디젤 엔진으로 단일화되었습니다.

    인기가 많던 제품이었지만 현대 투싼과 기아 스포티지 등 승용차 베이스의 SUV가 등장하면서 점차 인기가 줄었고, 2005년에 후속 차종인 액티언이 출시되며 단종되었다가, 2008년 파리 모터쇼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코란도
    코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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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
    자동차 수출 100만대 돌파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6년:자동차 수출 100만대 돌파

    1996년에 우리나라는 자동차 수출 100만대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1975년에 31대 수출로 시작한 우리나라의 자동차 수출이 1996년에 드디어 100만대를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미국 시장 진출이 이루어진 1986년이 분수령이었습니다. 이때, 자동차수출대수가 전년보다 무려 150% 가까이 증가하며 수출량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1989년에 판매가 급락하며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90년대 초반에 시장다변화 전략을 완성하면서 1991년 이후에는 5년 동안 연평균 25.8%씩 수출량을 증가시켰습니다. 기존 수출량이 40만대에 다다른 상황에서 나타난 수치였기에, 초기의 수치와는 의미하는 바가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출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1976년 이후 20년 만에 승용차와 자동차에서 동시 100만대 수출을 이루어낸 우리나라는 높은 연평균 성장률을 20년 동안 보여주면서 우리나라 자동차업계의 저력을 증명하였습니다.

    자동차수출 100만대 돌파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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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
    수입 승용차 판매 현황
    1만대 돌파

    1987~1996년-기술을 혁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다

    1996년:수입 승용차 판매 현황 1만대 돌파

    수입 승용판 판매량 1만대 현황

    1996년 국내 수입승용차 판매량이 1만 315대를 기록하며 1만대 선을 돌파했습니다. 1993년까지 수입승용차 판매실적은 2천대를 밑돌았는데, 1994년부터 빠른 폭으로 증가세를 보였습니다. 1994년에는 3,867대가 판매되며 전년의 거의 2배 수준으로 증가했고, 1995년에는 6천9백대, 1996년에 1만대를 돌파하면서 국내 승용차시장 점유율에서 0.8%를 나타냈습니다.

    수입차가 판매의 증가요인은 자동차 시장 개방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외국산 승용차 구입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퍼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점차 젊은 층을 중심으로 수요가 늘어났습니다. 또한 수입차 업체들이 고가격 정책에서 방향을 바꿔 저가격 모델을 소개하기 시작하면서 조금 더 대중이 쉽게 다다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다양한 요인들 때문에 수입 승용차의 판매가 증가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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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
    차량용 내비게이션 상용화 성공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1997년:차량용 내비게이션 상용화 성공

    현대전자와 쌍용정보통신은 1993년에 업계 최초로 차량용 내비게이션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1997년 1월에 상용화에 성공한 자동차 네비게이션 시스템(CNS-Car Navigaion System)은 자동차용 항법시스템으로 일컬어집니다. 이것은 모니터의 지도를 통해 차량의 위치진행방향 등을 알려주는 장치로 인공위성을 통해 지상의 위치를 파악, 이를 모니터 내 전자지도 상에 나타냄으로써 차량의 위치를 알려주는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정보 송수신이 가능한 것이 특징입니다. 겉보기에는 단순한 모니터로 보이지만 그 안에는 전자수치지도, 위성측지시스템(GPS), 항법소프트웨어 등이 혼합된 첨단 정밀기기입니다.

    1981년 일본 혼다기술연구소가 지도에 현재 위치를 나타내는 항법 시스템을 발표하면서 개발된 차량용 네비게이션은, 오늘날에 이르러 현재에는 주변 차량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필수 기기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차량 내비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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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
    현대자동차, 측면 및
    뒷자리 에어백 및
    승객감지 에어백 시스템 개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1997년:현대자동차, 측면 및 뒷자리 에어백 및 승객감지 에어백 시스템 개발

    현대자동차는 1997년 7월에 국내 최초로 측면 에어백 및 뒷좌석 에어백, 승객감지 에어백 시스템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이 승객감지 에어백 시스템은 조수석이나 뒷자리에 승객이 없을 경우 전자 감응장치가 빈자리의 에어백 작동을 자동으로 방지하는 장치였습니다.

    이는 소비자들의 안전 및 편의장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업체들의 연구개발체제가 정비되어 일궈낸 성과였습니다. 이 외에도 현대자동차는 충돌 시 충격량을 7개 방향으로 분산해 실내공간의 변형을 최소화하는 전방위 안전차체, 안전벨트를 역으로 되감아 승객이 충돌방향으로 이동하는 거리를 최대한 줄여주는 로드 리미터 부착 시트벨트 프리텐셔너, 유리창에 승객의 손 등 이물질이 끼었을 경우 자동으로 정지하는 세이프티 파워 윈도 등 각종 첨단 안전장치를 개발했습니다.

    현대 다이너스티 에어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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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
    현대자동차, 린번엔진 개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1997년:현대자동차, 린번엔진 개발

    1997년에 현대자동차는 연료 소비량을 20~25% 정도 줄인 린번 엔진을 개발했습니다. 기존 엔진이 공기와 연료의 혼합비율이 14.5대 1정도인데 반해 린번 엔진은 22대 1이라는 훨씬 희박한 비율로 연소 효율을 높인 엔진이었습니다.

    기술적으로 엔진 연소실에 2대의 공기 흡입로를 설계했고 이중 한 곳에 여닫을 수 있는 와류성 밸브를 달아 상황에 따라 이 밸브가 공기흡입로 한쪽을 막아 유속이 빠르고 강한 와류를 일으켜 희박한 상태의 연료가 연소되도록 한 것이 비결이었습니다. 가속 등 높은 토크가 필요할 때는 일반 엔진과 같은 연소가 발생했지만, 전체 운전과정 중 대략 60%에서 희박연소를 이루어지게 했습니다. 이로 인해 연비를 절감했을 뿐만 아니라 질소산화물의 배출을 줄여 환경오염을 줄이는 역할도 하게 되었습니다.

    1998년 제19주 장영실상을 수상한 린번 엔진은 엑센트를 시작으로 아반떼와 베르나에 탑재되어 실용화 되었습니다.

    린번엔진
    린번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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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
    현대자동차, 국내 최초
    초저공해 수소자동차 개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1997년:현대자동차, 국내 최초 초저공해 수소자동차 개발

    현대 수소자동차

    1997년 5월에 현대자동차는 첨단수소연료 저장시스템을 적용한 수소자동차의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이 수소자동차는 티뷰론 차체에 2.0 DOHC 수소연료 엔진을 탑재한 것이었습니다. 배기가스량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초저공해차(ULEV) 규제치보다 훨씬 낮은 25%대에 불과하고, 한 번 수소 연료를 충전하면 최대 100km까지 주행이 가능했습니다. 또한 티뷰론 수소자동차는 고체상태의 수소가 엔진 작동 시에만 기체 상태로 분사되는 '수소저장합금'을 수소연료 저장시스템으로 활용하여 안정성을 크게 높였습니다.

    1993년부터 추진된 수소자동차는 전기자동차와 더불어 국책사업 G-7프로젝트의 일환이었습니다. 물을 전기 분해해 무한정 얻을 수 있는 자원인 수소를 이용해 유해배기가스가 거의 없는 차세대 대체 미래자동차를 만드는 일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연구 개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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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
    쌍용자동차,
    충돌 고안전 차체기술
    '프라미드 구조' 도입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1997년:쌍용자동차, 충돌 고안전 차체기술 '프라미드 구조' 도입

    1997년 1월 독일 벤츠와 제휴한 쌍용자동차는 '피라미드 구조'라는 획기적인 안전기술을 도입했습니다. 이 기술은 1997년 10월에 출시된 체어맨에 적용되었습니다.

    '피라미드 구조'란 충돌사고 시 발생하는 대량의 충격에너지를 충격완충 공간에서 완전히 흡수하여 승객석으로 전달되는 충격을 최소화하는 기술입니다. 탑승 공간 도어의 변형을 방지해 탑승자의 안전 뿐 아니라 탈출이 용이하도록 도왔습니다.

    피라미드 구조의 프레임은 정면충돌은 물론 40% 오프셋충돌(차량 충돌 시 차체 전면부위의 일부인 40%만 충돌해 전면부위 전체 충돌 사고보다 단위면적당 2.5배에 달하는 충격 에너지가 발생하는 충돌사고)에도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피라미드 구조 안전기술 도입은 당시 국책사업인 G-7프로젝트의 일환이었고, 이후 쌍용자동차는 이 안전기술을 쌍용자동차 차량 대부분에 적용했습니다.

    쌍용자동차 고안전차체기술
    쌍용자동차 고안전차체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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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
    현대자동차, 입실론 엔진 개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1997년:현대자동차, 입실론 엔진 개발

    현대자동차 입실론엔진
    현대자동차 입실론엔진

    현대자동차는 1997년 4월에 배기량 800cc 및 1,000cc의 입실론 엔진을 독자 개발했습니다. 이 엔진은 자연흡기방식의 4기통 12밸브 SOHC엔진으로 최고출력은 800cc가 51마력, 1,000cc가 59마력이었습니다. 운전 상황에 따라 점화시기와 연료분사가 전자 제어되며 엔진고장 상태를 운전자가 쉽게 알 수 있는 자가진단시스템이 적용되었습니다.

    특히 1,000cc의 경우 시속 100km까지 가속하는 데 15.3초 밖에 걸리지 않는 성능을 자랑했습니다.

    프로젝트 MX를 통해 개발된 경승용차인 '현대 국민차'에 실리게 된 엔진이라 '국민차 엔진'이라고 불리기도 한 이 엔진은 1992년부터 5년 동안 총 580억의 개발비가 투자되었습니다. 이 엔진은 국내 최초로 현대 국민차 내에 적용된 우물 정자 형상의 프레임 엔진룸에 장착되었습니다.

    이렇게 개발된 국민차 엔진이 장착된 경승용차는 1997년 9월에 아토스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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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
    기아자동차,
    직접분사식 디젤엔진 상용화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1997년:기아자동차, 직접분사식 디젤엔진 상용화

    기아자동차는 1997년 12월에 J32.9 LHSDI 직접분사식 디젤엔진을 독자 개발했습니다. 이 엔진은 디젤차량용 고속직접분사방식(HSDI)의 2,900cc급 터보차저인터쿨러 DOHC 디젤엔진으로 J3라고도 불렸습니다.

    J3엔진은 고성능 저연비 실현을 위해 핵심 신기술인 고속직접분사방식을 채택한 청정 엔진입니다. 기아자동차는 1995년부터 개발에 착수하여 3년여의 개발기간을 거쳐 총 1,300억 원의 연구개발비를 투자했습니다. 135마력의 출력을 가진 이 엔진은 동급 국내 최고를 자랑하며 기존 엔진에 비해 20% 이상의 경제성을 실현했습니다. 당시 벤츠의 스프린터, 미쯔비시의 스페이스 기어 엔진보다 앞서는 수준이었습니다. 또한 밸런스 샤프트를 적용해 엔진의 2차 진동을 흡수하며 소음과 진동을 대폭 줄이고 캠샤프트의 벨트구동방식, 고강성 사다리형 프레임, 좌우대칭구조의 실린더 블록 등 저감기술을 대폭 채택해 가솔린 엔진과 대등한 수준의 성능을 구현했습니다.

    이 엔진은 기아자동차의 카니발에 탑재되었고, 디젤엔진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을 불식시키며 기아자동차의 엔진 수준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기아자동차 카니발 J3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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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
    기아자동차와 쌍용자동차 도산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1997년:기아자동차와 쌍용자동차 도산

    1990년대 중반의 한국 자동차업계는 1980년대의 수출과 내수 확대를 경험하며 대대적인 설비확장에 들어갔습니다. 자동차 회사들은 '전 차종 생산체제'를 목표로 사업체를 확장하기 시작했는데, 신규 업체의 진입이 허용되면서 매우 치열한 경쟁이 유발되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에 우리나라는 수출과 내수가 둔화되고 1995년 일본 엔화의 대달러 환율 급락에 비해 고정된 원화가치 때문에 국제경쟁력과 수출 채산성이 대폭 악화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각 자동차업체들은 재고감축을 위해 할인판매, 무이자 할부 판매 등 가격인하 조치를 단행했고 출혈경쟁을 개시했습니다. 그럼에도 원리금 상환 부담의 과중으로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게다가 1997년 한국 금융시장 불안으로 외부 차입에 의존하던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아자동차는 1997년 7월에 도산했습니다. 세 번에 거친 국제경쟁입찰을 통해 1998년 11월에 현대자동차에 인수되었고, 현대자동차는 제품개발, 판매, 부품조달 전 부문에 걸쳐 통합의 시너지 효과를 거둬냈습니다.

    같은 해 11월, 쌍용자동차는 대우자동차에 매각되었습니다. 1990년대 IMF관리체제 시기를 맞으며 쌍용자동차는 1996년부터 자본잠식에 들어가 1997년 말에는 자본금이 –1,509억 원 이 되었습니다. 총 부채 4조 1,972억 원의 93%인 3조 8,403억 원이 차입금이었고, 그 중 66%가 단기 차입금이어서 금융비용 부담이 매우 높았습니다. 1994년부터는 금융비용이 판매액의 24.5%로 영업이익률의 3배에 달해 판매액으로는 부채상황이 불가능해졌고, 이에 쌍용자동차의 매각이 검토되었습니다.

    결국 쌍용자동차는 대우그룹에 매수되었습니다. 당시 대우는 국내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한 SUV 생산부문이 없어서 제품의 다양화와 국내시장 확보를 위해 쌍용자동차를 인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1999년에 대우가 경영위기를 맞게 되면서 쌍용자동차는 대우계열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자동차산업을 지속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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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
    자동차 1,000만 시대 도래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1997년:자동차 1,000만 시대 도래

    1997년 7월 우리나라 자동차 보유대수가 1,000만을 돌파했습니다. 1960년대 자동차보유대수 3만대, 1970년대 12만 8천대, 1980년대 50만대에 불과했지만, 1985년엔 100만대를 돌파하고, 1997년에는 1,000만대를 돌파하게 되었습니다. 37년 동안 333배, 27년 동안 78배가 증가한 셈입니다. 자동차가 도입되면서 우리나라는 연평균 17%대의 증가율을 타나냈습니다.

    자동차 1,000만 시대가 열리자 자동차로 인한 여러 문제들이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유류 사용량의 증대, 대도시와 주변 고속도로의 교통난, 교통사고, 배기가스로 인한 대기오염, 폐기물 처리 등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습니다. 반면에 자동차산업의 발전은 국민경제에 많은 기여를 하기도 했습니다. 생산을 비롯하여 부가가치 창출, 고용 및 수출 증대, 부품산업을 비롯한 기계, 철강, 화학 등 연관 산업의 발전 유발 등 자동차산업의 직간접적인 유발효과가 매우 컸습니다.

    이외에 자동차 보유대수의 증가에 따라 변화한 것으론 교통수단별 여객운송 분담률과 에너지 소비량을 들 수 있습니다. 여객운송 분담률에서 나타난 변화는 버스의 비중이 줄고 승용차의 비중이 커졌다는 것입니다. 버스의 비중은 1980년에 87.4%로 국내 자동차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나 1995년에는 56%로 줄었습니다. 반면 승용차의 비중은 3.5%에서 32.7%로 대폭 늘어났습니다. 에너지 소비 부문은 전체 소비량이 1980~1995년 동안 연 평균 33.54% 증가했는데, 수송부문 사용량은 같은 기간 동안 연평균 44.0%가 늘어났습니다. 최종 에너지 소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살펴보면 1980년 13.0%에서 1995년의 22.6%로 크게 상승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동차 1000만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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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
    자동차 배출가스 규제 강화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1998년:자동차 배출가스 규제 강화

    1998년부터 국내 자동차 배출가스 규제 수준이 미국과 같은 선진국 수준으로 강화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좁은 국토와 높은 인구밀도, 과도한 도시 집중률이 문제가 되어 이전부터 환경문제가 제기되어 왔습니다. 1987년 7월부터 배기가스 정화장치의 부착을 의무화했던 정부는, 소득수준이 높아지고 자동차가 대중화되면서 자동차 배기가스에 대한 규제를 강화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자동차 배출가스 규제 대상은 차종별, 차급별, 연료별 등으로 세분화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이전까지 규제되지 않았던 포름알데히드 등까지 규제를 확대했습니다. 경유차의 경우, 1990년대 중반부터 배출가스 규제가 강화되기 시작했습니다. 1990년대 말에는 질소산화물(NOx)을 제외하면 휘발유 자동차보다 더 엄격하게 규제했습니다. 2002년부터 적용한 배출가스 허용기준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엄한 수준의 배출가스 규제국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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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
    내수 진작을 위한
    자동차세제의 단순화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1998년:내수 진작을 위한 자동차세제의 단순화

    1998년 7월 10일부터 2003년 6월까지 자동차세제가 단순화되었습니다. 이는 내수 진작을 위해 승용차에 대한 특소세에 대한 잠정세율을 적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승용차 특소세는 1999년 7월 말까지 한시적으로 취한 조치였지만 한미 자동차협상에서 이를 연장하기로 합의한 후, 2001년 10월까지 기본세율을 10% 인하했습니다. 또한 배기량이 늘수록 초과금이 늘어나도록 적용되었고, 2002년 8월까지는 기본세율의 절반 수준인 5%, 7.5%, 10%로 각각 인하되어 적용되었습니다.

    2003년 7월부터는 특소세 부과 단계를 기존의 2단계로 축소하였고 세율도 낮추는 방향으로 개편하였습니다. 다만 경승용차는 과거와 동일하게 특소세를 면제하였고 9인승 이상 차량 또한 면제대상에 포함시켰습니다.

    1999년 3월부터는 1가구 2차량에 대한 중과세가 폐지되었고, 자동차세 과세 단계가 7단계에서 5단계로 축소되어 세율이 경감하였습니다. 또한 등록세의 20%가 부과되던 교육세, 취득세의 10%가 부과되던 농어촌 특별세도 폐지되었습니다. 2001년 1월부터는 자동차 면허세가 폐지되었고, 중고차에 대한 자동차세 경감조치도 이루어졌습니다.

    이 밖에도 자동차세 교육세가 지방교육세로 전환되고, 10인승 이하 자동차 분류기준이 변동 됨에 따라 자동차세 인상도 2004년까지 승합차의 세제를 적용, 이후 3년간에 걸쳐 단계적으로 변경하여 2007년부터 승용차와 동일한 세율이 적용되도록 변경했습니다.

    1990년대 말에 IMF가 시작되면서 자동차의 내수판매 부진이 지속되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특별소비세에 잠정세율을 적용, 세율인하를 추진하였습니다.

    자동차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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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
    한미 자동차 협상 타결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1998년:한미 자동차 협상 타결

    1998년 10월 20일에 한미 자동차협상이 타결되었습니다. 한국 자동차시장에서 통상마찰이 시작된 것은 1993년 10월이었습니다. 한미 무역실무회의에서 미국 측이 문제를 제기하며 시작된 마찰은 1994년 말에 미국과 EU의 자동차 업계 및 의회, 정부 관계자들의 참여로 구체화되었습니다.

    1993년 말 이후 미국은 한 해에도 몇 차례씩 자동차 시장에 대해 압력을 넣었습니다. 1995년 한국과 미국 정부 사이에선 자동차 협상이 두 차례 열려 타결되었고, 1997년에도 한국과 미국에서 각각 한 차례씩 협상이 열렸지만 해결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10월 1일에 미국은 우리나라를 우선협상 대상국 관행으로 지정했습니다.

    1998년 5월부터 10월까지 모두 네 차례 협상을 벌인 끝에 드디어 10월 20일, 한미 자동차 협상이 타결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상품에 대한 미국의 보복관세 부과와 미국에 대한 우리나라의 WTO 제소라는 최악의 사태는 피하게 되었습니다.

    1997년 초부터 시작되어 2년 가까이 끌어온 한미 자동차마찰이 끝나게 되면서 우리나라의 자동차시장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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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
    현대자동차, 가솔린
    직접분사(GDI)방식 엔진 개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1998년:현대자동차, 가솔린 직접분사(GDI)방식 엔진 개발

    1998년 1월에 현대자동차는 가솔린 직접분사(GDI) 방식의 엔진을 개발했습니다. 이 엔진은 기존 엔진에 비해 출력이 10% 이상 향상되었고, 휘발유 분사량은 35%나 적어 연비가 30% 가량 향상되었습니다. 4,500cc의 배기량과 최대 출력 260마력의 성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엔진은 1999년 4월에 출시된 에쿠스에 처음으로 적용되었습니다. 에쿠스는 1994년부터 5,200억을 들여 개발된 현대자동차의 최고급 승용차였습니다. 차명 에쿠스는 개선장군의 말, 멋진 마차를 의미합니다.

    당시 현대자동차의 GDI엔진 양산은 미쯔비시, 토요타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였습니다. 8기통 엔진으로서는 세계 최초였기에 현대자동차가 보유한 엔진 기술이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현대자동차 GDI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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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
    압축천연가스(CNG) 버스 개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1998년:압축천연가스(CNG) 버스 개발

    현대자동차 CNG버스

    1998년 7월, 현대자동차는 압축천연가스(CNG)버스를 개발, 제작했습니다. 총 2대가 개발되었는데, 압축천연가스버스는 인천의 시내버스 회사에 공급되어 실제 운행되었고 2000년부터 양산에 들어갔습니다.

    3년 6개월의 개발 시간이 소요된 CNG버스는 천연가스를 고압(200압)으로 압축하여 연료용기에 주입,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매연이 전혀 나오지 않고, 기존의 경유버스에 비해 질소산화물은 40%, 이산화탄소는 20%, 소음은 5%가 낮으며, 경유버스에 비해 24.3%(km당 58원)을 절감할 수 있어, 1대당 연간 연료비를 550여만 원 절약 가능했습니다. 총 배기량은 11,149cc였고, 최고출력은 270마력, 1회 충전 시 300km를 운행 가능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뉴에어로시티, 블루시티 등 압축천연가스 버스를 꾸준히 개발, 테스트를 거쳐 보다 나은 성능, 보다 나은 안정성을 얻고자 노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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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
    현대자동차, V6 델타엔진 개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1998년:현대자동차, V6 델타엔진 개발

    1998년 2월, 현대자동차는 2,500cc급 V6 델타엔진을 독자 개발했습니다. 이 엔진은 V형태의 6기통 엔진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1995년부터 4년 동안 총 1,000억 원의 개발비가 투입되어 제작되었습니다.

    알루미늄 실린더를 적용하였고, 최고출력은 192마력이었습니다. 주행연비가 외국 동급 모델보다 뛰어났고, 엔진무게도 40kg으로 기존엔진에 비해 20%나 가벼웠습니다. 각종 흡읍재와 알루미늄 오일팬을 적용해 변속기와의 결합강성을 높이는 한편 에어컨 파워스티어링 교류발전기를 하나의 벨트로 구동하는 방식을 채택해서 소모성부품의 수명을 대폭 늘렸습니다. 그리고 엔진과 변속기 등을 전자 제어하는 컴퓨터 간 데이터의 다중통신으로 운행조건에 따라 필요한 정보를 신속·정확하게 제어 하도록 했습니다.

    V6 델타엔진의 개발로 현대자동차는 국내에서 최초로 전 차종의 엔진을 독자 엔진으로 갖추게 되었습니다.

    현대자동차 V6 델타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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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
    기아자동차, 밴 카니발 출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1998년:기아자동차, 밴 카니발 출시

    카니발
    카니발

    1998년 2월에 기아자동차는 밴 자동차인 카니발을 출시했습니다. 미니밴 카니발은 2,900cc의 터보 디젤 J3와 2,500cc 6기통 가솔린 KV-6 두 종류로 판매되었습니다. J3 엔진은 직접 분사방식의 16밸브 터보 인터쿨러 엔진으로 최대출력 135마력 최고시속 175km의 성능을 자랑했습니다. KV-6 가솔린 엔진은 헤드와 블록 등 주요 부품이 알루미늄으로 되어 있어 중량을 30% 줄였고 최대출력 175마력에 최고시속 185km라는 놀라운 성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장 코드를 가지고 있어 세부적인 고장 트러블까지 잡을 수 있기 때문에 스캐너만 있어도 어떤 고장이든지 90% 이상 진단 가능했습니다.

    카니발은 미니밴의 교과서로 불리는 크라이슬러 캐러밴과 포드 윈드스타를 집중 벤치마킹해서 만든 제품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미니밴 시대를 열며, 제2의 봉고신화라고 불릴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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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
    대우자동차,
    경승용차 마티즈 출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1998년:대우자동차, 경승용차 마티즈 출시

    마티즈
    마티즈

    1998년 4월에 대우자동차는 경승용차인 마티즈를 출시했습니다. 마티즈는 3기통 796cc 52마력의 엔진을 장착했고, 이탈리아 쥬지아로가 디자인한 깜찍한 디자인이 특징입니다. 1999년에 출시한 2000년형 모델에는 일본 아이찌사와 공동개발한 무단변속기(CVT)를 국내 최초로 장착했고 국산 승용차 중 최상의 공인주행연비(23.8km/L)를 기록했습니다.

    경차 티코로 국민차시대를 열었던 대우가 야심차게 개발한 제품인 마티즈는, 국산 경차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고 평가받습니다. 1998년 4월에 판매하기 시작하여 출시 당해 내수시장 전 차종 1위를 기록했습니다. 출시 이후 1999년 12월까지 내수 16만 5,000여대, 수출 27만 3,000대 등 모두 43만 8,000여대가 팔렸습니다.

    SF영화 트랜스포머:패자의 역습에 오토봇 진영 로봇 중 스키즈로 등장하기도 했던 마티즈는 현재 쉐보레에 인수되어 스파크라는 이름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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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
    현대자동차, 그랜저XG 출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1998년:현대자동차, 그랜저XG 출시

    1998년 9월에 현대자동차는 그랜저 XG를 출시했습니다. 이 차량에는 현대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최첨단 신기술 엔진인 시그마(Σ) 3.0 V6 엔진이 장착되어 있었습니다. 최적의 흡배기계 개발로 연소효율과 흡배기 효율을 향상시켰고, 성능면에서는 최고출력 196마력, 최대 토크 27.2kg.m으로 저속에서 고속까지 전 영역에서 고성능을 실현했습니다.

    그랜저XG에는 5단 듀얼게이트 자동변속기가 적용되었는데, 이것은 국내 최초로 신경망 제어(Neuro Fuzzy) 기술을 접목시킨 제품이었습니다. 스포츠 모드 때 일반 수동 변속기와는 달리 클러치 페달을 밟거나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지 않아도 변속이 가능하여 수동변속기보다 0.5초 이상 변속시간을 단축한 제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랜저XG엔 현대전자에서 개발된 자동항법장치(GPS)가 달려 있었습니다. 이 기기엔 최적경로를 알려주는 자동경로안내기능과 터널 등 위성신호가 수신되지 않는 곳에서도 차량의 항로를 알려주는 자립항법 기능, 차량이 경로를 벗어났을 때 음성으로 이탈을 알려주는 기능 등이 장착되어 있었습니다.

    그랜저XG
    그랜저X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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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
    르노삼성, 중형차 SM5 출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1998년:르노삼성, 중형차 SM5 출시

    SM5

    1998년 3월에 르노삼성자동차는 중형차 SM5를 출시했습니다. 우리나라 자동차 최초로 차명에 숫자를 붙인 자동차인 SM5는 삼성(Samsung Motors)을 뜻하는 SM에 중형급을 상징하는 숫자 5를 결합한 것이었습니다.

    이 차량은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이 창립한 구 삼성자동차가 르노에 인수되어 르노삼성자동차로 새출발하기 전부터 생산된 차종이었습니다. 닛산 맥시마를 베이스로 하여 1998년 4월에 첫 출시되었습니다. 이때는 닛산의 엔진과 부품을 그대로 들여와 사용했는데, 그 중 SM520V에 적용된 2.0L 6기통 VQ20엔진과 SM525V에 적용된 2.5L 6기통 VQ25엔진은 훗날 세계 10대 엔진에 선정될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세련된 디자인으로 주목을 끈 이 차량은 국내 최초로 버드뷰 내비게이션 시스템을 내장해 많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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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와 아시아자동차 인수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1998년: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와 아시아자동차 인수

    1998년 11월, 현대자동차는 기아자동차와 아시아자동차를 인수했습니다. 1997년 한국 금융시장에 위기가 도래했고, 이러한 금융시장의 불안은 외부 차입에 의존하여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던 자동차 제조업체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습니다. 다른 업체에 비해 자금 동원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기아자동차는 결국 1997년 7월에 도산하고 말았습니다. 기아자동차의 부도 이후 기아자동차와 아시아자동차는 세 번에 걸친 국제 경쟁 입찰을 통해 1998년 11월에 현대자동차에 인수되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기아자동차의 인수를 계기로 두 회사의 총괄 운영을 자동차부문 기획조정위원회에서 담당하게 했고, 연구개발부문은 현대와 기아를 통합해서 회장 직속으로 운영하게 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서비스와 판매를 담당하던 현대자동차서비스를 1999년 4월에 합병하고 6월에는 지프형 승용차를 생산하던 현대정공에서 자동차부문과 공작기계부문을 분리하여 현대자동차와 합병했습니다.

    1999년 6월에 기아자동차, 아시아자동차, 기아자동차판매, 아시아자동차판매, 대전판매 등 5개사를 합병하여 기아자동차로 통합한 현대자동차는, 이와 같은 자동차부문의 이원화와 기획위원회에 의한 총괄 운영, 연구개발부문의 통합운영을 통해 제품개발, 판매, 부품조달 전 부문에 걸쳐 통합적인 시스템을 구축해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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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
    IMF에 따른
    중고차 거래의 활성화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1998년:IMF에 따른 중고차 거래의 활성화

    1998년에 도래한 IMF는 신차시장에 급격한 위축을 안겨주었습니다. 그 여파로 중고차 거래가 활성화되어 사상 처음으로 중고차 판매대수가 신차 판매대수를 넘어섰습니다. 1998년에 거래된 중고차 수는 사업자거래 46만 1천대, 당사자거래 73만 7천대 등 총 119만 8천대로 신차 판매대수인 78만대를 크게 앞질렀습니다. 신차 판매 대수에 대한 중고차 판매 대수의 비율도 1997년의 83.1% 수준에서 153.6%로 급증하였습니다.

    중고차 거래가 활성화되긴 했지만, 실질적인 중고차 거래대수는 전년보다 4.7% 감소된 수치였습니다. 이것은 경기 부진과 IMF체제의 돌입의 여파 때문에 자동차 거래 시장 자체가 침체된 탓이었습니다.

    국내의 중고차 시장 규모는 1990년대 기준으로 53만대가 채 되지 않는 수준이었습니다. 자동차 대중화의 영향으로 이후 빠르게 증가하여 1996년에는 연간 100만대를 넘어섰습니다. 그리고 1997년에는 126만대를 나타내며 신차 시장에 버금가는 규모로 성장하였고, 이는 중요한 자동차 사업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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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9
    신차 평가제도 도입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1999년:신차 평가제도 도입

    1999년 말부터 신차평가제도(NCAP)가 도입되었습니다. 이 제도는 2000년부터는 중대형차와 외제차로 확대 적용되어, 2003년에 이르러선 자동차관리법으로 법제화 되었습니다.

    신차평가제도는 자동차안전도평가제도라고도 불리는데, 정면충돌시험에서는 탑승자의 상해 정도, 충돌 때 문이 열리는지, 충돌 후 문이 제대로 열리는지, 충돌 후 연료가 새는지 4개 항목을 평가합니다. 제동성능시험에서는 제동거리와 제동안정성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집니다.

    탑승자의 상해 정도는 5가지 등급으로 나뉘는데, 차를 시속 56km로 콘크리트 고정 벽에 정면충돌시켰을 때 중상을 입을 가능성이 10% 이하면 1등급, 20% 이하면 2등급, 35% 이하면 3등급, 45% 이하면 4등급, 45% 이상이면 5등급입니다.

    미국은 1978년, 오스트레일리아는 1993년, 유럽은 1995년, 일본은 1996년부터 이 제도를 실시해오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1999년 말에 이 제도를 시작하여 2005년 1월부터는 4.5톤 이하의 승합차까지 확대하였습니다. 그리고 2007년 1월부터는 소형화물차까지 확대했습니다.

    이 제도는 새로 출시되는 자동차의 안정성을 평가하고, 그 결과를 소비자에게 공개하는 제도입니다. 소비자는 정면충돌시험과 제동성능시험 등의 결과를 살펴보고 직접 자유로운 선택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제작사는 더욱 안전한 차를 만들어야겠다는 자극을 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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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9
    수입선 다변화제도 완전 폐지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1999년:수입선 다변화제도 완전 폐지

    1999년 7월 1일, 수입선 다변화제도가 완전히 폐지되며 일본차에 대한 수입규제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수입선 다변화제도는 시장개방 추진과 관련하여 대일 무역역조의 시정을 위해 도입된 제도였습니다. 이와 함께 추가로 해제된 품목은 1,500cc 이상 3,000cc 미만의 세단형 승용차, 3,000cc 이상 세단형 승용차, 1,500cc 이상 3,000cc 미만의 지프형 승용차 등 3개 차종이었습니다. 이 차량들은 이때부터 일본으로부터 직수입이 허용되었습니다.

    다변화제도가 폐지되면서 일본차의 국내 시장 진출이 앞당겨졌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IMF로 인한 경기침체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여러 외부환경으로 일본차가 국내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일본 차량은 원화의 가치하락과 엔고 추세, 판매망 및 A/S망 확보, 유통 코스트 등의 각종 시장 침투비용으로 가격 상승이 불가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업체는 일본 차 수입과 관련해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마케팅이나 A/S 및 서비스적인 측면을 강화하는 행보를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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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9
    현대자동차, 블랙박스 개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1999년:현대자동차, 블랙박스 개발

    현대자동차 블랙박스
    현대자동차 블랙박스

    1999년 5월에 현대자동차는 자동차용 블랙박스를 개발했습니다. 블랙박스란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사고 기록 장치를 뜻합니다. 이 장치는 내장된 센서를 이용해 사고 순간을 초 단위까지 기록, 3차원 애니메이션으로 재현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현대자동차가 개발한 자동차용 블랙박스는 사고발생 전후의 운전자 핸들 조작, 브레이크 및 가속페달 조작, 방향지시등 작동, 사고차량의 궤적, 운전자의 목소리까지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사고 시 전방 상황과 사고발생지역의 도로상태도 내장된 카메라와 센서를 통해 파악되었습니다. 연구비로 2억 원이 투입되었고, 2년 동안의 연구와 시험을 거듭한 끝에 개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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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9
    현대자동차,
    대형 세단 및 리무진 에쿠스 출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1999년:현대자동차, 대형 세단 및 리무진 에쿠스 출시

    에쿠스

    1999년 4월에 현대자동차는 대형 세단 및 리무진 에쿠스를 출시했습니다. 차명인 에쿠스는 라틴어로 '개선장군의 말'과 '천마(天馬)'를 의미하며, '세계적으로 독특하고 독창적인 명품 자동차(Excellent, Quality, Unique, Universal, Supreme automotive)'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현대자동차와 미쓰비시 자동차 공업의 업무 제휴에 의해서 공동 개발된 이 차량은 수출명으로는 센티니얼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일본에서는 미쓰비시 자동차 공업에서 발매되어 세단은 프라우디아, 리무진은 디그니티 라는 차명으로 판매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기를 끌지 못하고 2001년에 조기 단종되고 말았습니다.

    초기에는 V6 3.5L 시그마 MPI엔진과 미쓰비시가 개발한 직분사 방식인 V8 4.5L 오메가 GDI엔진이 탑재되었고, 출시 5개월 뒤인 1999년 9월에 그랜저XG(3세대)에도 탑재되었던 V6 3.0L 시그마 MPI엔진이 추가되었습니다. 모든 엔진에는 5단 자동변속기가 조합되었습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보증기간인 3년 6만km 무보수 정비 프로그램 플래티넘 서비스를 우리나라 최초로 선보였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자동차 업계에 프리미엄 마케팅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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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9
    대우자동차
    워크아웃 대상으로 결정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1999년:대우자동차 워크아웃 대상으로 결정

    대우자동차 워크아웃

    삼성자동차의 법정관리 신청으로 빅딜이 무산되면서 대우그룹은 1999년 7월 19일에 김우중 회장의 전 재산 등 10조 1천억 원을 담보로 하는 유동성 위기 극복방안을 발표했습니다. 이로써 재계 서열 3위의 대우그룹은 사실상 전면 해체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1999년 8월에 대우자동차는 자동차산업 구조조정에 의한 워크아웃 대상으로 결정되었습니다.

    11월 1일에는 대우자동차의 회장을 맡고 있던 김 회장이 사의를 표했고, 워크아웃에 들어간 그룹 계열사 사장들도 잇따라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1998년 3월 말을 기준으로 대우그룹의 총 부채는 17조 9,109억 원에 달했고, 자기자본은 6조 760억 원이나 잠식된 상태였습니다. 청산가치는 –12조 7,808억 원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에 따라 해외매각이 추진되었고 2000년 6월 29일에 포드가 우선 협상 대상자로 선정되었지만, 포드는 미국에서의 대규모 리콜로 인한 경영악화와 대우차의 부실규모가 예상보다 크다는 이유 등으로 9월 15일에 인수 포기를 선언했습니다.

    포드의 인수포기는 대우자동차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 대우자동차는 해외매각을 중점으로 두고 있었기에 구조조정 시기를 놓쳐버린 것이었습니다. 이에 새로 들어선 경영진은 10월 31일에 '대우자동차 자구계획안'을 발표했습니다. 이 계획은 채권단이 4,600억 원 규모의 자금을 지원하는 대신 대우차는 3,500명의 인원감축과 30%의 임금 삭감, 판매수수료 및 부품가격 인하 등으로 약 9,000억 원의 경상비용을 절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채권단이 이 계획에 노조동의서 첨부를 요구했지만 노조가 이를 거부하면서 대우자동차는 11월 6일에 1차 부도, 3차 노사협의회 합의 실패, 11월 8일 최종 부도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국내 3대 자동차 메이커였던 대우자동차는 부도 이후 승용차부문은 2002년에 미국의 거대자동차그룹 GM이 인수하여 GM대우(현 한국GM)가 되었고, 상용차는 인도의 타타그룹이 인수해서 타타대우상용차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버스는 영안모자에서 인수해서 자일대우버스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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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선진국의 공해 및
    안전규제 기준 만족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0년:선진국의 공해 및 안전규제 기준 만족

    X-5 프로젝트의 세부 실천계획 중 가장 시급하다고 판단한 것은 독자 기술개발 능력의 확보였습니다. 때문에 우선 단계별로 개발할 차종과 부품개발 등에 대한 세부 실천 전략이 마련되었습니다. 독자모델의 차종 개발은 처음에는 중소형 승용차로 시작하여 대형승용차, 상용승용차로 범위를 확대시키고, 2000년까지 전기자동차, 그 이후에는 미래형 자동차를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또한 엔진, 변속기 등 핵심 기능부품의 자체 설계능력을 우선적으로 확보한 뒤 ABS, ECS, EFI, 4WS 등 성능과 안정성, 환경보호, 안락감 향상을 위한 전자화 및 경량화 기술 등 첨단 기능 부품의 자체 설계능력 확보를 추진해 나가기로 전략방향을 정했습니다. 이러한 X-5 프로젝트의 추진 끝에 국내 자동차 산업은 2000년대에 산학연 공동으로 선진국의 공해 및 안전규제 기준을 만족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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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현대자동차,
    졸음운전 경보시스템 개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0년:현대자동차, 졸음운전 경보시스템 개발

    현대자동차 졸음방지시스템
    현대자동차 졸음방지시스템

    2000년 1월, 현대자동차는 고려대 첨단차량연구실과 공동으로 졸음운전 경보시스템을 개발했습니다. 이 경보시스템은 운전자의 얼굴과 전방의 주행차선을 전하결합소자(CCD) 카메라로 촬영하여 졸음운전이나 무의식적인 차선 이탈이 발생할 경우 이를 운전자에게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안면감지 카메라는 운전자의 눈을 실시간으로 추적, 눈의 깜박임으로 졸음 여부를 계산하는 것입니다. 핸들에 장착된 압력감지 센서는 손이 느슨하게 풀리면 졸음운전으로 판단합니다. 또한 차선감지 카메라는 안면감지 카메라에 입력된 정보를 바탕으로 운전자의 집중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차선을 이탈할 경우 작동하여 경고음을 발생시키고 음성메시지를 들려주는 한 편, 에어컨을 작동시켜 운전자의 주의력을 높입니다.

    현대자동차의 졸음운전 경보시스템은 2000년부터 상용화가 시작되어 2014년에는 DSM(Drive State Monitoring) 시스템과 차선 이탈 경보 시스템(LDWS), 주행 조향 보조 시스템(LKAS:Lane Keeping Assist System) 등으로 발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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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기아자동차,
    능동형 추돌방지시스템 개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0년:기아자동차, 능동형 추돌방지시스템 개발

    2000년 1월에 기아자동차는 사전에 사고를 예방하는 능동형 추돌방지시스템을 개발했습니다. 이 시스템은 멀티 빔을 쏘는 레이더와 카메라가 차량에 설치되어 앞 차량은 물론 각종 장애물을 인식하여 차간 거리와 차선 상대, 속도 등을 복합적으로 인식하는 장치였습니다.

    능동형 추돌방지시스템은 레이더와 카메라를 통해 인식한 내용을 바탕으로 앞 차량과 충돌할 위험이 발생할 때 소리나 문자로 경고신호를 보내는 동시에 자동전자제어장치가 작동하여 브레이크를 직접 제어할 수 있었습니다.

    2014년 기준으로 기아자동차의 안전기술은 각 바퀴의 브레이크를 개별적으로 제어해 차량 움직임을 안정시키는 '전자제어 주행안전장치(ESC)', 구동력을 조절해 미끄러짐을 방지하는 '구동력 제어 시스템(TCS)', 커브를 통과할 때 브레이크 유압을 제어해 안정성을 확보해주는 '코너링 브레이크 컨트롤(CBC)', 제동 및 조향 기능을 통합 제어해 차량 안정을 돕는 '샤시 통합제어 시스템(VSM)'등이 있었습니다. 앞차를 자동으로 인식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시키는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SCC)', 전방 차량과의 거리를 감지해 경고음으로 알려주는 '전방추돌 경보시스템(FCWS)' 등도 기아자동차의 안전기술이었습니다.

    이러한 능동형 추돌방지시스템은 자동차의 기존 안전설계들이 사고 후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수동형 안전시스템이었다는 점에서 착안한 것입니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이런 시도들은 한국 자동차 산업의 기술력이 운전자의 안전을 우선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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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현대·기아자동차,
    국내 최초 연료전지자동차 개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0년:현대·기아자동차, 국내 최초 연료전지자동차 개발

    싼타페 연료전지자동차
    싼타페 연료전지자동차
    싼타페 연료전지자동차

    현대·기아자동차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캘리포니아 퓨얼 셀 파트너쉽(CaFCP : California Fuel Cell Partnership) 개소식 행사에서 수소를 연료로 하는 싼타페 연료전지차를 공개했습니다.

    연료전지자동차는 연료로 수소를 사용하며 이를 공기 중의 산소와 화학반응을 일으켜 이때 발생하는 전기를 이용, 구동용 모터를 작동시켜 운행하는 자동차입니다. 발생되는 전압은 400V 내외로 매우 높은데, 차량의 구동을 위한 전력소모에 따른 전체 전력의 제어가 필요하고 운전자의 안전을 별도로 고려해야 하며, 동절기 운전을 위해 수분의 처리 및 동파장치, 냉시동을 위한 방안도 필요해서 여러 방면에서 까다로운 조건을 요구하는 시스템입니다.

    1998년에 G-7프로젝트 및 차세대 자동차 개발 사업으로 개발하기 시작한 연료전지자동차는 자동차기술범위를 넘어선 화학, 전기, 에너지, 환경, 신소재 등 광범위 기술융합 제품입니다. 기존에는 연료전지 하이브리드 차까지만 개발된 상태였고, 현대·기아자동차가 2000년에 드디어 연료전지자동차를 개발한 것이었습니다.

    싼타페 연료전지차는 국내 유수 연구소와의 요소기술협업을 통해 독자기술력을 확보함과 동시에 미국 IFC사(현 UTCFC)와의 공동개발을 통해 국내 최초로 순수 연료전지만으로 가동하는 자동차로 개발될 수 있었습니다.

    이후 현대·기아자동차는 2004년 저온시동성이 개선된 투싼 연료전기 자동차를 개발했고, 2005년 스포티지 연료전지 자동차를 선보이며 미국 에너지성의 시범운행에도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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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GM대우,
    소형 미니밴 레조 출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0년:GM대우, 소형 미니밴 레조 출시

    2000년 1월에 GM대우는 7인승 소형 미니밴 레조를 출시했습니다. 이것은 GM대우가 만든 첫 번째 미니밴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디자인 업체인 피난파리나에서 디자인을 담당했고 LPG차량과 가솔린 차량 두 종류로 판매되었습니다. 1,998cc의 배기량을 가진 이 차량은 가솔린보다 LPG차량이 시중에 더 많이 유통되었습니다.

    가볍게 몰고 다닐 수 있는 편안한 차량으로 인식되어 2000년에 우리나라 자동차 판매 순위 5위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저조한 판매량과 노후화 등으로 인해 2007년 6월에 단종되었습니다. 2011년 출시된 쉐보레 올란도는 레조가 단종된 후 한동안의 공백기가 지나 출시되었고 차체 크기 또한 큰 차이를 보였지만 그 외의 부분에선 레조의 후속 차량으로 불렸습니다.

    레조
    레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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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현대자동차,
    중형 SUV 싼타페 출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0년:현대자동차, 중형 SUV 싼타페 출시

    싼타페 1세대
    싼타페 2세대

    2000년 6윌에 현대자동차는 중형 SUV 자동차인 싼타페를 출시했습니다. 차명은 미국 뉴멕시코 주의 주도인 샌타페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SM이라는 프로젝트명으로 개발되었고 1999년에 개최된 디트로이트 모터쇼에 컨셉트카(HCD-4)로 출품되고, 이듬해인 2000년 6월 20일에 양산형이 출시되었습니다.

    2리터 D엔진과 2.7리터 델타엔진, 3.5리터 시그마 엔진(북미수출사양)을 채용하였고, 기본적으로는 도시형SUV에 적합하게 2륜 구동이었지만 4륜 구동 모델이 별도 트림으로 존재했습니다. 쏘나타(4세대)의 전륜구동 플랫폼을 활용하여 개발되었고, 현대자동차의 LA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디자인을 주도하였습니다.

    우리나라 SUV로는 최초로 프레임 차체가 아닌 모노코크 차체가 적용되어 승차감과 안정성이 크게 개선되었고, 현대자동차의 100% 독자기술로 개발되어 미쓰비시 자동차 공업에 지출되는 로열티를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출시된 해에 우수 산업 디자인 상품 선정선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싼타페는 우리나라에서만 327,620대가 팔렸습니다. 이전엔 7인승 모델만 선택할 수 있었지만 2014년에 디젤 R2.2모델에 5인승 모델을 신규 적용한 2015년 형 싼타페를 공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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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르노삼성자동차 출범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0년:르노삼성자동차 출범

    르노삼성자동차 출범

    2000년 9월, 프랑스 르노에 매각된 삼성자동차는 르노삼성자동차로 이름을 바꾸어 출범하였습니다. IMF 구제금융 신청 후 외환위기 국면을 맞은 삼성은 1999년 6월 30일에 빅딜 대신 법정관리를 선택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생명 주식 2조 8,000억 원어치를 출연하여 삼성자동차 부채와 협력업체 지원 등 현안들을 자체적으로 해결하겠다고 밝혔습니다. 1999년 9월 22일에 삼성과 채권단간의 삼성차 부채 처리안에 대한 합의문이 발효되었고, 삼성은 이후 적극적으로 매각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삼성자동차는 앞장서서 르노와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2000년 1월 19일 르노 이사회에서 총 자본금 4,400억 원 중 르노가 70.1%인 3,080억 원, 삼성그룹이 19.9%인 880억 원, 채권은행단이 출자전환분 10%인 440억 원을 각각 소유하는 것으로 결정되며 2000년 4월 21일에 삼성자동차의 모든 자산이 르노로 매각되었습니다. 르노는 출자전환액 440억 원을 제외한 잔액 4,610억 원을 상환해야 했는데, 그중 50%는 2004년부터 10년간 고정 상환하기로, 나머지 50%는 신규회사의 이익과 비례하여 매년 상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2000년 9월에 르노삼성자동차가 출범하면서 삼성자동차는 12월에 법인이 해산되었습니다. 삼성중공업에서 대형 상용차부문을 분리하여 설립된 삼성상용차는 2000년 11월에 구조조정 차원에서 퇴출이 결정되었고, 삼성은 자동차사업에 참여를 결정한 지 6년 만에 완전히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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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자동차 생산 300만 시대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0년:자동차 생산 300만 시대

    자동차생산 규모별 추세

    우리나라의 자동차 생산대수는 2000년에 들어서 311만 5천대를 기록하며 자동차생산 300만대에 돌입했습니다. 1998년에는 외환위기를 통해 시장여건이 악화되어 전년대비 30% 이상 생산규모가 감소했지만, 구조조정의 성공으로 국내 경기가 점차 회복세에 들어섰습니다. 이러한 기세로 자동차수요가 증가하고 지속적인 수출의 호조를 보이며 예상보다 빠른 2000년에 자동차생산 수준이 이전으로 돌아왔습니다.

    자동차 생산규모가 증가한 추이를 보면 1978년에 10만대를 돌파이후 이후 20만대를 달성하는 데까지 1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이후 50만대를 달성하는 데까지는 7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제2차 석유파동에 따른 1980년대 생산 급감의 영향이 컸던 탓입니다. 이후 100만대를 돌파하는 데까지 2년, 200만대 돌파까지도 5년밖에 소요되지 않았는데, 이는 자동차 대중화 시기와 맞물렸기 때문으로 파악됩니다. 이후 외환위기가 닥쳐 생산량이 급감하기 시작했고, 300만대 돌파하기까지 7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자동차 생산 300만대 돌파의 성과는 진흥계획에 따라 고유모델이 개발된 지 25년 만에 이루어낸 것입니다. 국내 판매 143만대, 수출 167만 6천대의 수치가 이를 뒷받침해 주었습니다. 국내 자동차산업의 위상은 이에 따라 빠르게 상승하였고, 자동차산업은 국가주력산업의 하나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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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삼성상용차 퇴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0년:삼성상용차 퇴출

    2000년 11월 2일에 정부는 구조조정 차원에서 삼성상용차의 퇴출을 결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삼성상용차는 회사 정리절차를 밟게 되었습니다.

    삼성상용차는 1994년 5월에 대형상용차 시장에 참여한 삼성중공업에서 자동차부문을 분리하여 설립한 회사였습니다. 후에 승용차에 대한 신규참여가 결정된 이후 소형상용차까지 생산범위를 넓혀 1998년 11월에는 1톤 트럭 SV110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초기의 막대한 시설투자로 인해 삼성자동차의 부채는 1995년부터 급속하게 증가하였고, 1997년까지 매년 1조원 이상을 투입하여 1998년에는 총 부채액이 4조 20억 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삼성그룹은 1998년 12월에 정부가 주도한 재벌개혁의 일환인 재벌간 사업교환으로 대우그룹의 가전 사업을 인수하는 대신 자동차를 대우그룹에 매각하기로 했지만, 의견 대립으로 인해 교섭이 결렬되어 결국 이 빅딜은 백지화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삼성그룹은 1999년 6월에 삼성자동차를 법정관리 신청했고, 12월에는 삼성자동차에 대한 법원의 회사 정리절차 개시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결국 2000년 11월에는 삼성상용차의 퇴출을 결정했습니다. 이러한 삼성 상용차의 퇴출 결정은 삼성이 자동차사업에 참여 결정 이후 6년 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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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제1회 부산모터쇼 개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1년:제1회 부산모터쇼 개최

    부산모터쇼
    부산모터쇼

    2001년 9월에 제1회 부산모터쇼가 부산 전시·컨벤션센터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제1회 부산모터쇼는 '인간, 자연이 숨 쉬는 미래'라는 주제로 당시 부산시가 주최한 자동차관련 국제박람회였습니다. 마침 2001년 서울모터쇼가 무산되었기 때문에 국내외에서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개막행사에는 국무총리와 산자부, 외교부, 건교부 장관을 비롯한 정부 인사와 자동차공업협회장 등 약 2천 명이 참석했습니다. 현대와 기아, 대우, 쌍용자동차 등 국내 완성차 메이커는 물론 다임러크라이슬러, BMW 등 11개국 207개 업체가 참여해 1천500여개의 부스를 전시했습니다. 지방에서 처음 열리는 자동차 축제였기에 부산시민은 물론이고 일반인의 높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부산모터쇼는 2001년에 성황리에 개최된 이후 2년 간격(제2회와 제3회는 3년 간격)으로 부산 벡스코에서 꾸준히 개최되었습니다. 2014년 5월 29일부터 6월 8일까지 열린 제7회 부산모터쇼는 '자동차의 바다, 세계를 품다'라는 주제로 11개국 179개 업체가 참가한 가운데 11일간 100만 명의 관람객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산업과 지역 간의 교류를 통해 열린 행사가 지역관광명물로서도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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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기아자동차,
    동풍자동차와 합작사 설립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1년:기아자동차, 동풍자동차와 합작사 설립

    2001년, 기아자동차는 중국 3대 자동차그룹 중 하나인 동풍자동차와 합작사 설립에 합의하고 중국에서 본격적인 승용차사업에 착수했습니다. 합작사의 지분비율은 기아자동차가 50%, 열달기차가 30%, 동풍기차가 20%로 하기로 합의하고 회사명은 '동풍열달기아'로 결정했습니다. 자본참여 회사들은 합작회사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 기아자동차가 직접 합작 회사를 경영하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기아자동차의 이번 합작 사업은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중국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차종을 대량으로 생산하여 공급함으로써 브랜드와 상품 인지도를 확보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또한 중국 자동차 시장 개방에 발 빠르게 참여해 조기에 판매기반을 구축하려는 포석이 깔려 있었습니다.

    중국 기아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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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한국자동차,
    미국 내 판매 60만대 돌파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1년:한국자동차, 미국 내 판매 60만대 돌파

    한국차 미국내 판매 60만대 돌파

    2001년, 한국 차의 미국 내 판매대수가 60만대를 돌파했습니다. 2001년에 미국 시장에서 판매된 한국산 자동차는 총 61만 8천대였고, 그 중 현대가 34만 6천대, 기아가 22만 4천대, 대우가 4만 8천대를 각각 달성하였습니다. 이는 전년에 비해 30.6%가 늘어난 수치였습니다. 현대자동차는 전년대비 41.7%, 기아자동차는 39.3%가 증가했으며 대우는 29.4%가 감소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미국 내 자동차 판매 60만대 달성은 1986년 대미 수출이 시작된 이래 15년만이었습니다.

    한편 2001년 미국시장은 빅3의 판매 부진과 함께 수입차의 비중이 전년 16.3%에서 17.8%로 크게 증가했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 내 수입차 시장에서 한국 차가 차지하는 비중이 16.7%에서 20.2%로 크게 증가했고 일본차와 유럽 차는 0.9%씩 감소했습니다. 이와 같은 판매 호조에 힘입어 수입차 시장의 메이커별 판매순위도 현대자동차가 전년의 4위에서 2위로, 기아가 6위에서 5위로 각각 상승했습니다.

    한국 기업들은 이를 달성하기 위해 '10년 10만 마일 보증'으로 대표되는 마케팅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고, 이와 더불어 품질향상에 따른 소비자 만족도 향상, 제품 라인업 확대, 외환위기 이후 환율상승에 따른 가격경쟁력 강화 등이 요인이 되어 미국 내 판매 60만대 돌파라는 성과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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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제조물책임법 시행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2년:제조물책임법 시행

    2002년 7월엔 국내 소비자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제조물책임법(Product Liability)이 시행되었습니다. 원래 제조물책임법은 1999년부터 도입될 예정이었지만 여건이 미비하여 2002년으로 연기되었습니다.

    제조물책임법이 시행됨으로써 제조물 결함으로 인한 소비자 피해에 대한 배상 책임이 확대, 강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손해배상에 대한 책임 요건이 고의 또는 과실에서 무과실 책임으로 바뀌었습니다. 때문에 제조업체들은 판매 후에도 제품의 결함여부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을 해야 했고, 결함이 발생하거나 예상될 경우 신속하게 조치를 취해서 소송 예방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야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제조물책임법을 통해 결함발생 시 위험부담이 높아진 제조업체들은 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기술능력 제고와 품질 향상, 관리능력 향상에 힘을 쏟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조물책임법
    제조물책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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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배출가스 허용기준치
    세계최고 도달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2년:배출가스 허용기준치 세계최고 도달

    2002년부터 적용된 배출가스 허용기준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좁은 국토와 높은 인구밀도, 과도한 도시 인구집중률 등으로 일찍부터 환경문제가 제기되어 왔습니다. 소득수준이 높아지고 자동차가 대중화될수록 자동차 보유량이 급증하면서 대기오염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대형 상용차의 보유량이 많아, 이로 인한 대기오염이 문제가 되었고 그중에서도 경유차에서 많이 배출되는 질소산화물(NOx)은 매우 심각한 것으로 지적되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우리나라는 경유차에 대한 배출가스 규제를 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1990년대 말에는 질소산화물(NOx)을 제외하면 휘발유 자동차보다 더 높은 수준의 규제가 이루어졌고, 2002년부터는 배출가스 허용기준을 세계최고 수준으로 올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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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현대·기아자동차,
    중형차용 세타엔진 개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2년:현대·기아자동차, 중형차용 세타엔진 개발

    현대·기아자동차 세타엔진

    2002년, 현대·기아자동차는 알루미늄 블록을 적용한 중형차용 세타엔진을 개발했습니다. 이 엔진은 알루미늄 엔진 블록, 흡배기 가변밸브 타이밍 기구, 정숙형 타이밍 체인을 적용해 만든 중형엔진이었습니다. 고성능, 저연비, 정숙성, 내구력, 친환경이라는 이점을 모두 잡아낸 세계 수준의 엔진이었습니다.

    2005년 현대·기아차는 당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미국 다임러크라이슬러와 일본 미쓰비시에 세타엔진 기술을 전수하였고, 두 회사에서 5,700만 달러의 로열티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엔진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발전했다는 의미였습니다. 2007년에는 세타엔진을 연간 184만대 생산하여 단일엔진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생산량을 달성했습니다.

    이러한 뛰어난 수준의 엔진을 개발하면서 현대·기아자동차는 한국 자동차산업의 기술개발 역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대·기아자동차는 엔진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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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현대자동차,
    북경기차공업과 합작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2년:현대자동차, 북경기차공업과 합작

    2002년 현대자동차는 중국 북경기차공업과 합작으로 북경현대기차유한공사를 설립하는 합작의향서를 체결했습니다. 현대자동차와 북경기차공업이 합작으로 만든 이 기업은 2005년까지 연산 20만대, 2010년까지 연산 50만대 규모의 생산능력을 갖추기로 계획했습니다. 북경현대기차는 2002년 10월부터 EF쏘나타를 시작으로 아반떼XD 등 승용차 전 차종에 걸쳐 중국실정에 맞는 제품을 생산하고 향후 합작기업이 자체 개발한 승용차를 생산하기로 했습니다.

    중국 정부는 1994년 7월에 신자동차산업 정책을 발표한 이후 해외업체들의 신규진입을 불허했습니다. 또한 2001년 WTO에 가입하면서 중국의 취약한 자동차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자동차산업 '10차 5개년 개발계획'을 발표하고 2005년까지 난립된 소규모 자동차 생산 공장을 묶어 몇 개의 대형 자동차회사만 육성할 계획이었습니다. 집중 육성대상인 자동차업체는 소위 3대 3소 2미에 포함된 8개 업체들이었고,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는 3대 자동차업체에 포함된 동품자동차와 북경자동차와의 합작을 통해 중국에서 승용차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합작을 통해 현대자동차는 잠재력 있는 중국 시장의 시장 개방 초기부터 판매기반을 마련하고 브랜드 이미지를 조기에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현대자동차 북경기차공업 업무 조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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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GM대우
    오토&테크놀러지 공식출범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2년:GM대우 오토&테크놀러지 공식출범

    GM대우 오토&테크놀로지 공식출범

    2002년 10월 17일 GM대우 오토&테크놀러지가 공식 출범하였습니다. 기존의 대우자동차는 대우인천자동차, 대우버스, 대우상용차로 분할되었고, 기존 법인 대우자동차는 청산대상으로 분류되었습니다. GM대우의 지분은 GM측 지분 67% 중에서 GM이 42.1%, 일본 스즈키가 14.9%, 중국 상해기차가 10%의 지분을 가지는 것으로 정리되어 결국 GM대우는 4대국이 합작한 회사가 되었습니다. 이사회 구성은 GM측 5명, 채권단을 대표하는 산업은행 측 3명, 스즈키 및 상해기차 각 1명 등 10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GM대우는 출범과 함께 '한국 시장에서의 입지확보', '세계수준의 기술을 바탕으로 한 제품 개발 및 제조', 'GM그룹의 유통망, 브랜드 및 기술의 활용'의 세 가지 전략을 중심으로 경영활동을 계획했습니다. 닉 라일리 시장은 내수판매를 회복하고 2003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인 수출에 나서 2~3년 내에 흑자를 내겠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2011년에 GM사는 자사의 자동차 브랜드 중 하나인 쉐보레를 국내에 들여와 대우 브랜드를 폐지하고 회사명도 한국GM으로 변경하였습니다. 때문에 한국GM에서 발매되는 대부분의 차량이 이 브랜드로 판매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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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수입 승용차 수요증가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2년:수입 승용차 수요증가

    1990년대 말에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던 수입 승용차의 국내 판매량은 2002년을 기점으로 급증세를 보였습니다. 전년보다 108% 증가한데 이어 2003년 이후에는 경기침체로 국내 승용차 시장이 2년 연속 크게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20%대의 증가율을 유지했습니다. 이 영향으로 수입 승용차의 국내 판매규모는 2003년에 19,461대, 2004년에는 23,345대로 각각 늘어났고 시장 점유율도 2002년의 1.3%에서 2003년에는 1.9%, 2004년에는 2.7%까지 빠르게 증가했습니다.

    수입승용차의 판매가 늘어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습니다. 먼저 외환위기 이후 시장에서 소비의 고급화 추세가 뚜렷이 나타난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추세는 자동차뿐 아니라 국내 대부분의 상품시장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었습니다. 이러한 소비의 고급화 추세는 자동차시장에서 고급차 수요의 확대로 나타났습니다. 수입차는 고급차를 위주로 판매되었으므로 특히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수입차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고, 수입차업체들이 할인판매, A/S확대 등을 내세워 국내 시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 또한 수입승용차 판매 증가의 원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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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현대자동차,
    미국 현지공장 건설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2년:현대자동차, 미국 현지공장 건설

    2002년 4월에 현대자동차는 약 10억 달러를 투자하여 미국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에 미국 현지공장을 착공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공장은 HMMA(Hyundai Motor Manufacturing Alabama)로 명명되었습니다.

    이 공장은 2005년에 완공하여 쏘나타와 싼타페를 생산할 예정이었습니다. 196만평의 넓은 부지에 연간 30만대 규모로 시작하여 점차 생산능력을 증가시킨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KD부품을 도입하여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에서 부품을 조달하는 것은 물론 각종 시험까지도 현지에서 수행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현대가 처음 현지공장을 건설한 것은 터키였는데, 터키 국내시장보다는 주변 개도국과 서유럽 시장을 겨냥하고 입지를 선정한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인도와 중국에 공장건설을 추진했습니다. 이 두 지역은 세계 인구 1,2위이며 빠른 경제성장이 예상되는 곳이었습니다. 두 지역의 소득수준이 궤도에 오를 경우 자동차 시장 잠재력이 가장 높은 나라이기도 했습니다. 그 중 인도에서는 1998년 양산을 개시한 이후 1999년에 6만대를 판매하여 시장점유율을 18.5%까지 끌어올렸습니다.

    아울러 미국 캘리포니아 얼바인에 2,400만 달러를 투자하여 현대·기아 디자인센터를 설립했고, 이를 미국 내의 현대·기아 기술연구소, 디자인연구소와 연계하였습니다. 현대의 이러한 해외 현지생산 확대는 세계적인 자동차 기업으로 발전하기 위한 현대그룹의 글로벌 경영전략이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완전 현지화한 자동차공장 운영을 목표로 세계적인 자동차 업체로 거듭나려고 하고 있습니다.

    현대자동차 미국현지공장 착공식
    앨라배마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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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자기인증제도 도입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3년:자기인증제도 도입

    2003년부터 자기인증제도가 도입되었습니다. 1997년 초부터 시작된 한미 간의 마찰은 1998년 10월 20일에 한미 자동차협상 타결로 해결되었는데, 이때 타결된 주요 내용 중 하나가 형식승인을 간소화한 자기인증제도를 통해 자동차업계의 리콜 의무를 강화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이전의 자동차 형식 승인제도는 안전기준에 의해 사전에 안전성을 확인하는 제도였습니다. 비슷한 제도를 한국과 일본, 유럽연합(EU)이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자기인증제도는 미국 등이 시행하고 있던 제도로 자동차 제작사가 자율적으로 안전기준에 적합한 자동차를 생산하되 운행 중 제작결함이 발생하면 무한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국토부는 2003년부터 대형차를 제외한 나머지 차종에 대해 연비 자기인증제도를 도입했으나, 2012년 미국에서 현대·기아차의 연비 관련 리콜이 발생하면서 2013년부터 승용차에 대한 연비 검증을 실시하여 투명한 인증제 도입을 입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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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배출가스 보증기간 강화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3년:배출가스 보증기간 강화

    2003년 1월에는 배출가스 보증기간이 강화되었습니다. 승용 1,2(휘발유, 가스)의 경우 5년 또는 8만km, 10년 또는 16km에서 10년 또는 16만km로 각각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배출가스 보증기간이 경과한 경유차의 배출 허용기준이 2005년부터 강화되었고, 운행 자동차의 배출가스 정밀검사 대상의 차령을 대폭 줄이는 제도가 2004년 1월부터 시행되었습니다.

    또한 경유차 소유자에 대해 무·저공해 자동차로의 전환 또는 배출가스 저감 장치 부착을 권고할 수 있도록 했던 기존의 규정을 의무화 및 위반 시 벌칙부과로 강화했습니다. 경유자동차의 소유자는 2003년 7월 이후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을 각 시·도 조례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준수하도록 하여 자동차 배출가스로 인한 오염에 대해 대비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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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타이어 안전기준 신설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3년:타이어 안전기준 신설

    2003년 1월, 타이어에 대한 안전기준이 신설되어 시행되었습니다. 한미 자동차 협상이 이루어지면서 자동차의 안전과 관련된 제도들이 많이 개정되었는데, 타이어 안전기준은 신설은 그 중 하나였습니다. 타이어 안전기준이란 주행 중 타이어가 파열되는 사고가 자주 발생하면서 타이어 안전관리 강화에 대한 필요성이 부각되었기에 신설된 제도였습니다. 자동차가 시속 97km의 직선주행 상태에서 타이어를 파열시킨 후 일정한 감속도로 제동 시킬 때, 정지 상태에 이를 때까지 파열된 타이어가 림에서 이탈되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또한 타이어의 표시, 구조 및 성능기준을 정하고 부적합 시 시정(리콜) 등을 함으로써 소비자를 보호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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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현대자동차,
    세계 최초 연료전지차용
    초고압 수소저장 시스템 개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3년:현대자동차, 세계 최초 연료전지차용 초고압 수소저장 시스템 개발

    2003년, 현대자동차는 세계 최초로 연료전지차용 초고압 수소저장 시스템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이 시스템은 초고압 수소저장탱크를 만들어 1회 충전시의 주행거리를 현재 가솔린 자동차 수준인 300km 이상으로 향상시키는 기술이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이 기술을 통해 토요타, 닛산, 다임러크라이슬러, 포드, 푸조 등 주요 자동차 메이커들과 컨소시엄을 형성, 공동 개발했습니다.

    'H2 700bar 프로젝트'로 명명된 프로젝트는 연료전지차용 수소저장시스템 개발을 위해 캐나다 PLI사와 일본의 코칸드럼(Kokandrum)사 및 세계 유수의 5개 자동차 업체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컨소시엄이었습니다. 현대자동차가 이전에 개발한 싼타페 연료전지차에 장착된 수소탱크는 70L, 350bar로 1회 충전 후 시속 80km로 160km까지 주행이 가능한 차량이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컨소시엄에서 초고압수소저장탱크를 사용해 이전보다 2배 가까이 향상된 320km의 주행거리를 확보해 연료전지차의 기술발전을 보여주었습니다.

    투싼 연료전지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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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대우버스, 영안모자㈜에 매각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3년:대우버스, 영안모자㈜에 매각

    대우버스

    2003년 3월에 대우버스는 주식회사 영안모자에 매각되었습니다. 2000년에 대우자동차의 부도에도 버스 생산을 강행하던 대우버스는, 2002년 GM대우가 출범하자 대우 계열에서 분리되어 별도로 운영되었습니다. 하지만 2003년 3월, 경기도 부천시에 위치한 모자 생산업체인 영안모자가 인수하며 대주주가 되었습니다.

    이후 대우버스는 2008년 1월 9일에 본사를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전포동에서 현 위치인 부천시 오정구 오정동으로 이전하였습니다. 그리고 2013년 8월에 회사명을 기존의 대우버스에서 자일대우버스로 변경하였습니다. 자일의 뜻은 계열회사인 자일자동차판매의 사명에서 따온 것인데, '자동차일번지'의 줄임말입니다.

    2014년 기준으로 자일대우버스는 본사를 필두로 계림 대우객차 유한공사(중국), 마스터 버스 여객차량 제조공사(타이완), 대우버스 코스타리카 법인(코스타리카), GM대우 법인 비담코(베트남 하노이), FIDC(필리핀), 대우버스 재팬(일본 도쿄), 대우버스 카자흐스탄(카자흐스탄 아스타나) 등의 생산 공장을 각지에 보유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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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자동차부품 수출 급증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3년:자동차부품 수출 급증

    2003년 국내 자동차 부품 전체 매출액은 32조를 넘어서며 1998년 이후 연평균 19.4%의 높은 증가율을 보였습니다. 자동차부품 수출액이 전년대비 56.3% 증가한 42억 2천 7백만 달러를 기록하고, 수입액은 12.6% 늘어난 24억 1천만 달러에 그치면서 무역수지 흑자금액이 18억 달러를 달성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자동차부품 수출액은 매년 증가세를 유지했지만 수입액을 넘지 못해서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해 왔습니다. 1997년에 처음으로 수출액이 전년대비 51.8% 늘어난 21억 1700만 달러를 기록하며 사상 최초로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그 이후 2003년 자동차부품 수출의 활성화가 이루어지며 자동차부품은 우리나라 무역수지 효자 품목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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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외국 부품업체의 합작투자와
    국내업체 인수 급증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3년:외국 부품업체의 합작투자와 국내업체 인수 급증

    외국 부품업체의 국내업체 합작투자와 인수

    2003년에는 외국 부품업체들의 국내 합작투자가 227개 업체, 23억 6,661만 달러로 늘어났습니다. 1997년에는 140개 업체에 14억 1,299만 달러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해보면, 1998년 이후 6년 동안 87개 업체, 9억 5,362만 달러가 증가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업체 수는 62.1%, 투자액은 67.3%가 각각 증가한 셈으로, IMF체제에 돌입한 이후 국내 자동차부품업체에 대한 외국 부품업체들의 투자가 얼마나 활발하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합작투자에 대한 국가별 다변화도 크게 진전되었습니다. 2003년 말 국내에서 이루어진 자동차부품 합작투자는 일본이 104개 업체로 전체의 45.8%를 차지했고, 미국이 그 다음으로 23.8%였습니다. 그 외에 독일,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들의 60개 업체가 참여하여 다양성을 넓혔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국내의 많은 부품업체가 외국 부품업체로 인수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업체로는 만도, 한국델파이, 성우, 만도공조, 유진산업, 덕양산업, 발레오만도, 덴소풍전자, 에스케이에스 등이 있습니다. 이 업체들은 미국의 델파이, 비스티온, TRW와 독일의 보쉬, 프랑스 발레오 등으로 각각 인수되었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71개 업체가 외국 부품업체에게 인수되었고, 외국인의 지분 비율이 50% 이상인 부품업체 수도 88개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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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핵심 기반기술 개발사업
    프로젝트 추진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4년:핵심 기반기술 개발사업 프로젝트 추진

    2004년에 정부는 핵심 기반기술 개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자동차부품의 기술개발 지원을 위하여 2002년까지 추진했던 G7프로젝트의 후속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 부품산업과 관련된 사업은 총 18개였는데, 2006년까지의 1단계 기간에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이외에도 37개 유망 부품에 대한 기술개발을 지원했습니다.

    핵심 기반기술 개발사업의 주요 내용은 전장품, 모듈화, 디젤, 에어컨 냉매, 연료전지기술 등에 대해 R&D자금을 지원하여 목표기술을 개발하는 것이었습니다. 국내의 모듈화 기술수준은 단순조립 및 물류관리 단계에 있을 뿐 핵심기술인 섀시 모듈개발까진 이르지 못하고 있어서 이를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디젤화 기술 중 전자제어식 디젤 엔진 개발 기술이 취약하여 이에 대한 개발과 지원을 추진한 것이었습니다.

    이 핵심 기반기술 개발사업은 유망 부품과 취약한 기술에 대한 개발 및 지원이었다는 점에서 국내 자동차산업의 토대를 다지는 사업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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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산업자원부,
    환경친화적자동차 개발 및
    보급 촉진에 관한 법률 제정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4년:산업자원부, 환경친화적자동차 개발 및 보급 촉진에 관한 법률 제정

    2004년에 산업자원부는 성장동력사업의 일환으로 미래형 자동차 기술개발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내용에는 하이브리드차, 연료전지차 시스템 기술 및 핵심부품 개발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같은 해 10월에는 '환경친화적자동차 개발 및 보급 촉진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였는데, 이는 환경친화적 자동차에 대한 기술개발과 보급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산업자원부는 이 법의 제정을 통해서 환경친화적자동차의 개발 및 보급촉진에 관한 장단기 종합계획을 체계적으로 수립, 추진하였습니다. 또한 미래첨단기술의 조기 확보 및 개발제품의 원활한 보급촉진을 유도해 자동차산업이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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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산업자원부, 하이브리드
    조기상용화 연구개발 투자지원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4년:산업자원부, 하이브리드 조기상용화 연구개발 투자지원

    산업자원부는 2004년부터 2007년까지 4년 간 하이브리드차 조기 상용화를 위해 연구개발 투자를 지원했습니다. 핵심부품 기술 국산화 13개 과제에 총 500억원, 연료전지차 핵심기술 확보 6개 과제에 총 430억 원을 투자했습니다. 또한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차 개발을 위한 로드맵을 마련하기 위한 TF(Task Force), 클린 디젤차 경쟁력 강화를 위한 TF, 인간친화형 자동차 경쟁력 강화를 위한 TF 등을 구성하여 운영하였고, 하이브리드차 1,386대를 공공기관에 시범 보급하고 연료전지차 34대를 운영하는 실증사업을 실시하였습니다.

    하이브리드차란 내연 엔진과 전기자동차의 전기 모터를 동시에 장착하여 기존의 일반 차량에 비해 연비 및 유해가스 배출량을 획기적으로 줄인 차세대 자동차를 뜻합니다. 유해가스를 기존의 차량에 비해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고, 대도시의 공해 및 환경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친환경 차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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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현대자동차, 차량안전성
    제어시스템(VDC) 개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4년:현대자동차, 차량안전성 제어시스템(VDC) 개발

    2004년에 현대자동차는 차량안전성 제어 시스템(VDC-Vehicle Dynamic Control)을 개발했습니다. 이 시스템은 운전자가 의도하는 차량의 주행상태와 실제 주행상태를 비교/판단하여 4륜차의 제동력 및 엔진출력을 제어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능동적인 차량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커브길이나 빙판길에서 장애물 출현 시 다양한 센서를 통해 차량을 제어, 미끄러짐을 방지하는 ESP(Electronic Stability Program)와 차의 제동력뿐만 아니라 엔진에서 바퀴로 연결되는 힘을 조절 가능한 장치인 TSC(Traction Control System)는 모두 이 VDC기능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이중 TCS를 2004년부터 투스카니에 장착해 차량의 안정성을 높였습니다.

    차량제어장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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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만도, 첨단 ESP 독자개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4년:만도, 첨단 ESP 독자개발

    만도 ESP

    2004년 9월에 자동차 부품업체인 만도는 국내 부품업체 중 최초로 첨단 차량자세 제어 장치(ESP-Electronic Stability Program)를 독자 개발했습니다. 이 장치 개발을 위해 7년간 300억 원이 투자되었습니다. 만도는 평택공장에 2004년에 연간 30만대의 ESP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고, 현대자동차의 투싼과 투스카니, 기아자동차의 스포티지 등에 납품했습니다.

    ESP 제동시스템은 커브길이나 빙판길에서 갑작스런 장애물이 출현할 경우 자동차의 바퀴, 조향 휠, 차체 중심에 장착된 다양한 센서를 통해 브레이크를 밟지 않아도 자동으로 차량을 제어하고 좌우 미끄러짐을 방지하는 최첨단 제동장치입니다.

    2005년 대한민국 기술대전에서 금상을 수상한 만도는 ESP개발을 통해 독일,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ESP기술을 독자 개발하는 업체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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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기아자동차,
    경승용차 모닝 출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4년:기아자동차, 경승용차 모닝 출시

    2004년 2월 기아자동차에선 경승용차 모닝을 출시했습니다. 전륜구동에 4기통 현대 입실론 엔진을 장착한 이 차량은 1,000cc의 배기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닝은 피칸토라는 이름으로 유럽에 수출되었는데 경차 배기량 제한이 1,000cc였던 유럽에는 경차로 인정되어 판매되었습니다. 하지만 2004년 우리나라에 출시될 당시 국내의 경차 배기량 제한은 800cc에 불과해 국내에는 경차가 아닌 소형차로 구분되어 판매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차에 비해 세제 측면에서 불리했던 탓에 판매량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습니다.

    2008년 1월 1일부터 경차의 배기량 기준이 1,000cc로 상향 조정되면서 모닝은 경차로 인증 받을 수 있었고, 경차 구입 시 받는 취득세 면제 등의 혜택을 그대로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마티즈가 독차지하던 우리나라 경차 시장의 파이를 양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여파는 상당해서, 모닝은 경차 편입 이전과 비교해 판매량이 5배까지 뛰었습니다. 2014년까지도 지속적으로 판매량이 증가했고, 어린이 애니메이션 '변신 자동차 또봇'의 등장 로봇인 또봇D의 모델로 등장하여 인기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모닝 1세대
    모닝 2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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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대우상용차,
    인도 타타그룹에 매각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4년:대우상용차, 인도 타타그룹에 매각

    대우상용차는 2002년 10월 17일에 GM대우 오토&테크놀러지가 공식출범하면서 대우자동차에서 분할되었습니다. 2003년 10월 27일에 인도의 타타그룹을 우선협상자로 선정하여 매각을 추진하였고, 타타그룹은 11월 17일부터 대우상용차에 대한 실사에 들어갔습니다. 2004년 2월 대우상용차는 1,206억 원에 매각되어 타타대우상용차(주)로 공식 출범하였고, 상용차 전문업체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 후 기존의 대우자동차에서 분할된 사업체 중 대우버스는 2003년 3월 31일 영안모자(주)에 매각되어 버스전문업체로 자리 잡았고, 2002년 10월 21일 출범한 대우인천자동차는 GM대우의 새로운 조건제시로 칼로스, 라노스, 매그너스 등 3개 승용차 모델을 생산하며 GM대우에 차량을 공급하는 OEM업체로 거듭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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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자동차 수출 200만대 돌파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5년:자동차 수출 200만대 돌파

    2004년 우리나라 자동차 수출이 사상 처음으로 200만대 선을 넘어 238만대를 돌파하였습니다. 1996년에 100만대 선을 돌파한지 3년만인 1999년에 150만대를 달성했고, 다시 5년 만에 200만대 선을 넘어선 것입니다. 특히 1989년 이후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대미수출이 2000년대 들어 급속히 호조를 나타냈습니다.

    북미지역 수출 추이를 보면 1997년에는 미국에 수출한 21만 6천대를 포함하여 23만 8천대에 그치고 말았지만, 2003년에는 미국에만 72만 4천대를 수출했고 북미 전체에는 87만 2천대를 수출해 큰 폭의 상승을 이뤄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은 3.4배, 북미 전체는 3.7배 증가했습니다.

    연도별 자동차수출 현황
    지역별 자동차수출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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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경유승용차 국내판매 시행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5년:경유승용차 국내판매 시행

    2005년 경유 승용차의 국내 판매가 시행되었습니다. 2002년 이후, 경유 승용차의 국내 판매 허용 문제는 중요 현안으로 다뤄졌습니다. 허용 시기에 대해서도 자동차업계 내에서 의견이 분분했을 뿐만 아니라 실시방식에 있어서도 정유 업계, 정부, 시민단체 등의 이해가 맞물려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경유 승용차에 대한 배출가스 규제 수준이 유럽연합에 비해 크게 높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경유 엔진의 가장 큰 장점은 연비입니다. 같은 배기량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디젤엔진은 가솔린엔진보다 30% 정도 연비가 더 좋습니다. 1L당 3~9km는 더 달릴 수 있는 셈입니다. 이는 온실가스 배출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온실가스의 가장 큰 주범인 이산화탄소의 경우 통상 연비가 50% 이상 개선되면 발생량이 33% 가량 감소합니다. 때문에 연비가 좋은 친환경 디젤차는 단기적으로 온실가스 배출을 줄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정부는 '수도권 대기환경 개선 특별법'의 연내 제정에 합의하며 디젤승용차 2005년 판매허용을 위한 대기환경보전법 시행규칙 개정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환경부가 2001년 시행한 디젤승용차의 허용기준은 km당 탄화수소 0.01g, 질소산화물 0.02g, 미세먼지 0.01g이었습니다. 이는 EU의 EURO-3은 물론이고 2005년 1월부터 시행되는 EURO-4보다도 각각 5배, 12배, 2.5배 높은 수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규제였습니다. 그래서 자동차업계는 매연과 질소산화물의 배출농도를 획기적으로 저감시키는 친환경 개발에 적극 노력하여 경유승용차 판매를 가능케 하였습니다.

    2005년 5월, 기아차의 프라이드를 시작으로 쏟아져 나온 현대차 아반떼XD, 한국지엠 토스카 등 국산 경유 세단이 그것이었습니다.

    정부는 기존 엄격했던 배기가스 규제를 조정하여 2005년부터는 유럽 배기가스 기준인 EURO-3과 차기 기준인 EURO-4를 동시 시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에 따라서 2005년부터 판매되는 EURO-4 자동차는 특소세를 50% 감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기오염을 줄이기 위한 매연저감장치(DPF) 부착 및 무공해, 저공해차, 초저황 경유에 대한 세금 감면 및 보조금 지급 조치도 취해졌습니다. 휘발유와 경유의 상대가격 문제는 EU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의 국제 수준인 100대 80이나, 100대 85로 조정하기로 하고 관련부처와 협의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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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환경친화적자동차 5개년
    기본계획 수립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5년:환경친화적자동차 5개년 기본계획 수립

    화석연료의 고갈 우려 및 환경규제 강화로 자동차 산업의 패러다임이 고효율/친환경 자동차 개발로 급속히 전환되면서 미국, 일본 등의 자동차산업 선진국은 정부와 기업이 공동으로 대규모 예산을 책정하여 하이브리드, 연료전지차 개발 및 보급을 추진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에 발맞춰 친환경, 미래형 자동차 분야의 기술개발 지원을 지속적으로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환경친화적자동차의 개발과 상용화 및 초기시장 형성을 위한 종합적인 지원책을 마련되지 못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산업자원부는 2005년에 '환경친화적자동차 5개년 기본계획'을 확정하고 2010년까지 하이브리드 자동차 독자기술 확보, 연료전지자동차 시범운행 실시 등에 대한 중장기 목표와 전략을 제시했습니다. 이 계획에 따라 하이브리드카는 2010년까지 모터, 변속기 등 동력시스템의 독자기술 및 본격 양산기술 확보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설계부터 양산까지 일괄적 기술개발을 실시한 하이브리드카는 2008년까지 총 4,170대가 보급되며 친환경자동차에 대한 전 세계의 흐름에 우리나라 산업이 동참하고 있음을 증명하였습니다.

    이 기본계획은 환경친화적 자동차의 개발, 보급이 반드시 진행되어야한다는 산업계의 인식 변화와, 우리나라 주력기간 산업인 자동차 산업에 대한 체계적 지원 방안이 필요하다는 정부차원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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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수도권 대기환경개선 특별법에
    저공해차 보급 내용 신설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5년:수도권 대기환경개선 특별법에 저공해차 보급 내용 신설

    2005년 1월부터 수도권 대기환경개선 특별법에 저공해차 보급 등에 대한 내용이 신설되어 시행되었습니다. 주요 내용은 자동차의 제작 및 판매자는 환경부장관이 고시하는 저공해자동차 보급목표를 기초로, 이에 대한 보급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토록 하는 것이며, 저공해자동차의 구매촉진을 위해 행정, 공공기관은 일정 비율 이상 구매하도록 의무화하고,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자에 대해서는 우선 구매를 권고하며 저공해차 구매 시 재정적 지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공해자동차는 오염물질 배출 정도에 따라 구분했습니다. 제1종 저공해자동차는 전기자동차, 연료전지자동차 등 배출되는 오염물질이 0인 자동차를 뜻합니다. 제2종 저공해자동차는 하이브리드 자동차 및 압축 천연가스 또는 액화 석유가스를 사용하는 자동차 중 한경부령에 정해진 기준에 적합한 자동차를 뜻합니다. 또한 제3종 저공해자동차는 경유, 휘발유 또는 가스를 사용하는 자동차 중 현행 대기환경보전법의 제작자 배출 허용기준보다 강화된 환경부령에 정해진 기준에 적합한 자동차를 말합니다.

    수도권 대기오염에 대한 문제가 이슈가 되던 시점에서 저공해자동차 보급 지원은 환경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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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쌍용자동차,
    상하이자동차에 매각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5년:쌍용자동차, 상하이자동차에 매각

    2005년, 쌍용자동차는 상하이자동차에 매각되었습니다. 2003년에 경영상태가 급속하게 불안정해지면서 쌍용자동차는 기업개선작업과 함께 해외매각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쌍용차 채권단이 중국 란싱그룹을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하였지만 협상이 결렬되었고, 이후 중국의 상하이자동차(SAIC)와 매각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2004년 10월 28일 48.92%의 지분을 매각하기로 하는 본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2005년 1월 27일에 쌍용 채권금융기관 협의회는 쌍용에 대한 워크아웃 졸업(채권단 공동관리 절차 종료)을 결의하였고, 이 날 채권단과 중국의 SAG(Shanghi Automotive Group Co., Ltd)사이에 쌍용의 지분 매각대금 거래가 완료되면서 채권단의 공동관리 절차는 완전 종료되었습니다. 쌍용이 매각된 SAG는 SAIC가 홍콩 증시 상장을 위해 설립한 지주회사였습니다. SAIC도 그 계열사에 속해 있었고 본 계약이 체결되면서 쌍용 또한 SAG의 계열사로 편입되었습니다.

    쌍용자동차 상하이자동차 체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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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국내 첫 자동차용
    바이오디젤 상용화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6년:국내 첫 자동차용 바이오디젤 상용화

    산업자원부는 2006년 3월에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바이오디젤 보급 협약을 체결했습니다. 이자리에는 SK와 GS칼텍스 등 5개 정유사와 바이오디젤 원료 공급, 제조업체들이 참석했습니다. 협약 이후로 유채꽃의 기름을 이용해 만드는 바이오 디젤이 경유 차량 연료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5개 정유사의 주유소들은 바이오 디젤이 5% 섞인 경유, 이른바 BD5를 소비자에게 공급했습니다. BD5는 기존의 경유차에 넣어도 엔진에 이상이 없었고, 신재생 에너지에 대한 혜택이 주어져 일반 경유보다 리터당 7원 30전 저렴하게 판매되었습니다.

    바이오디젤 연구는 화석연료의 고갈과 국제에너지 가격상승에 대비책으로 강구된 것이었습니다. 바이오연료 원료작물의 품종육성과 활용기술 확립, 생명공학 기술을 이용한 바이오에너지원의 개발 및 상용화는 에너지 절감과 친환경에너지를 이용한 농업촌의 부가가치 향상이 기대되었습니다.

    바이오디젤 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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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현대자동차, 감마엔진 개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6년:현대자동차, 감마엔진 개발

    현대자동차 감마엔진

    2006년에 현대자동차는 독자적으로 개발한 알파 엔진을 대체할 배기량 1.6L 이하 엔진인 감마 엔진을 개발했습니다. 이 엔진은 세타 엔진과 마찬가지로 흡기와 배기를 역전 배치한 엔진이었습니다. 헤드는 물론 블럭도 알루미늄 재질로 제작되어 엔진 무게를 100kg까지 감량했습니다. 이는 기존 알파 엔진보다 10kg 가벼운 무게였습니다.

    감마엔진은 2006년에 출시한 3세대 아반떼 모델인 아반떼HD에 적용되었는데, 최고출력 121마력, 최대토크 15.6kg.m로 국내 자동차 브랜드에서 생산한 1.6L 엔진 중에서 최초로 120마력을 돌파했고, 최대토크도 동급 최고 수준을 기록했습니다.

    이 엔진은 약간의 개량을 거쳐 세타 엔진에 이어 GDI 시스템을 적용했습니다. 최고출력 140마력, 최대토크 17kg.m까지 성능을 끌어올렸고, 연비도 동급 최고 수준으로 높였습니다. 그 결과 2011년 미국의 워즈 오토(Ward's auto)가 주관한 10대 엔진에 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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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현대자동차,
    국내 최초 배기량 3,000cc급
    V6 승용디젤 S엔진 개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6년:현대자동차, 국내 최초 배기량 3,000cc급 V6 승용디젤 S엔진 개발

    2006년 9월에 현대자동차는 국내 최초 배기량 3,000cc급의 V6 승용 디젤엔진인 'S엔진'을 독자 개발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S엔진을 개발함으로써 소형 승용에서부터 중형 승용, SUV, 최고급 SUV에 이르기까지 승용 디젤엔진의 풀 라인업을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S엔진은 240마력을 발휘해 아우디(233마력), 벤츠(224마력)을 능가하는 성능을 보였는데, 이는 V6 동급 중 최고 수준의 동력성능이었습니다. 연비도 L당 11.0km(2WD), 10.7km(4WD)으로 1등급을 달성했습니다. 이 엔진에는 연료를 다단계로 정밀하게 분사하는 피에조 커먼레일 연료분사시스템과 가볍고 강도가 높은 고강도 특수주철(CGI) 실린더블록, 급속승온기능이 내재된 전자제어식 특수 예열장치 등의 첨단 승용디젤엔진 기술들이 국내 최초로 적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소음을 줄여 정숙성과 안락성을 갖추었고, 배기가스 배출량을 대폭 줄여 EURO-4 등 세계적으로 강화되는 배기가스 규제 기준도 충족했습니다.

    5년간 500여대의 엔진 시제품과 300여대의 시험차량을 제작해 다양한 도로여건과 기후조건에서 시험한 S엔진은 2006년 7월 과학기술부가 제정하고 한국산업기술 진흥협회가 운영하는 '신기술(NET)'로 선정되어 기술력을 입증 받았습니다.

    현대자동차 S엔진
    현대자동차 S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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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7년: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

    2007년 4월 2일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되었습니다. 대미 자동차수출의 73%를 차지하던 배기량 3,000cc 이하 가솔린 승용차와 함께 당시 대미시장 수출시 4%의 관세가 부가되던 5~20톤 트럭 섀시의 관세가 철폐되었고, 모터사이클과 자동차 부품에 대한 관세 또한 즉시 철폐되었습니다.

    한편 픽업트럭을 포함한 트럭 완성차의 진입장벽 철폐는 유예되어서 연 2.5%씩 10년간 단계적으로 철폐하기로 했습니다. 이밖에 배기량 3,000cc를 초과하는 대형 승용차와 버스 등은 3년 이내, 관세 4%가 적용되는 타이어는 5년 내에 관세장벽이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환경기준은 단계적으로 적용되었는데, 배출가스 허용기준은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캘리포니아주 기준을 바탕으로 평균배출량 제도를 도입하기로 양국이 합의하였습니다. 배출가스자기진단 장치는 기존 1만대 이하 국내 판매 차량이 2007년 50%, 2008년 75%, 2009년 100%까지 의무장착하기로 한 것을 2008년까지 의무규정 없이 2009년 100% 장착하는 안으로 변경되었습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에서 자동차 부문은 많이 혜택을 받는 품목이었습니다. 정부 추정 수출 증대 예상액이 대략 7억 달러 이상이었고, 수출 증가액의 56% 정도가 자동차에서 발생할 것이라고 추정된 만큼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에 힘이 되는 협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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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현대자동차,
    준중형 승용차 i30 출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7년:현대자동차, 준중형 승용차 i30 출시

    2007년 7월에 현대자동차는 준중형 승용차 i30을 출시했습니다. 차명인 i30의 i는 영감(inspiring), 기술(intelligence), 혁신(innovation)에서 따왔습니다. 또한 i30의 숫자 30은 i30이 속한 C 세그먼트(준중형급)를 의미합니다.

    아반떼 투어링 이후 사라진 현대자동차의 해치백 승용차의 계보를 잇는 모델로, 당초 개발 목적은 국내시장용이 아닌 유럽시장용이었습니다. 기존의 아반떼를 확장하려던 계획에서 플랫폼을 변경하여 새로운 디자인으로 제작하였습니다. 기아 씨드와 플랫폼 및 부품의 상당량을 공유하는 이 차량은 2007년 국내 시장에 먼저 선보인 후 유럽, 미국 순으로 수출하였습니다. 1.4L, 1.6L 감마엔진과 1.6L U엔진, 2L 베타엔진, 2L D엔진을 채용하였고 차체강성이 우수해서 유로엔캡에서 최고 등급의 안정성을 확인 받았습니다.

    유럽 스타일을 지향하는 디자인이어서 국내에선 여성고객층에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당초 월 1천대 수준 유지라는 예상목표를 깨고 2014년 기준으로 월 2천대 가량의 판매량을 유지하며 국내 소비자가 가진 해치백 모델에 대한 인식을 조금씩 개선하고 있습니다.

    i30
    i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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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현대자동차, 차세대 친환경승용
    디젤 R엔진 개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8년:현대자동차, 차세대 친환경승용 디젤 R엔진 개발

    2008년 11월에 현대자동차는 국내 최초로 유럽환경규제 EURO-5 기준을 만족시키는 차세대 친환경 승용디젤인 'R'엔진을 개발했습니다. R엔진은 고성능, 저연비, 친환경성을 만족시키는 배기량 2L 급 (2.0 및 2.2 리터) 차세대 친환경 디젤엔진이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2009년 상반기부터 이 엔진을 탑재한 차량을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R엔진의 출력은 2.2리터의 경우 200마력, 2.0리터는 184마력이었습니다. BMW(2.0리터, 177마력), 벤츠(2.2리터, 170마력), 토요타(2.2리터, 177마력) 등 경쟁사의 승용디젤엔진을 압도하고 큰 폭의 연비향상으로 경제성을 높였습니다.

    그리고 R엔진은 1,800기압의 고압 연료 분사 방식인 제3세대 피에조 인젝터(Piezo-electric injectors) 커먼레일 시스템과 고효율 배기가스 재순환장치의 적용으로 소음과 진동을 크게 줄였습니다. 또한 효율적인 연료 사용으로 연비도 기존 동급 엔진에 비해 대폭 향상됐습니다. 이밖에도 자가진단기능의 전자제어식 가변 터보차져(E-VGT)와 엔진 직장착 산화촉매 및 디젤 매연필터, 급속 예열 기능, 엔진 리사이클링을 고려한 플라스틱 재질 등이 적용되어 세계적으로 강화되고 있는 EURO-5 배기가스 규제 및 국내 수도권 저공해차 규제치를 만족시켰습니다.

    현대자동차는 R엔진을 개발하기 위해 3년 6개월 동안 500여대의 엔진 시제품과 400여대의 시험 차량을 다양한 도로 여건 및 기후 조건에서 시험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이를 통해 최첨단 고성능 엔진에 걸맞은 내구 신뢰성과 품질을 인정받았습니다.

    현대자동차 디젤 R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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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현대자동차,
    대형 세단 제네시스 출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8년:현대자동차, 대형 세단 제네시스 출시

    제네시스 1세대
    제네시스 2세대

    2008년 1월에 현대자동차는 대형 세단 제네시스를 출시했습니다. 차명인 제네시스는 영어로 기원, 창세기라는 뜻으로 고급 세단의 출발선으로서 새로운 장을 열어가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2003년부터 BH라는 프로젝트명으로 개발에 착수된 제네시스는 미쓰비시 자동차 공업과의 공동개발로 출시된 1세대 그랜저, 2세대 그랜저와 이를 바탕으로 한 다이너스티, 1세대 에쿠스 등으로 제외하면 대형차로서는 현대자동차가 처음으로 독자 개발한 차종이었습니다. 제네시스의 후륜구동 플랫폼은 제네시스 쿠페, 2세대 에쿠스와 공유했습니다. 2011년 5월에는 '제네시스 프라다'라는 제네시스 스페셜 에디션을 프라다와 공동 개발해서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2009년에는 북미 올해의 차를 수상했고, 2014년 5월에는 미국의 고속도로 안전보험협회(IIHS)가 발표한 충돌 시험 결과에서 승용차로는 세계 최초로 29개 부문 전 항목 세부 평가에서 만점을 획득해 최우수 등급인 탑 세이프티 픽 플러스(Top Safty Pick+)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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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기아자동차,
    소형 CUV 쏘울 출시

    1997~2008년-시련과 극복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다

    2008년:기아자동차, 소형 CUV 쏘울 출시

    2008년 9월에 기아자동차는 소형 CUV(Crossover Utility Vehicle) 자동차 쏘울을 출시했습니다. 쏘울은 기아 자동차의 첫 CUV 모델이었는데, 소형 모델로 취급하고 있지만 차량을 구분하는 세그먼트와 카테고리가 모두 여기저기에 걸쳐있는 세그먼트/카테고리 버스터 목적으로 개발되어 나온 모델입니다.

    1.6리터 감마-휘발유 엔진과 1.6리터 U2-디젤엔진, 2리터 베타2-휘발유 엔진을 탑재했고, 수동 5단과 자동 4단 변속기로 구성된 파워트레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를 2U/4U라는 두 가지의 트림으로 구분해서 판매했습니다.

    쏘울은 미국에서 처음 운전을 시작한 학생들에게 패션 아이템으로 각광을 받으며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쏘울의 미국 시장 내 인기 요인은 첫째는 심플한 세그먼트 버스터 박스카라는 디자인적 요소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로는 기아 미국차 현지 법인의 아이디어로 쏘울을 홍보하기 위해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할 것 같은 애완동물인 햄스터를 이용해 마케팅을 펼친 것이었습니다. 이 마케팅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쏘울은 미국시장에서 경쟁차종과 40~50배 이상의 판매량 차이를 벌렸습니다.

    그리고 쏘울은 2014년 8월, 교황 프란치스코의 한국 방문 시 의전 차량으로 선정되어 세계시장에서의 브랜드를 알리는데 중요한 기회로 삼기도 했습니다.

    쏘울
    쏘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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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전기자동차 활성화 대책 방안'
    발표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09년:전기자동차 활성화 대책 방안' 발표

    2009년 10월, 정부는 '전기자동차 활성화 대책방안'을 발표했습니다. 세계 자동차 산업은 지구 온난화와 자원 고갈로 120년의 자동차 산업 역사상 최대의 격변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전체 산업 분야에서 수송 분야의 온실가스 배출량이 25%에 달해, 각국은 온실가스 배출을 억제하기 위해 자동차 분야의 규제를 강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린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각국 정부와 자동차 업계들은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전기자동차 활성화 대책방안'은 그 필요성과 시기적인 요건이 맞물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국가전략으로서의 방향제시가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그린카 별 특화된 전략이 부재하여 정부와 민간의 역량 집중에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전기자동차활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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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현대자동차, 하이브리드 자동차
    아반떼 LPi 출시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09년:현대자동차, 하이브리드 자동차 아반떼 LPi 출시

    2009년 7월, 현대자동차는 LPi 엔진과 전기 모터를 장착한 우리나라 최초의 하이브리드 자동차인 아반떼 LPi 하이브리드를 출시했습니다. 아반떼 LPi는 전기모터, 인버터, 컨버터, 배터리 등 4가지 핵심 전기 동력 부품을 독자개발하여 국산화를 실현했습니다. 그리고 정차 시 엔진을 정지시키는 오토 스톱 기능을 적용했고, 불필요한 공회전으로 인한 연료 소비를 방지해 경제성을 높였습니다. 또한 휘발유나 경유보다 훨씬 저렴한 청정연료인 액화석유가스(LPG)를 연료로 사용해서 가솔린 차량 기준으로 리터당 21.3km의 연비를 달성하여 이전의 내연기관 모델에 비해 55% 가량 연비를 향상시켰습니다.

    하지만 풀 하이브리드가 아니고 마일드 하이브리드라는 점 때문에 고객들에게 큰 호응을 받지 못했습니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싼 것도 판매부진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만 판매가 이뤄졌고 2013년 12월에 판매가 종료되었지만 국내최초로 양산된 실용적인 친환경 자동차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아반떼 Lpi
    아반떼 L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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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현대·기아자동차
    해외생산 189만대 도달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09년:현대·기아자동차 해외생산 189만대 도달

    2009년에 현대·기아자동차는 해외생산 200만대를 눈앞에 두었습니다. 전년대비 29.5% 증가한 188만 7천대의 해외생산량을 기록하면서였습니다. 당해 현대·기아자동차의 국내외 총생산은 461만 1천대로, 전년대비 10.6% 증가한 수치를 보였고, 이 중 해외생산 비중은 40.7%를 차지했습니다.

    현대의 경우 중국, 인도, 체코 공장의 생산이 증가하여 전년대비 33.7% 증가한 149만 3천대의 생산량을 보였습니다. 현대의 국내외 총생산 중에서 해외생산 비중은 48.2%에 달했습니다. 현대의 중국 북경 공장은 중국 정부의 소형차 구입세 인하 등의 부양책에 힘입어 엘란트라 및 i30의 판매가 증가하여 전년대비 90.2% 증가한 57만 1천대의 생산량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현대의 해외 생산 공장 중 인도를 앞지른 최고치였습니다. 인도 공장 또한 2009년 3월에 소비세 4% 인하 등의 여파로 i10, i20 등 경소형차의 판매가 증가해 전년대비 15.1% 증가한 56만대를 생산했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터키는 시장이 위축되어 생산이 감소했습니다. 2009년에 생산이 본격화된 체코의 경우 11만 8천대를 생산했습니다.

    기아는 슬로바키아 공장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중국 공장 생산이 75.5%나 증가하여 해외생산량이 15.7% 증가한 39만 4천대를 기록했습니다. 기아의 국내외 총생산 중에서 해외생산 비중은 25.7% 증가한 39만 4천대를 기록했습니다. 기아의 중국 공장 생산은 쎄라토 판매 증가와 포르테 신규 투입으로 24만 4천대로 급증하였고, 슬로바키아 공장은 글로벌 경기침체로 인한 판매부진의 영향으로 전년대비 25.6% 감소한 15만대 생산에 머물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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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한미FTA 및 추가협상 타결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0년:한미FTA 및 추가협상 타결

    2007년 4월 2일, 한미FTA가 타결되면서 대미 자동차수출의 73%를 차지하던 배기량 3,000cc 이하 가솔린 승용차와 대미시장 수출시 4%의 관세가 부과되던 5~20톤 트럭 섀시의 관세가 철폐되었습니다. 또한 모터사이클과 자동차 부품에 대한 관세도 철폐되었고 환경기준이나 트럭 관세 등도 협상을 거쳐 합의되었습니다. 그리고 1차 타결 이후 계속된 논란 끝에 2010년 12월 5일, 추가 협상이 타결되었습니다.

    추가협상에서 한국과 미국은 승용차 관세철폐기간과 전기차 관세철폐기간을 모든 승용차를 대상으로 양국 상호 4년 후에 철폐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리고 화물차 관세철폐방식은 당초 9년간 균등철폐하기로 했던 것에서 발표 7년경과 후 균등철폐하기로 했습니다. 자동차 특별 세이프가드 상호 적용, 안전기준 협상, 연비·온실가스 기준 완화적용, 새로운 투명성 기준 부여 등을 추가적으로 협상했습니다. 한국과 미국 양국 정부와 의회, 자동차 업계는 모두 추가협상 타결을 통해 서로가 윈-윈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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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그린카산업 발전 전략 및
    과제 발표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0년:그린카산업 발전 전략 및 과제 발표

    2010년 12월, 정부는 범정부 차원에서 '세계 4강 도약을 위한 그린카산업 발전 전략 및 과제'를 발표했습니다. 그린카산업 발전전략은 전기차 뿐만 아니라 하이브리드차,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차, 연료전지차, 클린디젤차 등 그린카 전 차종을 포괄하는 대책이었습니다. 이는 그린카 세계시장 선점을 위해 2010년 3월부터 전문가 500여 명으로 구성된 '그린카 전략포럼'을 통해 논의된 결과를 기반으로 정책이 수립되었습니다.

    지경부 제2차관과 서울대 한민구 교수를 공동위원장으로 산·학·연 전문가 500여명으로 구성된 ‘그린카 전략포럼’은 민관합동으로 그린카 전반의 기술개발, 보급실증, 법제도 등에 대한 종합적인 발전전략을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정부는 그린카 발전 로드맵을 통해 2015년까지 세계 그린카 4대 강국으로 발돋움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차는 2012년, 연료전지차는 2015년, Euro-6 기준을 만족하는 클린디젤버스는 2015년에 양산할 계획이었습니다. 또한 2010년 12월 녹색성장위원회는 약 1.7조원에 달하는 정부자금을 투입해 2015년에는 120만대의 그린카를 생산하고 90만대 수출 및 국내 시장의 21%를 그린카로 보급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린카산업 발전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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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현대자동차, 누우/타우GDi 엔진,
    후륜 8속 자동변속기 개발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0년:현대자동차, 누우/타우GDi 엔진, 후륜 8속 자동변속기 개발

    현대자동차 누우타우엔진

    2010년 10월, 현대자동차는 누우/타우GDi 엔진, 후륜 8속 자동변속기를 개발했습니다.

    현대자동차의 누우 엔진은 1.8/2.0리터급 가솔린 엔진으로 최고 출력 150마력을 자랑하는 차세대 준중형급 가솔린 엔진입니다. 2006년부터 약 44개월간 연구했고 2,400억 원 가량의 연구비가 투입되었습니다.

    타우 5.0 GDi 가솔린 엔진은 국내 최초로 독자 개발한 8기통 가솔린 직접분사 엔진이었습니다. 최고 출력은 435마력이고 최대 토크는 52.0kgf.m으로 동급 엔진 중 세계 최고 수준의 성능을 확보했습니다. 2007년부터 약 40개월간 162억 원의 개발비용이 투입되었습니다.

    후륜 8속 자동변속기는 완성차 업체로서는 세계 최초 독자 기술력으로 세계 최고 단수를 실현한 고효율, 고용량 후륜 자동변속기였습니다. 럭셔리 세단과 SUV를 위해 개발되어 최대 토크 55.0kgf.m을 자랑합니다. 개발비는 635억원이 투입되었고, 개발기간은 4년이 걸렸습니다.

    이러한 고성능의 신기술들은 세계 자동차 시장을 선도할 경쟁력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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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기아자동차, 중형 세단 K5 출시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0년:기아자동차, 중형 세단 K5 출시

    2010년 5월, 기아자동차는 중형 세단 K5를 출시했습니다. 차명인 K5는 기아자동차(Kia)와 대한민국(Korea), 강력함, 지배, 통치 등의 뜻을 지닌 그리스어 Kratos, 활동적인, 동적인이라는 뜻을 지닌 영어 Kinetic의 앞 단어인 K를 따오고, SM5와 같이 중형급을 뜻하는 숫자 5를 결합해서 지었습니다. 상위차종인 K7에 이어 차명에 두 번째로 K를 쓴 차종입니다.

    K5
    K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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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현대자동차, 최초 저상형 국내 1호
    전기버스 일렉시티 출시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0년:현대자동차, 최초 저상형 국내 1호 전기버스 일렉시티 출시

    2010년 6월, 현대자동차는 전기를 주동력으로 하는 최초의 저상형 국내 1호 전기버스인 일렉시티(Elec-city)를 출시했습니다. 국토해양부 표준형 시내버스인 저상 뉴 슈퍼 에어로시티 F/L을 기초로 해서 조립한 일렉시티는 표준형과 동일한 25석의 좌석을 갖췄습니다.

    일렉시티는 최고 시속 100km/h을 낼 수 있었고, 동력원으로는 100kW의 구동 모터 3개를 사용했습니다. 내연엔진으로 환산했을 때 402마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사 포함 총 51명이 탑승 가능했고, 한 번의 충전으로 최대 120km가량 주행이 가능했습니다. 연료비는 기존 CNG버스의 29%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다만 이 값은 중간에 소모되는 양과 브레이크 밟을 때 생기는 전력 양을 뺀 값이기에 약간의 오차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전기자동차의 특성상 차체 상부에 대용량 배터리를 장착할 것을 고려하여 국내 최초로 세미모노코크 일체형 바디를 적용했습니다.

    일렉시티
    일렉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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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현대자동차,
    순수전기차 블루온 발표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0년:현대자동차, 순수전기차 블루온 발표

    현대자동차 블루온

    2010년 9월, 현대자동차는 국내 최초로 개발한 고속 전기자동차 블루온(BlueOn)을 청와대에서 발표했습니다.

    차명인 블루온은 현대자동차의 친환경 브랜드인 '블루(Blue)'에 '본격적인 시작(Start On)'과 '전기 스위치를 켜다(Switch On)'라는 뜻을 가진 '온(On)'을 조합한 합성어입니다. 우리나라에 판매되지 않은 유럽 전략 차종인 i10을 기반으로 제작되어 컴팩트한 이미지로 구현된 '블루온(BlueOn)'은 고효율 전기모터와 함께 국내 최초로 국산화 개발에 성공한 16.4kWh의 전기차 전용 리튬이온폴리머 배터리를 탑재했습니다. 최고출력 81ps(61kW), 최대토크 21.5kg.m(210Nm)의 강력한 동력성능을 갖췄습니다. 최고속도 130km/h을 기록했으며, 정지상태부터 100km/h까지 도달하는 시간도 13.1초에 불과해 동급 가솔린 차량보다 우수했습니다.

    1회 충전으로 초기 목표 130km 대비 10km 증가된 최대 140km까지 주행이 가능했고, 일반 가정용 전기인 220V를 이용한 완속 충전 시에는 6시간 이내에 90% 충전이 가능했습니다. 380V의 급속 충전을 이용하면 25분 이내에 약 80% 충전이 가능했습니다.

    지식경제부, 국토해양부와 환경부 등 1단계 정부 기관에 17대가 보급되었고, 2011년 3월에는 경기도에 업무용으로 2대가 보급되었습니다. 블루온은 세계 친환경 자동차 시장에서 현대자동차의 경쟁력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지닌 차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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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본격적인 친환경차 개발 가속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0년:본격적인 친환경차 개발 가속

    국내에 본격적인 친환경차 개발이 시작된 것은 2010년에 들어서면서부터입니다. 현대자동차는 2010년 9월에 국내 최초로 개발된 고속전기차인 '블루온'을 공개하면서 친환경차 개발에 열을 올렸습니다. 충전 속도나 성능 면에서 일본 미쓰비시의 i-MiEV보다 나은 성능을 보였던 블루온의 개발을 통해 친환경차 경쟁력을 높인 현대자동차는 2011년 5월에 첫 양산용 가솔린 하이브리드차인 '쏘나타 하이브리드'를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GM은 준중형차 기반으로 제작된 라세티 프리미어 전기차를 2010년 11월에 일반 공개하고, 경·소형차 하이브리드 차량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르노삼성 또한 뉴SM3기반의 전기차를 개발했습니다. 국내 완성차 업계는 세계적인 추세를 따라 친환경차 개발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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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자동차부품 글로벌 경쟁력
    제고 대책 수립 및 발표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1년:자동차부품 글로벌 경쟁력 제고 대책 수립 및 발표

    지식경제부는 2011년 6월, 관계부처 합동으로 '자동차부품 글로벌 경쟁력 제고 대책'을 수립, 발표했습니다. 세계 자동차산업은 회복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외국에 진출한 국내 기업의 현지 생산이 늘어나면서 자동차 부품의 해외 공급이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지식경제부는 국내 부품업체가 해외 시장에서 좀 더 확실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체계적 지원방안을 마련했습니다.

    자동차부품 글로벌 경쟁력 제고 대책의 추진전략은 총 다섯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로, 자동차 부품업체는 해외의 글로벌 완성차 업체와 지속적으로 접근하여 공급 루트를 발굴합니다. 또한 완성차 업체에 대한 정보 획득이 용이하도록 부품업체의 해외현지 활동을 지원합니다.
    둘째로, 한국, 중국, 일본 간 지리적 근접성을 활용해 자동차 부품의 해외공급 역량을 높입니다. 이를 위해 한·중·일 순회 집하 물류체계를 구축하고 상대국 정부와 자국 내 자동차 운행 허용을 위한 협력을 체결합니다.
    셋째로, 미국에 진출한 국내 부품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 내 자동차 생산의 중심이 되는 주 정부와 협력 채널을 구성하고 양국 간 자동차 분야 협력을 진행합니다.
    넷째로, 자동차 분야 연구개발 시에 글로벌 기업의 부품수요 트렌드를 반영하기 위해 이미 개발된 단위 부품의 통합 기술은 물론 글로벌 완성차 업체와의 국제공동 연구가 가능한 분야의 부품까지 적극 개발하도록 유도합니다. 또한 선진기업과 격차가 있지만 향후에 전략품목이 될 수 있는 부품과, 장기적으로 미래시장 창출 잠재력이 커서 국내 기술 확보가 조속히 필요한 분야의 기술도 개발합니다.
    다섯째로, FTA 체결로 인한 관세 감면 혜택에 필요한 원산지 증명을 위해 영세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관세청과 공동으로 FTA-Pass(원산지관리시스템) 보급을 확대하여 기업의 시스템 구축 부담을 해소합니다.

    지식경제부는 이러한 정책을 통해 우리나라 자동차부품의 글로벌 공급구조를 선진화하고 2015년에는 자동차부품 수출 350달러, 1억불 수출기업 40여 개 사, 세계 1004개 부품업체 7개사를 육성한다는 목표를 제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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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제주도, 환경부의 전기자동차
    선도 사업 대상지로 선정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1년:제주도, 환경부의 전기자동차 선도 사업 대상지로 선정

    제주전기자동차

    지방자치단체들은 상대적으로 중앙정부보다 전기자동차 육성정책을 신속히 추진했습니다. 2008년부터 광역경제권 선도 사업, 지역전략사업 등의 이름으로 광주광역시와 대구광역시, 전라남도 등에서 추진하고 있는 사업들이 대표적입니다.

    제주도는 2011년 4월, 전국에 전기자동차를 보급하는 환경부의 선도 사업 대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선정 당시, 2014년까지 전기자동차 320대와 충전기 330여 대를 제주도에 보급하기로 했습니다. 섬 지역이자 관광명소인 제주도에 운영되는 1만 2천 대 상당의 렌터카를 전기자동차로 바꿀 경우 그 파급효과가 크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었습니다. 전기자동차의 절반정도를 렌터카로 배정했지만, 전기자동차 값이 대당 6천만 원으로 고가였기에 보조금 지급에도 불구하고 선도 사업에는 대기업 렌터카 업체만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정부는 선도도시 사업을 통해 전기자동차 배터리 충전 시간은 줄어들고 주행거리는 늘어나는 상용화 모델을 찾아낸다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침체에 빠진 지방 경제를 전기자동차 생산으로 되살리고, 역량 있는 중소기업들을 도와 자동차 산업의 발전을 이끌겠다는 목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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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현대자동차 텔레매틱스 브랜드
    '블루링크' 최초 공개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1년:현대자동차 텔레매틱스 브랜드 '블루링크' 최초 공개

    현대자동차는 2011년 1월, 미국 라스베거스에서 열린 2011 국제전자제품박람회(이하 CES)에서 텔레매틱스 브랜드인 '블루링크'를 최초로 공개했습니다. 블루링크(Blue Link)는 현대자동차를 상징하는 '블루'와 연결성을 뜻하는 '링크'의 합성어입니다. 이 제품은 인터넷, 블루링크 전용센터, 차량 내부에 탑재되는 내비게이션의 결합을 통해 차량의 현재 상황과 각종 외부 정보를 운전자에게 알려주고, 운전자가 이를 능동적으로 제어할 수 있도록 한 현대차의 첨단 텔레매틱스 서비스 브랜드입니다.

    '블루링크'는 스마트 콘트롤(Smart Control), 세이프티(Safety), 카 케어(Car Care), 어시스트(Assist), 인포(Info) 등 총 5가지 영역에 16개의 세부 서비스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제품은 자동차-IT 기술이 나아가야 할 미래의 가능성을 제시했고, 현대자동차가 가진 자동차-IT간의 융합(convergence) 기술력을 증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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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현대자동차,
    소형 쿠페 벨로스터 출시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1년:현대자동차, 소형 쿠페 벨로스터 출시

    2011년 3월, 현대자동차는 소형 쿠페 벨로스터를 출시했습니다. 벨로스터는 투스카니를 대체하는 차종이었습니다. 아반떼(MD)의 플랫폼을 공유했고, 2007년에 개최되었던 서울모터쇼에 선보인 벨로스터 컨셉트 카(HND-3)의 양산형 모델이었습니다.

    1.6L 감마 터보 GDi 엔진이 장착되어 차가 멈춘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속도를 높이는 데 걸리는 시간이 7.4초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높아진 성능에 비례하여 브레이크와 서스펜션 등의 수준을 높여 주행 감각을 확보했습니다. 운전선 쪽에 도어 1개, 조수석 쪽에 도어 2개가 달린 비대칭 도어 형태였고, 바디 컬러 인서트 타입 알루미늄 휠 등이 디자인적 특징이었습니다.

    벨로스터는 현대자동차의 차별화된 특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커뮤니케이션 브랜드인 Premium Youth Lab을 의미하는 PYL의 첫 번째 차종이었습니다. 무한도전의 장기 프로젝트인 무한도전 스피드레이서에서 유재석과 정준하가 레이싱용으로 개조된 마스터즈급 벨로스터를 운전하는 것을 방영하며 젊은 세대의 감각에 맞춘 디자인과 주행능력을 뽐내기도 했습니다.

    벨로스터
    벨로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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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현대자동차, 국내 최초
    CNG 하이브리드 시내버스
    '블루시티' 공개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1년:현대자동차, 국내 최초 CNG 하이브리드 시내버스 '블루시티' 공개

    현대자동차 블루시티

    2011년 1월, 현대자동차는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국내 최초 CNG 하이브리드 시내버스인 블루시티(Blue City)를 공개했습니다. 국내 표준형 저상 시내버스를 기본 모델로 하여 제작한 '블루시티'는 국내 최초로 순수 독자 기술로 개발한 CNG 하이브리드 버스였습니다. 압축천연가스(CNG) 엔진에 전기모터를 결합해서 두 가지 동력원을 함께 사용하는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적용했는데, 이를 통해 연료 효율을 향상시키고 오염물질 배출을 감소시킨 친환경 자동차였습니다.

    240마력의 G-CNG엔진과 6단 자동변속기를 적용했고 60kW(82마력)의 고효율 전기모터와 3.8kWh 용량의 리튬폴리머 배터리를 장착해 뛰어난 안정성과 배터리 성능을 확보했습니다. 출발·가속할 때나 경사로를 올라갈 때는 엔진과 모터를 동시에 사용했고, 감속하거나 경사로를 내려갈 때는 배터리를 충전하는 방식으로 구동되었습니다.

    이 차량의 1호차는 2012년 7월에 서울특별시 시내버스 업체인 아진교통(141번)에 판매되었습니다. 서울승합(3413번)에 2호차를 판매한 뒤로 점차 구매하는 업체가 확산되며 친환경 차량의 확산에 공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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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현대자동차, '병렬형 하드타입
    하이브리드 시스템' 적용한
    쏘나타 하이브리드 출시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1년:현대자동차, '병렬형 하드타입 하이브리드 시스템' 적용한 쏘나타 하이브리드 출시

    쏘나타 하이브리드

    2011년 5월, 현대자동차는 독자 개발한 '병렬형 하드타입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적용한 쏘나타 하이브리드 차량을 출시했습니다. 이 차량은 2008년에 프로젝트명 'YF HEV'로 개발에 착수하였고, 34개월가량의 연구 개발 기간, 총 3,000억 원 가량의 개발비가 투입되었습니다.

    이 차량이 처음 공개된 것은 2011년 4월에 열린 '2011서울모터쇼'에서였습니다. 쏘나타 하이브리드에 적용된 병렬형 하드타입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현대차가 세계 최초로 독자 개발한 시스템이었습니다. 이것은 세계 최고 수준의 친환경 기술력과 성능을 확보한 신개념 하이브리드 모델이었습니다. 토요타와 GM 등이 사용하는 복합형 하드타입 하이브리드 시스템과 비교해 구조는 간단하면서도 성능은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그리고 현대자동차는 순수 독자기술로 개발한 하이브리드 전용 엔진인 누우 2.0과 30kW급 하이브리드 전기 모터를 탑재해, 최고출력 41ps(30kW), 최대토크 20.9kg.m(205Nm)의 동력성능을 구현했습니다. 전기차 모드 주행 시 엔진 소음이 없어서 보행자가 차량의 접근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을 대비하여 '가상 엔진 사운드 시스템'을 적용해 보행자의 안전성을 향상시키기도 했습니다.

    쏘나타 하이브리드는 우리나라 최초의 가솔린 하이브리드 차량입니다. 또한 최초로 수출된 하이브리드 차량이기도 했습니다. 2014년엔 신규 LED 리어 램프, 퍼들 램프 내장 아웃사이드 미러, LED 독서등 및 룸 램프가 신규 적용된 제품을 선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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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기아자동차, 레이 전기차 출시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1년:기아자동차, 레이 전기차 출시

    기아 레이(Kia Ray)는 2011년 11월 29일에 출시된 경차입니다. 레이는 영어로 '빛', '서광'등을 뜻하는데, X-ray, Blue-ray 등의 낱말에서 볼 수 있는 ray와 같은 의미입니다. 2011년 12월에 출시된 전기차 버전의 레이 EV는 우리나라 자동차 중 처음 시판되는 전기차였습니다. 이 차량은 1회 충전 시 91km를 주행할 수 있었고, 모터 최대출력은 50kW, 최고 속도는 시속 130km, 제로백은 15.9초의 성능을 보여주었습니다.

    디자인은 레이 EV 전용으로 화이트컬러의 알로이 휠이 탑재되었고, 라디에이터 그릴엔 EV 엠블럼이 박혀 있었습니다. 그밖에는 그릴 내 숨어 있는 충전 포트를 제외하면 가솔린 모델과 차이가 없었습니다. 주행가능 거리가 트립컴퓨터에 표시되었고 배터리의 잔량과 전력 사용 및 충전 여부가 직관적으로 디스플레이되었습니다.

    일반 판매보다 공공 기관과 관공서에서 주로 사용되는데, 카 쉐어링 서비스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서울 도심에서도 렌트가 가능해 앞으로 전기차 충전소가 증가할 경우 시장성이 밝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레이EV
    레이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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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현대모비스,
    인공지능 LED 헤드램프
    국내 최초 개발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2년:현대모비스, 인공지능 LED 헤드램프 국내 최초 개발

    2012년 4월, 현대모비스는 주행조건에 따라 램프의 각도와 조도를 스스로 조절하는 'LED 풀(Full) AFLS'와 상/하향등을 자동 전환시켜 주는 '하이빔 자동제어(HBA-High Beam Assist)'를 국내 최초로 개발했습니다.

    'LED Full AFLS'는 곡선도로, 시가지, 고속도로, 교차로, 악천후 등의 도로상황과 날씨 등 다양한 주행조건에 따라 운전자의 조작 없이도 자동으로 라이트의 조명 각도와 조도를 조절하는 시스템입니다. 또한 가로등이 설치되어 있거나 빛의 밝기가 충분한 시가지에서는 전방을 향한 조명을 줄이고 빛을 좌우로 넓게 비추며, 우천 시에는 빛이 비에 반사돼 상대편 차량 운전자의 눈부심을 유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전조등의 방향을 조절해 상대편 차량 운전자의 눈부심을 최소화시키는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이빔 자동제어'(HBA)는 상/하향등을 자동으로 전환해주는 기술입니다. 운전자 조작없이 자동차가 스스로 밝은 곳에서는 하향등, 어두운 곳에서는 상향등으로 전환합니다. 상향등 주행 시 전방이나 맞은편에 차량이 나타나면 하향등으로 자동 조정되고, 차량이 지나가면 다시 상향등으로 바뀝니다.

    이러한 기술들은 당시 독일 벤츠와 BMW, 아우디 등 일부 프리미엄 차량에만 장착되어 있었습니다. 현대모비스가 기술 개발에 성공하면서 국산차 중에선 처음으로 기아차 'K9'에 적용되었습니다.

    2012년 2월, 미국 크라이슬러 본사에서 협력사들과 공동 개최한 부품 전시회 및 기술 세미나에서 호평 받은 바 있는 이 두 기술은 현대모비스가 램프 부문에서 세계 유수의 기업들에 뒤지지 않는 기술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하였습니다.

    LED 현대모비스 헤드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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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현대자동차,
    누우 2.0 연속 가변 밸브
    리프트(CVVL) 엔진 개발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2년:현대자동차, 누우 2.0 연속 가변 밸브 리프트(CVVL) 엔진 개발

    현대자동차는 2012년, 기존 세타 엔진을 대체하는 차세대 중형 엔진인 누우 2.0 CVVL 엔진을 개발했습니다. 이 엔진은 기존 일정한 높이로 열리던 흡기 밸브를 엔진 회전 속도에 따라 다른 높이에서 열리도록 개량함으로써 흡입 공기량을 최적화 했습니다. 이는 엔진의 연비 및 성능을 극대화하는 연속 가변 밸브 리프트(CVVL, Continuously Variable Valve Lift) 기술이라고 합니다. 연속 가변 밸브리프트(CVVL) 기술은 선진 메이커들도 개발이 어려워 중도 포기하곤 하는 고난도 밸브 구동기술입니다.

    현대자동차는 이를 독자 설계하여 개발하면서 크기는 경쟁사 대비 70%로 줄이고, 출력은 기존 엔진보다 3.6% 개선된 172ps를 기록했습니다. 또한 연비는 7.7% 개선하여 14.0km/L를 달성했습니다.

    연속 가변 밸브리프트(CVVL) 엔진 개발을 통해 현대자동차는 국내 85건, 국외 92건 등의 특허를 확보했고, 2014년 제3주차 'IR52 장영실상'을 수상하면서 차세대 엔진기술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연속 가변 밸브 리프트 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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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차량용 블랙박스의 활용 증가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2년:차량용 블랙박스의 활용 증가

    2012년에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이 공포되면서 차량용 블랙박스의 활용이 증가했습니다. 차량용 블랙박스의 원래 목적은 차량의 주행정보를 기록하는 것입니다. 2012년에 시판된 대부분의 차량용 블랙박스는 이 기능에 추가로 전방을 촬영할 수 있는 소형카메라에 3축 가속도 센서와 GPS 수신모듈 등을 부수적으로 장착해서 차량 전면부의 상황을 녹화해 디지털 메모리카드에 저장할 수 있었습니다.

    2012년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을 살펴보면 교통사고가 발생할 경우 제21호 서식에 맞추어 교통사고 보고서를 작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서식엔 사고의 일시와 장소, 피해상황, 현장상황, 사고유발요인 등을 기록하고 현장 약도와 조사자 의견도 첨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과거에는 이러한 형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사고 당사자의 인터뷰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특히 보행자 사고의 경우 보행자의 회피행동과 관련된 내용을 사고를 유발한 운전자를 통해 수집해야 하는 불가피한 상황도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인터뷰 형식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고 사고 당시의 상황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용이했기 때문에 차량용 블랙박스는 빠르게 보편화되었습니다.

    차량용 블랙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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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신차 안전도 평가 결과 정보 제공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3년:신차 안전도 평가 결과 정보 제공

    2013년부터 우리나라는 소비자의 편의를 위해 8가지 분야(충돌, 주행, 제동, 보행자, 좌석 등)에 대한 평가결과를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1999년부터 우리나라는 신차 안전도 평가를 시행하여 소비자에게 안전한 자동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제작사로 하여금 안전한 자동차를 제작하도록 유도해, 결과적으로 안전도 향상을 이뤄냈습니다. 하지만 변별력이 떨어졌고 평가결과에 대한 정보제공이 유연하지 못해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우리나라는 신차 안전도 평과 결과 정보 제공과 동시에 기존 충돌분야, 주행, 제동 분야 등 9개 항목에 '능동 안전 분야'를 추가하여 자동차 안전도 종합등급제를 시행했습니다. 2013년부터 시행되는 능동안전장치는 안전띠 미착용 경고장치, 차선이탈 경고장치 및 전방 충돌 경고장치였고 연차적으로 확대해나갈 계획이었습니다.

    신차 안전도 평가 결과 정보 제공과 능동 안전 분야 추가를 통해 우리나라는 자동차에 대한 보다 투명한 평가가 가능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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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최고속도 제한장치
    의무 장착 대상 확대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3년:최고속도 제한장치 의무 장착 대상 확대

    2013년 8월 16일, 자동으로 속도를 제한하는 최고속도 제한장치의 의무화 대상이 확대되었습니다. 기존에는 승합자동차의 경우 10톤 이상일 경우에만 장착 의무를 가졌지만 2012년에는 4.5톤 초과 10톤 미만 승합자동차가, 그리고 2013년부턴 4.5톤 이하 승합자동차까지 모두 속도 제한장치가 의무화 되었습니다. 화물자동차 역시 3.5톤을 초과할 경우 의무적으로 최고속도 제한장치를 장착하게 되었습니다.

    최고속도 제한장치 의무 장착 대상 확대는 과속에 의한 사고 예방과 여성, 노약자의 추돌사고 예방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동차 전문기관인 교통안전공단(자동차안전연구원)에서 연구한 결과를 반영한 자동차 안전기준을 기반으로 규칙을 개정한 것이었습니다. 자동차 안전기준에 관한 규칙은 국토해양부가 교통사고 예방을 위해 자동차에 최고속도제한장치, 제동력지원장치 등 안전장치를 의무적으로 장착하도록 안전기준을 강화하여 사고 위험성을 줄이려는 취지로 개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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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현대모비스,
    3D 프린터 이용 공정혁신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3년:현대모비스, 3D 프린터 이용 공정혁신

    현대모비스는 2013년, 3D 프린팅 기술을 활용해 모듈이나 조향, 전장 등 연구소 전 부문의 시제품을 개발했습니다. 신속조형기술(RP. Rapid Prototyping)이라고도 불리는 3D 프린팅 기술은 3D CAD, CAM 데이터를 가공 과정 없이 플라스틱 액체나 파우더 같은 원료를 적층해 3차원의 입체 실물 제작이 가능한 것이 특징입니다. 기존 수치제어기계(NC. Numerical Control)를 이용해 재료를 깎고 다듬어야 하는 것에 비해 제조 공정과 개발기간을 50% 정도 줄였습니다.

    현대모비스는 2002년에 3D 프린터를 처음 도입했고, 2013년까지 FDM방식 2대, SLA방식 1대를 보유했습니다. FDM은 고체수지 재료를 녹여 한 층에 0.254mm씩 쌓아 만드는 방식으로 제작비용과 시간 면에서 효율적이었습니다. SLA는 광경화성 액상 표면에 레이저를 쏴 고형화시켜 적층하는 방식으로 정밀한 모형 제작이 가능했습니다.

    현대모비스는 3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새로운 아이템으로 각광받는 3D 프린터의 활용범위를 확대해, 설계 검증 시스템을 업그레이드 시켰습니다.

    현대모비스 3D 프린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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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르노삼성자동차,
    소형 SUV QM3 출시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3년:르노삼성자동차, 소형 SUV QM3 출시

    QM3

    르노는 2013년 3월에 개최된 제네바 모터쇼에서 소형 SUV이자 르노삼성자동차의 5번째 차종인 QM3를 공개했습니다. 차명인 QM3에서 QM은 'Quest Motoring'을 의미하고, 3은 준중형급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울모터쇼에서 처음 공개되었습니다. 사전예약이 11월에 시작되었는데, 우선판매 분인 1,000대가 7분 만에 예약 판매가 됐고, 3,000대가 추가 계약되었습니다. QM3에는 배기량 1,461cc의 I4 직분사 디젤 엔진이 탑재되었습니다. 최고 출력은 90마력이었고, 최대 토크는 22.4kg.m으로 푸조 뉴 2008 엔진과 비슷한 수치를 보였습니다. 탄력적인 가속감을 가진 유러피언 스타일을 강점으로 내세운 디젤 엔진이 장착된 QM3는 독일 게트락사의 듀얼 클러치 트랜스미션을 장착했습니다.

    QM3의 공인연비는 수동변속기를 탑재한 경우 리터당 평균 18.5km를 주행합니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103.0g/km 수준에 불과해 친환경적이었습니다. 또한 동급에서 유일하게 뒷좌석 슬라이딩 시트가 적용되어 트렁크 적재 공간을 377L에서 최대 455L까지 증가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강점을 바탕으로 2013년 출시 이후 2014년 9월까지 총 9,923대가 팔리는 등 QM3는 르노삼성자동차의 핵심 모델로 부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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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완성차 생산능력 500만대 조립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3년:완성차 생산능력 500만대 조립

    완성차 생산능력 500만대 근접

    2013년 국내 완성차 생산능력은 498만 4천 대로 전년대비 11만 2천 대가 늘어나면서 500만 대에 근접해졌습니다. 기아자동차는 승용차 생산능력이 9만 대 증가했고 한국GM도 2만 2천 대가 늘었습니다. 다만 그 외 업체의 생산능력에는 변동이 없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국내 생산능력을 동결하고 있었지만 기아자동차가 전년에 이어 꾸준히 생산능력을 늘려온 탓이었습니다. 점차 기아와 현대는 같은 수준의 생산능력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2014년에는 한국GM의 생산물량 축소 등으로 국내 완성차 생산능력이 468만대로 줄어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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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현대·기아 자동차,
    해외생산 400만대 돌파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3년:현대·기아 자동차, 해외생산 400만대 돌파

    2013년에 현대·기아자동차의 해외생산은 전년대비 8.4% 증가한 410만 8천대를 기록했습니다. 신 공장 가동 본격화, 신 모델 투입, 현지 판매 호조 등이 어우러져 해외 생산 400만 돌파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현대는 2011년 말부터 생산을 개시한 중국 제3공장을 본격 가동하면서 중국 내 생산을 104만 대(전년대비 21.6%증가)까지 끌어올렸습니다. 또한 브라질 공장도 가동을 본격화해서 16만 7천 대의 생산 실적을 기록했습니다. 인도 공장은 전년대비 소폭 감소한 63만 3천 대를 생산하며 현대와 기아의 해외 거점 중에서 유일하게 감소치를 보였습니다. 미국 공장은 3교대제 도입 등의 영향으로 전년대비 10.6% 증가한 40만 대를 달성했고, 신차 투입으로 생산규모가 확대된 터키에서는 10만 2천 대가 생산되었습니다. 체코 공장과 러시아 공장 또한 전년대비 소폭 증가한 30만 3천대와 22만 9천대를 생산하였습니다. 2013년 현대의 해외생산은 전년대비 15.1% 증가한 287만 5천 대에 달했습니다.

    기아자동차는 K3, 뉴씨드 등 현지 전략차종과 스포티지, 쏘렌토 등 SUV의 인기가 지속되면서 중국, 슬로바키아, 미국 등 모든 해외공장의 생산이 증가했습니다. 기아의 해외 생산은 전년대비 8.4% 증가한 123만 3천 대를 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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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북미·서유럽·아시아에 대한
    수출 호조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3년:북미·서유럽·아시아에 대한 수출 호조

    2013년, 선진시장인 미국·서유럽과 성장세인 아시아 지역에 대한 자동차 수출이 증가했습니다. 다만 중남미와 동유럽에 대한 자동차 수출은 현지 생산 확대로 인해 감소했습니다.

    북미 시장은 경기회복으로 인한 시장이 활성화되고, 고연비 소형차 선호도가 증가하며, 국산차 품질경쟁력 제고, 2012년 하반기부터 본격 수출된 스파크와 트랙스의 호조에 따른 한국GM의 수출 증가(58.3%) 등의 요인으로 전년대비 5.6% 증가한 95만 5천 대가 수출되었습니다. 북미 지역 중 최대 시장인 미국에는 전년대비 9.5% 증가한 75만 9천 대가 수출되었습니다.

    유럽에는 서유럽 지역에 트랙스, 스파크, 모닝이 좋은 반응을 이끌어 전년대비 2.0% 증가한 40만 6천대가 수출되었습니다. 다만 동유럽 지역은 경기부진 여파로 러시아 등의 자동차 수요가 위축되면서 전년대비 -20.3%로 수출이 줄어들었습니다. 때문에 유럽 전체는 7.2% 감소한 63만 3천대 수출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시아 지역은 SUV의 수요가 확대되고 있는 중국으로 쌍용이 전년대비 89.4%, 르노삼성이 전년대비 30.8% 수출 증가를 이루면서 아시아 전체적으로 전년비 5.4%의 상승세를 이루어 18만 9천 대가 수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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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수입차 판매 15만대 돌파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3년:수입차 판매 15만대 돌파

    2013년 수입차는 15만 6천 대가 판매되며 전년보다 19.6% 증가한 판매량을 보였습니다. 수입차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수입차의 국내 승용차 점유율은 12.1%로 늘어났습니다. 이는 2,000cc 미만 수입 중·소형차 출시가 늘어나고 수입차의 가격경쟁력이 높아졌기 때문이었습니다. 20~30대 젊은 층을 중심으로 수요가 늘어나면서 수입차 시장이 활기를 띄었습니다. 고유가에 따른 유지비 부담과 엔진 다운사이징의 영향으로 2013년 국내에서 판매된 수입차 중 2,000cc 미만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년 49.4%에서 53.5%로 상승했습니다. 고연비 차량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디젤차가 9만 7천 대(62.1%), 하이브리드 차가 6천 대(3.7%) 판매되었습니다.

    국산차는 사양 및 디자인이 고급화되고 가격이 인상되는 반면, 수입차는 FTA에 따른 관세 인하 적용 및 현금 할인 등으로 가격이 저렴해지면서 수입차와 국산차 사이의 가격 격차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수입차 시장은 2천~3천만 원대의 다양한 중소형 모델 투입, 인기 모델 신형 출시 등으로 공세를 계속했습니다. 브랜드 국적 중에서는 유럽계의 독주가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독일 중심의 유럽계 수입차의 판매는 전년보다 26.3% 증가한 12만 3천대를 기록해서 전체 수입차의 78.5%를 차지했습니다. 반면에 일본 수입차는 전년대비 감소한 2만 2천대에 머물러 수입차 비중이 14.1%에 그쳤습니다.

    수입차 판매 15만대 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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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현대자동차,
    구글과 차량용 IT 개발 제휴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4년:현대자동차, 구글과 차량용 IT 개발 제휴

    2014년 1월, 현대자동차는 미래형 '스마트 카'를 개발하기 위해 세계적 정보기술 업체인 구글과 손잡았습니다. 구글은 2014년 1월 6일에 공식 블로그에서 현대차 및 아우디, GM, 혼다 등 글로벌 자동차 4개사 및 그래픽 카드 전문업체 엔비디아와 전략적 제휴를 체결하고 '열린자동차연합(OAA-Open automotive Alliance)'를 결성했다고 밝혔습니다.

    열린자동차연합은 안드로이드OS를 기반으로 사람의 음성만으로 e-메일과 지도 정보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동차용 IT서비스를 개발, 출시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제네시스 2015년형 모델에 안드로이드 기반 자동차 소프트웨어 'GPM(Google Projected Mode)'를 탑재하기로 했습니다.

    구글은 자동차와 스마트폰을 연동시켜 스마트폰을 통해 자동차가 운전자의 목소리와 시선의 음직임을 감지하고 필요한 정보를 입수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더 나아가서는 자동운전 기술까지도 개발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OAA 회원
    스마트카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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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영남대학교, 무인자동차 장애물
    회피 신기술 개발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4년:영남대학교, 무인자동차 장애물 회피 신기술 개발

    2014년 7월, 영남대 박용완(정보통신공학과) 교수 연구팀은 무인자동차가 빠른 속도로 장애물을 피할 수 있는 신기술을 개발했습니다. 연구팀은 2014년 4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정보기술 및 컴퓨터 관련학회 '제11회 정보기술 국제컨퍼런스'(ITNG 2014)에서 '센서 융합을 기반으로 한 자율주행자동차의 경로 생성'을 주제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논문에서 연구팀은 무인자율자동차가 주행 중에 나타난 장애물을 회피하는 경로를 빠르게 재설정하는 경로 생성 알고리즘을 제안했습니다.

    이때까지의 무인자동차는 고가의 3차원 레이저 스캐너를 통해 경로를 인식했습니다. 연구팀이 개발한 기술은 3차원 레이저 스캐너 대신 저렴한 2차원 레이저 스캐너와 카메라를 이용해 데이터를 융합하여 경로를 만드는 기술이었습니다. 이 기술은 고가의 센서를 이용하는 기술과 비교해서 비용이 고작 5%에 불과하고, 처리속도는 3배 이상 빨랐습니다. 이 신기술은 'ITNG 2014'에서 최우수논문상을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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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현대자동차,
    준대형차 아슬란 출시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4년:현대자동차, 준대형차 아슬란 출시

    아슬란

    내수시장에서 수입차의 판매가 증가하고 점유율이 상승하면서 현대자동차는 이에 대응하기 위한 방책을 강구했습니다. 합리적인 가격으로 럭셔리카를 원하는 유저를 타겟으로 개발한 아슬란(Aslan)은 이러한 현대자동차의 의도에 부응하는 차량이었습니다.

    2014년 10월 30일에 발매된 아슬란은 5세대 그랜저(HG)를 기반으로 내·외부를 변경해 고급화한 차종으로, 아슬란은 터키어로 사자를 의미합니다. 이 차량은 우리나라에서만 판매되었습니다.

    2014년 5월에 개최된 부산모터쇼에서 프로젝트명 AG로 선공개된 이 차량은 현대자동차의 디자인 철학인 플루이딕 스컬프처 2.0이 반영되어 절제와 균형을 통한 안정감 있는 디자인을 구현했습니다.

    가로형 구조의 대시보드는 넓은 시야를 확보하면서도 품격 있는 느낌을 주었고, 인체 공학적 설계를 통해 편의성을 높였습니다. 또한 앞·뒤 도어 유리와 전면 유리에 이중 접합 차음 유리를 적용하고, 엔진룸과 주요 부위에 흡차음제를 확대 적용하여 정숙성을 높였습니다. 헤드 업 디스플레이가 기본 적용되었고, 액티브 후드 시스템, 스마트 후측방 경보 시스템, 차선 이탈 경보 시스템, 어드밴스드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 등 고급 안전 사양을 갖췄습니다.

    그랜저가 2.4, 3.0 엔진을 얹었지만 아슬란은 3.0, 3.3 엔진을 얹어 더 높은 사양을 자랑했고, 그랜저가 경쾌한 디자인이었다면 아슬란은 중후한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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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자동차 보유대수 2,000만대 달성

    2009~현재-IT 융합 기술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다

    2014년:자동차 보유대수 2,000만대 달성

    2014년에 국내 자동차 보유대수는 전년대비 3.5% 증가한 2,012대를 달성했습니다. 2014년 한 해 동안 늘어난 자동차는 71만대에 달하고 이 중 67만대가 승용차였습니다.

    차종별로 나눠보면 승용차 1,676만 대(구성비 78%), 승합차 95만대(구성비 5.0%), 화물 및 특수차 342만대(구성비 17%)로 나타나 전년에 비해 승용차 비중이 확대되고 승합차 비중이 축소되는 추세가 이어졌습니다.

    용도별로 나눠보면 자가용 1,883만대(93.59%), 영업용 121만대(6.01%), 관용 7만5천대(0.37%)로 구성되었습니다.

    2014 자동차 보유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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